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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먹으러 전주 갔니? - 네.

7월 둘째 주 - (1) 전주 남부시장

by 인용구

둘째 주는 1박 2일로 전주를 다녀오기로 했다. 여행지를 전주로 정한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지도를 펼쳐 대전 근방의 관광지를 훑어보니 전주가 가장 접근성이 좋았다. 마침 절친 녀석이 여자친구를 만나러 매주 전주에 간다는 사실도 기억났다. 놈의 차에 동승하면 교통비도 아끼고, 가는 길에 오랜만에 노가리도 까면 좋겠다 싶었다. 이 자식, 연애 시작하고 완전 전설의 포켓몬이 됐단 말이지. (보기 힘들어졌단 뜻이다.)


전주는 이미 여러 번 찾았던 도시다. 친구들과, 가족들과 몇 번 와본 덕에 한옥마을 지리쯤은 손바닥처럼 익숙했다. 비빔밥도 올 때마다 먹어서 이번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제 전주는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홀로 찾은 전주는 또 다른 감상과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었다.


숙소는 공용 거실을 사용하는 게스트 하우스였다. 방이 좁긴 했지만 이부자리를 못 펼 정도는 아니고, 각 방마다 화장실도 있었다. 가격도 괜찮고, 위치도 좋아 꽤 만족스러웠다. 숙소에서 나와 다리 하나만 건너면 바로 남부시장. 전주에 올 때마다 이 일대를 찾는 것 같지만, 혹시 다른 명소가 있다면 댓글로 추천 부탁드립니다. 여행의 첫날은 남부시장 안에서도 방문하기를 벼르고만 있던 곳들을 정복해보기로 했다.

밤에 바퀴벌레만 안 마주쳤다면 진짜 좋았을텐데.

K-소세지, 최고의 순대를 찾아서



첫 목적지는 "조점례 남문 피순대" 식당이었다. 남부시장에 위치한 이 집은 피순대 맛집인지 여부를 떠나, 인지도 하나만큼은 확실했기에 관광객 입장에서 꼭 방문하고 싶었다. '전주에서 비빔밥은 쳐다도 안 본다 하더니 조점례를 가고 있네 ㅋㅋ. 전주 사람은 거기 안 가는데,' 하는 맛잘알 전주 원주민(?)분들께는 면목없지만, 처음 접하는 음식이라면 일단 제일 유명한 곳을 먼저 가보는 편이다. 일단 가장 알려진 맛으로 기준을 잡은 뒤에 숨겨진 맛집을 찾아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유명한 집은 다른 사람들의 리뷰와 나의 평가를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다.


사실 전주 먹거리를 검색할 때마다 피순대가 상단에 위치했으나 아직까지 먹어볼 기회가 없었다. 변명하자면, 동행인이 "돼지 피(선지)"라는 재료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해한다. 나도 선지국밥은 몇 번 먹어보고, 맛있다고 느낀 적도 있었지만 '그걸 굳이 순대에 넣는다고?' 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지난번 전주 방문 때까지만 해도, 당장 내가 순대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순대? 그거 그냥 싸구려 분식, 떡볶이 소스 발사대 아님? - 이게 분식집 찹쌀순대(*정확히는 당면 순대)에 길들여진 나의 인식이었다.


이런 인식이 깨진 건 천안에 사는 고모댁을 방문했을 때였다. 천안 먹거리 = 호두과자? 잔말 말고 아우내 장터를 가서 순대를 드십시오. 3.1 운동 때 유관순 누님께서 만세를 외치셨던 그 역사적인 땅에서, 전국을 휘어잡은 병천순대가 유래하였으니. 천안 병천순대 거리에는 "박순자 아우내 순대", "청화집" 등 여러 순대집들이 위치해 있는데, 그중에도 고모부 피셜 가장 맛집이라는 "충남집"에서 먹었던 순대는 나의 세계관을 뒤흔들어놨다.


