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용구 Apr 06. 2024

낙화 I, II

봄과 비와 꽃과 시 (1)

낙화 I

                        인용구


찰나동안 공중에 머무는 벚꽃을 보며, 죽음의 순간을 가늠한다. 꽃이 死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나무에서 스스로를 분절하는 순간인가, 영원 같은 체공 끝에 지면에 닿는 순간인가. 아니면 썩어 바스러져 花葉이라 부를 수 없게 되는 시점일 수도 있다.


별안 떠오른 의문에 여러 답을 견주어보는 동안에도 花雨는 계속되었다. 백여 개의 꽃잎과 눈을 마주쳤다. 어디까지가 生이냐고, 나는 삶이 아니냐고 묻는 듯했다. 그 하나하나가 애틋하여 답을 얼버무렸다.


어쩌면 죽음은 시각으로 표현되는 일순간의 그침이 아니고, 지속되는 시간의 개념일지도 모른다. 생명이 불꽃이라면, 그것이 꺼진 후로도 잔존하는 온기를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생의 흔적이 남아있는 한 죽음은 결코 다함이 아니다.


그렇기에 저들의 죽음을 선고하는 것만큼 無用한 일도 없다. 허공에서 춤추는 것도, 발밑에 깔리는 것도 모두 죽음의 과정인 동시에 삶이다. 가지에 매달린 것들이라고 영원히 지지 않는 것이 아니므로, 죽음을 향하고 있으므로, 꽃은 피는 순간부터 죽어간다고 해도 오류가 없다.


살아가는 동안에도 죽음은 조용히 진행된다. 그리고 통칭하는 죽음 이후로도 삶은 다른 형태로 이어진다. 죽음은 삶만큼이나 가까이에 있음을 깨닫는다. 결국 숨멎음의 순간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이후의 내가 어쩔 도리 없는 시간 동안 나의 존재가 식어가는 모습이, 저 落花의 풍경만큼 찬란할 수 있을지. 그러려면 주어진 시간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본다.



끝으로 벚나무, 꽃을 떨군 자리에 푸르게 돋아나는 잎 때문에 나는 꽃이 滅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나무가 살아있는 한 이듬해에도 꽃은 필 것이기에 꽃은 다른 형태의 生으로 스스로를 치환할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나도 이 세상을 떠나는 모습이 또 다른 나를 위한 비켜섬의 형태가 되기를, 짐짓 바라본다. 


(2022.04.11)



낙화 II

                                인용구


"꽃이 비처럼 내렸다," 라는 말을 생각한다. 


떨어지는 꽃잎이 빗물이라면, 가지에 매달린 꽃들은 구름이려나. 가지마다 꽃구름이 잔뜩 끼었다. 그 사이로 언뜻 창공만큼 푸르른 새순이 비친다. 화창한 봄날, 가벼운 바람에 구름이 나부끼고 꽃비가 쏟아진다.


그런데, 그런가? 꽃은 비처럼 내리는가, 쏟아지는가.


꽃잎이 떨어진다 하여 언제 저 가지의 꽃들이 먹구름처럼 어두웠던 적이 있었나. 무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사정없이 곤두박질치는 빗물과 다르게, 꽃들은 '먼저 가오, 천천히 오시오,' 인사하며 자꾸만 뒤돌아보지 않던가. 빗방울은 세차게 지면을 때리는데, 꽃 내려앉을 때 누구 하나 다친 적 있던가.


그리하여 꽃이 비처럼 내린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눈처럼 내리는 것이 맞겠다. 그렇다고 눈처럼 차갑지도 않으니, 그래. 눈물, 꽃은 눈물처럼 흐른다. 메마른 곳에 조용히 맺히고는 차오르다가, 아른거리다가. 말없이 흐른다. 볼을 타고 떨어지듯 보드라운 바람의 윤곽 따라서 내린다. 낙화는 울음, 그러나 꼭 슬픔의 그것은 아닌. 서로의 다음 봄을 기약하는 작별의 눈물.


벚꽃이 지고 남은 자리에는 붉은 꽃대만이 남았다.

그 젖은 눈시울까지 기억하는 것이 봄을 안녕히 보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2023.04.13)




이맘때쯤이면 항상 꽃에 대한 시를 쓰고는 했다. 진짜 거짓말 아니고 확인해 보니 매년 하나씩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게, 원래 시는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을 써 내려가는 행위 아닌가. 봄에 처음 피는 꽃만큼 슬프고 아름다운 게 또 어디 있으랴...        

- "목련" 후기 중에서.


    봄에는 꽃을 노래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나의 봄- 꽃- 시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다. 2년 전 "낙화"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낙화 I) 삶과 죽음, 끝남과 이어짐에 대한 이야기를 인생의 여름도 밟지 못한 내가 논하는 것이 부끄러워 일부러 한자를 썼다. 꽃잎을 화엽(花葉)이라 부르고, 죽음도 사멸(死, 滅)처럼 더 무겁게 이야기하면 조금은 더 진중함을 갖춘 글처럼 보일 거라 기대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었다. 한 독자 분은 글의 일부를 멋진 손글씨로 필사해주시기도 했다.

인스타그램: @wayside_bin


    시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 글이지만, 이듬해 다시 찾아온 봄에 다시 글을 찾아 읽고 쓴 글 "낙화 II"와 함께 묶어 연작시로 부르면 어떨까 싶었다. 산문으로 썼지만 제법 시적인 표현이 많다고 생각해서. 공통의 주제는 헤어짐의 모습이다. 꽃처럼 안녕을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