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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는 이유, 여행을 가는 이유

7월 첫째 주 - 대전 계족산

by 인용구

나의 마지막 방학. 그 모든 주말을 여행 또는 산행으로 채우겠다고 다짐한 것은 사실 꽤 최근의 일이다. 그 여행기를 브런치북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것은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그래서 이미 나의 브런치를 구독하는 분들이라면 아래의 글을 벌써 읽었을 수도 있다.


https://brunch.co.kr/@quotation2520/176


이미 저 글에서 등산이 내게 갖는 의미와, 계족산을 오르며 느꼈던 것들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한 것 같다. 저 글을 발행 취소 했다가, 여기 다시 올려서 브런치북의 첫 장을 대신할까 하는 얕은 마음을 먹었다가 그만두었다. 이미 글을 재밌게 읽고 마음까지 눌러주신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대신 오늘 글에서는, 저 글에서도 살짝 언급한 산행의 진짜 목적에 대해 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것은 산행뿐 아니라 나에게는 국내 여행에도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 되더라. 그래서 본격적으로 여행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 번쯤 짚고 넘어가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때 내 기억으로는, 나는 산을 제법 잘 올랐다. 잔나비까진 아니더라도 한 마리 다람쥐처럼, 쪼르르 앞서가 나머지 사람들을 기다리곤 했다. 어릴 적부터 운동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나였지만, 산을 오를 때만큼은 숨이 차고 땀이 줄줄 흘러도 마냥 즐거웠다. 그 시절보다 나이도, 몸무게도 두 배는 훌쩍 넘긴 지금, 과연 산이 여전히 내 반가운 친구로 남아 있을지. 꼭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동창 녀석들과 산악회를 하고 싶다는 은근한 꿈이 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공과는 별로 친하지 않은 터라 조기 축구회는 내 인생에 없을 개념이고, 그래도 나이 들수록 건강도 챙기면서 사람들과 어울릴 구실 하나쯤은 있어야 할 텐데. 산악회를 통해 격주에 한 번 정도는 친구들과 산에 오르며 운동도 하고 우정도 이어갈 수 있다면 꽤 낭만적이지 않겠는가. (물론 진짜 목적은 하산 후의 막걸리 한 잔, 그 뒤풀이에 있지만 말이다.)

글 <산행은 낭만이다. - 계족산> 중 발췌

그래, 산을 오르는 진짜 이유는 내려온 후의 막걸리 한 잔에 있다. 건강? 우정? 아니, 이다. 술을 먹기 위해 건강해야 하고, 술을 먹다 보면 우정도 쌓인다.



뒤풀이 하려고 OO하는 사람


학부 때 영화제작동아리를 한 적이 있다. KAIST 학생들이 똑똑하긴 하지만 다들 이공계 녀석들이고, 영상 제작이라고 해봐야 고등학교 때 UCC 몇 편 만들어본 게 전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영화를 사랑하고, 나아가 직접 만들어보겠다는 호기로운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KAIST의 영화제작동아리 은막이었다. 나는 대단한 시네필(cinephile)까진 아니었지만, 영화 자체보다도 "영화 제작"이라는 과정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져 동아리에 들어갔다. 제법 '대학생 때나 할 법한 낭만 넘치는 활동' 아닌가. 영화 한 편 만드는 데 들어가는 품이 어마어마한데, 그걸 오직 열정과 애정으로 해볼 수 있는 시기는 이때밖에 없거든요.


각본 쓰는 것에 관심이 있어 연출부에 지원했다가, 젊은 날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 배우부로도 활동했다. 퍽 재미있었는지, 열심히 한 탓에 어쩌다보니 동아리 회장도 1년 하게 됐고, 감독도 두 편이나 했다. (활동 기간 중에 총 세 편의 영화를 찍는다.) 솔직히 말하면 2016~2017년 무렵의 나에겐 은막이 삶의 거의 전부였다. 방학에도 매일 각본 쓰고, 로케이션 알아보러 다니고, 카메라 빌리고. 정말 열심히 영화를 찍었다.


그 결과물은... 사실 아쉬울 수밖에 없다. 말했듯이 UCC 몇 개 만들어본 녀석들이, 몇 푼 제작비로 어설프게 찍은 영화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런 주제에 심지어 우리는 대학 영화제작동아리들 중에서도 40분 이상의 '중장편' 영화를 만드는 몇 안 되는 동아리라는 쓸데없는 자부심이 있었다. (남들이 안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2주에 가까운 시간을 합숙하며 영화를 만들고, 상영회 날짜까지 밤새가며 편집을 해도 완성된 영화는 발연기와 조악한 촬영, 들쭉날쭉한 음향 같은 여러 문제들이 존재했다.


물론, 이제와 생각해보면 우리가 만든 작품이 대단히 부끄러운 수준의 무언가는 아니다. 조금 더 당당하게 말하면 꽤 좋은 작품도 하나 연출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상영회가 끝나면 늘 씁쓸했다. 애초에 관객이 다 합쳐도 한 40명 되나? 그중 대부분은 또 동아리 선배들이었고 말이다. '아, 그냥 우리들만의 축제였구나,' 하는 속상함이 있었다.