내가 칡색 당면이 잔뜩 들어있는 순대만 먹어본 것은 아니었다. "야채순대" 같은 이름의, 조금 다른 구성의 순대를 먹어본 적은 있었지만 현지에서 먹는 병천순대는 확연히 달랐다. 순대 특유의 짙은 색의 비밀이 바로 선지였다. 포슬포슬하게 익힌 선지와 고기, 아삭한 야채가 어우러진 순대는 독일 소세지에 비견해도 부끄럽지 않은 음식이었다. 특히 양배추, 그 절묘한 익힘이 주는 향과 식감이 완벽했다. 나는 원래도 만두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인데 말이죠, 순대는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만두이자 하나의 쌈(ssam)이었다. K-식문화의 진수. 맛의 오케스트라. 하나의 예술이었다.


그 이후로 맛있다는 순대국밥집을 찾아다니며 나름 나만의 철학을 쌓아가던 바. 아직 제대로 된 백암순대 맛집조차 방문하지 못한 초짜이지만 전국의 특색 있는 순대를 모두 맛보겠다는 하나의 먹킷 리스트가 생긴 나였다. 그런 나에게 전주 피순대는 하나의 넘어야 할 산이자 기대되는 도전이었다. 애초에 나는 지역의 향토 음식, 특산물을 맛보는 것을 즐긴다.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먹는 것처럼, 여행지에서는 그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출난 음식을 먹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부푼 기대를 안고 "조점례 남문 순대"에 도착한 나는 일단 기본 순대국밥을 시켰다. 피순대와 여러 내장류가 들어있는 국밥이었다. 국밥 자체는 무난했다. 엄청 깊고 진하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고, 호불호 없이 깔끔한 느낌. 막창이 들어있는 건 특이하고 좋았다. 그러나 주인공은 순대.


저 음식 사진을 잘 찍지는 못해요

피순대의 모습을 처음 본 순간, 나의 심장이 뛰었다. 이 녀석, 검붉다. 그리고 크다. 기존에 보던, 대충 내 엄지 검지로 감쌀 수 있는 크기가 아닌 두꺼운 녀석이었다. 밥 위에 얹으니 마치 두꺼운 무 한 조각을 썰어놓은 것 같더라. 그 맛은 또, 말해 뭐해. 훌륭했다. 선지국밥에서 먹는 덩어리 선지를 생각하면 안 된다. 보통 선지 안 먹는 사람들은 그 탱글한 식감 자체부터 싫어하던데, 얘는 그런 것이 없었다. 잘 다져놓은 고기, 야채에 버무려서 거의 반죽처럼 만든 순대 소는 크리미하게 입 안에서 흩어졌다. 선지 특유의 향을 싫어하면 좀 호불호 갈리려나, 전 불-불호여서. 피비린내, 철분향 이런 거 전혀 없고 그냥 잘 익은 양념 고기 맛. 아니다, 그냥 '피순대'. 하, 비슷한 음식을 말하기 어려운, 독보적인 영역의 음식이었다.


첫 입에 감동한 나는 모둠순대 안주와 소주 한 병을 추가하고 말았다. 근데 개인적으로 순대가 맛있었으면 그냥 피순대만 추가하길. 모둠순대에 나오는 오소리감투나 암뽕, 이런 내장들은 그냥 우리가 다른 순대국밥 집에서 먹던 그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혼자 먹긴 일단 좀 많았음. (애초에 혼자 먹으라고 만든 메뉴가 아니긴 한데 ㅋㅋ) 피순대는 진짜 한입한입 감동하며 아껴먹었다. 맛있다. 이건 순대를 좋아하는 사람은 꼭 경험해보아야 하는 무엇이었다.


국밥에 모둠순대, 소주까지 함께하니 3만 원가량이 나왔다. 혼자 여행하는 자의 숙명 - 나눠 먹지 못하니 배부르고 돈도 더 든다. 그래도 배때지의 한계로 식욕을 억누르는 불행한 삶이 나의 것이 아니란 것에 감사를. 나와서 야시장을 조금 둘러보다가,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전주의 새벽은 차갑다.


