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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Apr 06. 2024

봄비

봄과 비와 꽃과 시 (2)

봄비

                                인용구


꽃 피기만을 기다렸다가

내리고 마는 봄비처럼

당신의 연락은 그렇게 옵니다


부슬부슬 옅은 비에도

부스러지는 마음이 있습니다
꽃잎 같은 소망이 내게도 있었습니다


비로소 찾은 나의 안녕이

여전히 불행한 당신에겐 혹시
죄가 됩니까 나는 또 죄인입니까


당신 소식은 늘 나의 추락을 동반합니다

우리는 여름을 보지 못할 테지요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미안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많은 것을 사랑하지만

그중에 당신은 더는 없습니다


한밤의 소나기로 모든 꽃이 지겠습니까

당신 생각 불거지면 저 역시도

나도 잠시 붉어지면 그만


당신은 최악을 쏟아내세요

나는 다음 봄에도 살아서

다시 살아서 꽃 피우겠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던데, 이번주는 내내 비 소식이 있었다. 지난주부터 벚꽃 피는 모습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꽃이 만개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야속하게 내리는 봄비 때문에 조금은 속상했다. 그래서 시의 1연 첫 두 줄을 적었다. 항상 슬픔은 가장 기뻐야 할 때 찾아오더라. 그걸 이제 시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붙여봤다. 시의 "당신"이 내 과거의 누군가를 저격하는 건 아니고, 약간 그런 존재 있잖아요. 이제 좀 살만하니 찾아오는 빚쟁이, 더럽게 질척대는 전 애인. 나의 불행을 비는 모든 사람들. 기껏 정리한 마음을, 마침내 찾은 행복을 기어이 헝클어뜨리고 마는. 그런 존재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사실 1연의 도입부만큼이나  마음에 드는 부분은 4연의 "당신 소식은 늘 나의 추락을 동반한다" 라는 표현이었어서, 그대로 4연의 내용으로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지난 몇 년 동안 썼던 봄의 꽃과 비를 다뤘던 시를 다시 읽으며 (낙화 I, II 등) 깨달은 것이 있었다. 봄에는 꽃을 노래해야 한다. 여린 꽃들이 보여주는 삶의 강함을, 생명의 순환을 찬미해야 한다. 이런 생각에 방점을 찍은 것이, 2021년의 봄에는 내가 이런 글도 썼더라. 심지어 제목이며 시작하는 문장이 위의 시와 같았다. (그래, 어쩐지 낯익은 문장이다 했어.)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종일 비가 내렸다.
우산에 내려앉은 젖은 꽃잎이 너무 무거워 눈물이 나올 뻔했다.

빗속에서도 개나리는 빤히 달아올랐다. 가지 끝에 간간히 초랗게 새순이 움트고 있었다.
세상에 채도를 더하는 것이 생명의 사명이라는 듯, 온 힘을 다해 만개하는 것들 앞에서 나는 무색해졌다.

나무는 비를 원망하지 않는다. 꽃에게 단단히 매달리라고 일러두고, 뿌리로는 물을 한껏 마신다. 그렇게 강해져서, 억센 소나기가 내릴 즈음에는 질긴 초록의 그늘을 만들 것이다. 그걸 알기에 꽃잎 몇 개도 기꺼이 나의 우산 위로 내려온 것이다. 나무가 그들의 유산이기에. 경외감이 들었다.

바람이 불어와 머릿결을 흩뜨리며 애수를 말렸다. 날씨가 궂어도 생명은 존재에 충실하면 된다. 그렇게 살아가면 풍경이 된다. 나도 아이의 웃음처럼 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 뚜렷한 색깔로 빛나고 싶다. 그런 막연한 바람이 오랜만에 불었다.

종일 비가 내렸다. 사이 간간이 섞여있는 꽃잎의 무게를 느끼며, 나는 단단히 걷기로 했다.

(2021.03.27, 봄비)


    그래서 뒤의 세 연을 더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억지로 강함을 자아내는 것이 당장은 좀 어색하고 유치한 것 같기도 한데, 또 내년 봄의 내가 읽으면 제법 기특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다. (근데 말장난은 좀 뺄 수 없습니까? 거참) 


    오늘 문학의 뜨락 친구들과 사전 투표장을 가는 길에 학교 벚꽃 구경을 잔뜩 했다. 모처럼 새내기 기숙사 앞을 지나가면서 본 풍경이 비 온 뒤라고 초라하진 않아서 기뻤다. 여전히 많은 꽃들이 매달려있었다. 오히려 비를 맞은 꽃잎이 분홍빛으로 물들어서 더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유를 찾아보니 꽃잎안토시아닌 색소는 수소 이온과 만나면 붉은색을 띤다고 니다. 비가 산성비였나봄..)


    앞으로 이 교정에서 몇 개의 봄을 더 보내게 될까. 아직은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하루였다.


카이스트의 벚꽃 (photo by 유재혁)
맥도날드 가는 길 (photo by 이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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