그 속상함을 달래주는 것이 바로, 상영회 뒤풀이였다. 은막은 당시 기준으로도 보기 드물어진 사발주 문화가 있었다. 1700cc 맥주 피쳐에 소주를 콸콸 붓고는, 일렬로 서서 부서별로, 기수별로, 직책별로 술을 마시며 돌렸다. 영화제작동아리 주제에, 필름이 끊어지도록 술을 먹었다. 나도 술 꽤나 먹는데, 상영회 세 번은 모두 뒤졌다. (살면서 술 먹고 토한 건 딱 세 번인데 그게 다 은막임.) 야만의 시대, 낭만의 시대. 그게, 솔직히 말하면 사무치게 좋았다. 고된 시간이 다 끝났다는 해방감. 그것이 어떤 성취감럼 다가오기도 했다. "뒤풀이 하려고 공연한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산행도 마찬가지다. 운동으로 땀을 한껏 흘린 뒤 마시는 맥주 한 잔, 등산 후에 적시는 막걸리 한 사발. 그 시원함을 알기 때문에 산을 오른다. 몸의 부족한 수분을 알코올로 채우면 더 빨리 달아오르고, 쉽게 취하고, 금세 행복해진다.



막걸리는 공간과 시간의 예술


내가 생각하는 막걸리의 요소는 크게 세 가지다. 단맛, 신맛, 그리고 탄산감. 일단 장수 막걸리나 국순당 막걸리 같은 유통기한 1년짜리 살균 막걸리는 논외로 하겠다. (걔네들은 그냥 아스파탐으로 맛을 잡은 녀석들이라...) 효모가 살아있는 생막걸리, 그들은 제품의 퀄리티만큼이나 마시는 시기도 중요하다. 대개 생막걸리는 처음에 단맛이 강하고 탄산감은 적다. 그러나 병입 후에도 계속 발효하면서 단맛은 점차 줄어들고, 젖산이나 초산 같은 것들이 발생하면서 신맛이 드러난다. 유산균 발효를 하는 김치처럼 톡 쏘는 신맛이 올라오는 것이다. 느린마을 막걸리의 뒷면을 보면 이 맛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그래프가 있다.

막걸리맛곡선.png 이런 맛잘알 그래프 보면 너무 반가워요.

나는 대략 병입 후 7~10일 사이, 아직은 단맛이 신맛보다 좀 더 강하게 느껴지면서 탄산감이 적당히 올라온 막걸리를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생막걸리의 유통기한과 병입 날짜 등을 확인해서 구매를 하는 편이다.) 참, 좋은 막걸리는 약간 참외향?이 난다. 그런 막걸리를 만나면 흥이 난다.


계족산 글에선 얘기는 안 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막걸리를 두어 병 샀다. 마침 돌아오는 길에 좋아하는 양조장이 있어서 말이지,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살며시 다녀왔다.


대전 별빛 막걸리

유성별빛.jpg 대전 뉴뱅(NEWVIN) 양조장의 대전 별빛 막걸리 (6000원)

대전 별빛 막걸리는 꿈돌이가 그려진 귀여운 막걸리다. 중리시장 근처에 위치한 뉴뱅 양조장에서 만드는 막걸리로, 직접 방문해야 구매할 수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요거트에 가까운 꾸덕한 질감과 높은 도수. 거의 입안에서 씹힐 정도로 걸쭉한데, 쌀 특유의 단맛과 참외향이 잘 올라온다. 개성이 확실한데, 내 취향에 맞아서 더욱 반가웠달까. 온더락(on the rocks)으로 위스키를 즐기듯 얼음과 함께 먹으면 농도도 적당히 맞고 도수도 내려가 더 쉽게 즐길 수 있다.


나는 이 막걸리를 대전국제와인페스티벌의 부스에서 처음 만났다. 시음을 해봤는데 너무 맛있어서 몇 병을 구매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양재에서 열린 우리술 대축제에서도 또 마주쳤는데, 다른 탁주들과 비교해도 부족함 없는 여전히 훌륭한 맛에 대전인으로서 자랑스러움까지 느꼈다. (다만, 사진에 나온 옥천 고구마 막걸리는 내 취향에는 살짝 불호였음.)


이번에는 막걸리를 구매해서 집으로 돌아와 씻고 먹었는데, 너무 더운 날씨 탓인지 오는 길에 좀 끓는(?) 소리가 나더니 진짜로 시어버렸다. 좀 속상했지만, 역시 막걸리는 타이밍이다, 보관의 중요성 같은 교훈을 느꼈달까.


우리나라 어느 지역을 가든 그 지역만의 막걸리가 하나쯤은 있다. 농협 하나로마트를 가면 싼 값에 구매 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국내 여행지를 찾으면 꼭 그 지역의 막걸리를 먹어보는 편이다. 최근에는 영양을 갔을 때 먹었던 은하수 막걸리가 정말 맛있었다. 홈그라운드 대전 원 막걸리도 진짜 걸출한 편이고. 이번에 꿈돌이랑 콜라보를 하던데, 아직 못 먹어봤지만 기대가 크다.


탁주 좋다. 쉽게 들어가면서 은근 도수도 있어서, 맥주보다 기분 좋게 취할 수 있다. 특히 막걸리는 어디서 구매하느냐, 언제 구매하느냐에 따라 맛의 편차가 큰 편이어서 재밌는 것 같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여행을 가서 그 지역의 술을 먹는 재미가 또 있더라고. 아마 이번 연재에서 술 얘기가 왕왕 등장할 것이다. 함께 재밌게 즐겨주면, 기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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