남부시장 청년몰에 위치한 칵테일 바 "바, 차가운 새벽"은 사실 전주 여행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전주 출신의 문뜨 선배, 또 술잘알 친구들이 몇 번 언급했던 곳이어서 관심이 생겼고, 트위터에서 칵테일 바 계정을 팔로우하며 사장님의 철학과, 만족하는 손님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 친구들과 전주를 왔을 때도 근처를 어슬렁 거리며 입맛을 다셔봤지만, 3인 이상의 단체 손님은 받지 않는 곳이어서 결국 이번이 첫 방문이 되었다.

저 그냥 사진을 못 찍나봐요

이곳은 특이하게도 메뉴판이 없는 술집이다. 손님이 들어와 바텐더에게 자신이 먹고 싶은 맛 - 좋아하는 과일이라던가, 음식, 향 같은 걸 이야기하면 사장님이 그에 맞게 진단(?)을 내리고 술을 조제해주신다. 그 독특한 운영 방식 덕분에 내 지인들은 천상의 경험을 했다던데, 개인적으로는 방문하기 전부터 좀 걱정이 되었던 부분이긴 했다.


애초에 나는 낯선 사람이랑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물론 사회화의 결과로 적당한 예의를 차려가며 서로의 기분을 상하지 않는 선에서 교류는 가능하지만, 이곳에서 요구하는 것처럼 초면인 사람에게 나의 취향을 드러내는 것은 좀 부담스럽다. 더군다나 바텐더 님께서 굉장히 호전적이랄까, 적극적으로 다가오시면서도 바라는 말의 '양식'이 존재하는 것 같아서 좀 어려웠다. 나의 기호를 편하게 말하라더니, 정작 내가 하는 말에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님을 파악할 수가 없어요"라는 다그치는 듯한 반응이 자꾸 돌아오니까 의기소침해지고 기분이 별로였다. 어쩌라고요... 말마따나 "피순대 존맛탱" 한다고 그에 따라 술을 만들어주실 순 없잖아요... 있나..?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 저 위스키 베이스의 칵테일을 많이 마셔요. 올드 패션드나 갓 파더, 러스티 네일 이런 거 주로 찾는 편이에요.
- 술 이름 말고 다른 걸 말씀해주세요. 다른 곳에서 드실 수 있는 거 이곳에서 찾는 건 아니잖아요?
- 음, 옛날에 한 칵테일 바에서 갓파더를 시켰는데 살구씨? 향 나는 술을 말아주셨는데 그게 너무 좋았어요.
- 갓파더는 살구씨 리큐르가 안 들어가는데? 디사론노는 그런 맛이 아닌데.
- 네, 저도 갓파더 그때 너무 맛있어서 찾아봤는데, 아마레또? 그런 리큐르가 들어간다고 하더라구요.
- 디사론노가 아마레또에요. (말 끊으심 <- 나도 앎)
- 그래서 제일 많이 쓰이는 아마레또가 디사론노라길래 직접 사서도 먹어봤는데, 그 맛이 안 났어요. 그 체리향이 전 감기약 같아서 오히려 별로더라구요.
- 암튼, 살구씨 맛이 났으면 그건 갓파더가 아닌데? 그럼 잘못 드신 건데?
- 네... 아무튼... 그 비슷한 맛을 다시 찾고 싶어요...
- 살구씨 맞아요? 살구랑 살구씨랑 또 완전 다른데?
- ... 잘 모르겠어요... (살려주세요...)


몰라. 나는 어느 정도 이미 내적 친밀감과 각오를 챙겨갔음에도, 불쾌한 기분을 피할 수 없었다. 바텐더의 그 태도가 손님 응대 뿐만 아니라 자기 직원들에게도 별로여서 억장이 무너졌다... 약간, 직원이 실수하거나 좀 뚝딱댈 때마다 은근히 꼽주는 모습이 그냥 좀 내가 느낀 실망스러움을 강화하는 느낌이어서? 그냥 직원들 대놓고 혼내는 순간에는그 작은 술집 전체에 적막이 흐를 정도였으니까.


