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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Mar 15. 2023

목련

꽃이 피기를 피는 꽃이기를

목련

                        인용구


하룻밤 자고 났더니 꽃이 피었다

메마른 가지 끝마다 털난 봉오리

조만간 터질 것처럼 입술 물더니

새하얀 웃음 터뜨려 봄을 깨웠다


어떻게 순백색의 꽃을 피웠구나

겨울의 추위보다 눈의 포근함을

한밤의 어둠보다 달의 은명함을

오로지 사랑만을 너는 품었구나


꽃은 나무의 혈관을 따라 흐른다

모진 바람이 흔들던 가지 끝으로

상처 벌어진 봉오리 있는 곳으로

꽃은 피처럼 흘러서 삶을 전한다


원컨대 춥고 어두운 시간 끝에는

내게도 꽃이 피기를 꽃이 피여서

향기 남기기를, 아팠던 자리마다

피는 꽃이기를, 당신의 봄이기를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라는 유명한 소설의 문구처럼. 학회에 논문을 제출하자, 봄이었다.


아예 에너지 드링크를 30캔 한 박스를 시켜놓고, 연구실에서 근 2주를 밤낮없이 지냈다. 그렇게 논문을 냈다. 잘했는지는 모르겠고, 고생했다. 오랜만에 기숙사에서 잠을 푹 잤다. 밤에 게임도 실컷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출근을 하는데, 거짓말처럼 앙상한 나무 끝마다 꽃봉오리가 알알히 맺혀 있었다. 부지런한 매화랑 목련 몇 개는 이미 하얗게 꽃잎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세상은 봄이구나. 내 제출 마감 기한을 기다려 딱 맞춰 온 것인지, 아니면 나만 미처 몰랐던 것인지. 성큼 다가온 봄이 반가워 한참 꽃을 관찰하다가 걸음을 뗐다.


이맘때쯤이면 항상 꽃에 대한 시를 쓰고는 했다. 진짜 거짓말 아니고 확인해 보니 매년 하나씩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게, 원래 시는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을 써 내려가는 행위 아닌가. 봄에 처음 피는 꽃만큼 슬프고 아름다운 게 또 어디 있으랴... 어제는 모처럼 문학의 뜨락 정모도 참여해서 (8년째 동아리를 나오는 화석이 있다?!) 감수성이 가득 충전이 돼서는,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위의 글은 사실 어제 완전히 새롭게 쓴 건 아니고, 대학에 입학했던 해 (2016년)에 썼던 글을 퇴고하고 다듬은, 말하자면 "목련 (2022 ver.)"이다. 주제의식과 가장 핵심이 되는 펀치라인 (피=꽃)만 빼고 거의 모든 표현과 형식을 바꿨으니, 다시 쓴 글이라고 봐도 되겠다. 문학의 뜨락에 한 후배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 한번 모든 글자수를 엄격하게 맞춰보았으나, 어떻게 노력해도 만족스럽지 않은 구절이 있어 한참을 퇴고했다. 글쓰기 너무 어렵다;;


2016년의 봄, 하면 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목련, 나의
사촌 동생의 어린 시절의 볼의 살집 같은.


이라는 짧은 구절만으로 나의 세계를 바꿔놓았던, 시의 역할을 알게 해 준 동아리 선배가 있다.

아니 어떻게ㅋㅋ 저런. 글을. 쓰지. 저 글을 읽은 후부터는 목련을 생각하면 조건 반사처럼 저 구절이 떠오른다. 두툼하고 보드라운, 하얗고 순수한. 목련의 꽃잎을 표현하는 가장 아름다운 한 문장이 아닐까 싶다.


2016년의 나는 그 형의 피드백을 받기 위해 매주 글을 써 들고 동아리 정모를 나갔다. 글로 대화를 하며 우리는 빠르게 친해졌고, 또 영영 멀어졌다. 이제는 그 선배와 연락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뜨락에 남아 꽃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어린 후배들의 글에서 종종 적잖은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딱 그 무렵의 나로 돌아가, 잘 쓴 글이든 못 쓴 글이든 신경 쓰지 않고 무작정 글을 쓰고 싶어진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쓰는 글이, 당신의 글이 당시의 내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어떤 감동으로 다가갈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어서. 글 쓰는 게, 내보이는 게 참 어려운 요즘이다. 모르겠다. 글 잘 쓰는 선배- 하기에는 너무 글 잘 쓰는 멋진 후배들이 많고. 대신 술 잘 사는 선배나 해야지. 학교 생활의 작은 낭만들을 알려줄 수 있는 선배만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벚꽃이 만개한 4월의 카이스트는 어느 잔디밭에 앉아도 즐겁고 낭만적인 한 때를 보낼 수 있지만. 8년 차 선배가 추천하는 명소는 바로 목련 마당이다. 단, 밤에 갈 것. 가로등 조명을 받아 달빛처럼 반짝이는 목련 그늘은 인생에 잊히지 않을 시간을 선물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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