사실 트위터에서 봤을 때도 사장님 특유의 예민함을 조금은 눈치챌 수 있었다. 코로나가 끝났음에도 술집에 들어가려면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던가, (가족분 중에 환자가 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이해하고 존중한다.) 소음 방지를 위해 3인 이상 손님은 안 받는다던가. 사장님에게 분명한 자신만의 영업 방침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떤 지향하는 가치라던가, 술에 대한 철학이라던가.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고, 맛있는 술을 먹기 위해서는 바텐더의 섬세함에 열심히 맞추려는 의지도 있었다.


그런데도 너무 불편했다. 내가 딱히 바텐더 분의 비호감을 산 게 아닌 것 같은데도, (솔직히 그렇다 하더라도 그걸 티내는 게 맞아?) 왜 말을 저렇게 하지? 하는 섭섭함. 무례하다고 말하긴 어려웠지만, 낯설어하는 나를 배려하겠다는 마음은 느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공간이 큰 것도 아니어서, 나랑 그분의 티키타카를 나머지 손님들이 다 지켜보고, 내가 쭈그러들면서 전체적인 분위기까지 영향 가는 게 느껴지니까 더 불편하고.


에휴. 나 완전 악플러네. 그냥 제가 그 술집의 무드와 아주 안 맞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도 직원분들은 친절했고, 지옥의 스무고개 끝에 얻게 된 한 잔의 술은 (분하게도) 맛있었다. (물론 제가 술을 가리진 않긴 함.) 메뉴판이 없어서, 한 잔의 가격을 알지 못하는 것도 좀 아쉬웠음. 소심해져서 물어보지도 못했다. 웃긴 게, 그래도 나 한 잔 더 먹었다. 지옥의 스무고개를 한 번 더했단 말임. 이번에는 좀 다를까 싶어서. 좋은 기억으로 끝내고 싶어서. 그 다음 잔도 맛있긴 했는데, 결제할 때 보니 비쌌음. 몹시 슬펐음...

술 두 잔에 아이스크림. 4만원 나왔다.

몰라, 설마~설마 이 글이 차새벽 사장님에게 닿는다면 몹시 죄송한 리뷰지만, 정말로 오랫동안 이곳을 오고 싶어했고 여전히 응원하는 마음에서 조언 아닌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다. 나같은 사람을 위한 밸런스 게임 같은 것을 좀 준비해주셨으면 한다.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고객의 기호를 파악해서 만족스러운 한 잔을 제공하고 싶다는 철학은 존경하지만, 너무 자유도가 높은 게임에서는 뉴비들이 길을 잃는달까. MBTI 유형 검사 이런 걸로 사람을 구분하는 게 짜치기는 한데, 미리 틀을 잡을만한 질문 몇 개 해주시면 첫 방문객도 갈피를 잡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ex) 도수 높은 술도 잘 드세요? 술에서 신 맛 나는 건 어떠세요. 쓴 맛도 괜찮아요?


생각해보니 내가 하도 버벅대니까 나에게도 여쭤봐주시긴 한 것 같은데, 아예 내향형 인간을 위해서 이치란 라멘 주문서처럼, 종이에 글로 적어서 받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적당한 질문지에 비고란 하나만 있으면 취향 열심히 적어낼 수 있는데. 최근에 최강록 셰프가 나온 넷플릭스 <주관식당> 재밌게 봤는데 말이죠. 바텐더의 역량이 뛰어나다면 그런 시스템도 좋겠다, 싶었다. 이상, 초면엔 말보다 글이 편한 사람의 넋두리였습니다.


하나의 환상, 기대했던 행복이 어그러지는 순간은 서글프다. 하필 또 취한 상태여서, 그 환멸감을 정리하지 못해 한참 서성거렸다. 그러나 꿈은 어느 형태로든 끝난다. 꿈 깨는 것도 다시 다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이곳을 방문한 것이 후회가 되진 않는 것이다. 머릿속에서 그렸던 낭만과 현실의 괴리를 아프게 깨닫는 것도, 결국은 낭만의 일환이라는 생각. 오답을 하나 지워내는 것도 정답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노력이 드는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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