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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방학

박사님은 놀고 싶어 - 프롤로그

by 인용구

(들어가기 앞서 보면 좋은 글)



포닥(Post Doctor, 박사 후 연구원) 시작일이 9월 1일로 정해졌다. 디펜스 심사를 마치고 학위 논문을 제출한 뒤에도 연구실에 출근하고는 있지만, 지금은 '졸업생' 신분. 9월부터는 연구실에 정식으로 고용된 '직원'이 된다.


잠깐, 졸업했다더니 계속 대전에 있는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국방의 의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거든요. 전문연구요원 제도가 딱 내가 편입될 때부터 소위 "2+1 제도"로 바뀌게 되면서, 박사를 졸업한 후에도 국내 지정 기업이나 연구소에서 1년을 더 복무해야 한다.


그때부터는 유연근무제가 적용되지 않는, 전문연 9-to-6 인간이 될 예정이어서 사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연구 분야의 특성상 서버에 원격 접속만 하면 어디서든 연구가 가능했기 때문에, 교수님 눈치 보는 것만 아니면 오후 출근도, 재택 근무도 가능했던 대학원 생활이었다. 전문연으로 복무했던 2년 동안도 주 40시간만 채우면 되었기에 '규칙적인 아침 출근' 같은 건 고려조차 해본 적 없다. 더군다나 연구라는 게 저녁 6시 땡 하면 끝나는 일도 아니고, 인정도 안 될 초과근무에 속 썩을 미래가 너무도 분명하게 그려졌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그 전까지는 정말 처절하게 연구실에 있기가 싫었다. 전문연이나 포닥 따위로 묶여 있지 않은 선배들이 디펜스 끝나자마자 짐을 빼는 걸 보며 부러워했다. 나는 어차피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하는 입장이라 삶에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9월 정식 출근일까지는 하남시 본가에 머물거나 대충 자취방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맡은 과제 때문에 마냥 놀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또 9월에 학회 제출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연구를 손에서 놓고 있는 건 아니다.


억울하다 억울해. 나도 놀고 싶다고!


그리하여 내가 세운 최후의 보루는 이것이다. "주말에는 논다." 당연한 소리 같지만, 대학원생일 때는 주말 출근도 잦았다. 연구라는 게 낮밤도 없고, 주말도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좀 무책임해도 되잖아? 아니, 원래 출근 안 해도 되는 시기가 맞잖아?! 제대로 삐뚤어진 마음이 들어서, 이미 평일에도 온몸 비틀기를 하며 연구실에서 도망치는 중이다.


다행히 연구실 사람들, 적어도 가까운 동료와 랩장님은 나의 일탈을 어느 정도 이해해 주는 것 같다. (아닐 수도 있다.) 교수님도 요즘은 내가 자리에 없으면 "구 포닥, 요즘 빠졌네~" 라고 농담은 하신다는데, 정작 내가 출근하면 "어라, 출근했네?" 하신다. 뻔뻔하게 pre-post-doctor의 지위를 활용해, 그 어느 때보다 자유출퇴근 중이다. (그나저나 포닥 말인데, 'Post doctor' = '박사 後'이잖아요? Doctor who. 이름 너무 좋다.)


연구실에 없을 뿐이지, 집에서 게으름만 피우는 것은 아니다. 헬스장에 가서 운동도 하고, 문뜨 동방이나 카페에서 책도 읽고, 영화도 본다. 학교 도서관에 가서 연구를 하기도 한다. 그냥 연구실에만 없다 뿐이다. 제대로 반항 중임ㅋㅋ.


연구실 대신 내가 있고 싶은 공간에 있기로 했다. 미뤄왔던,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기로 했다.


이것도 한 철이다. 딱 9월 전까지만. 이번 7월, 8월만큼은. 아주 후회 없이 놀아보려고. 역마살 낀 사람처럼 쏘다닐라고. 주말에도 집에만 있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여행 일정을 많이 잡았다. 돌아보니 7월은 정말 주말마다 어딜 다녀왔더라. 그 여행 수기를 쓰는데, '이거 책 한 권은 나오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서 진짜 브런치북을 써보기로 했다. 어차피 9월 시작하기 전에 어떤 '꾸준함'에 대한 연습은 필요할 것 같아 아예 날짜를 정해 연재를 해보기로. 주 2회 씩 연재를 잡으면 8월 한 달 동안 얼추 올여름의 기록을 잘 완성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연재를 명분으로 8월에도 꾸준히 놀러다니고 말이다.




졸업. 이제 나의 '학생'으로서의 시간은 끝났다. 앞으로도 계속 연구는 하겠지만, 그것은 더이상 내게 공부가 아닌 업무다. 박사과정 대학원생과 박사 후 연구원 사이의 시간, 공부를 내려놓다. 말 그대로, 방학(放學)이다. 앞으로도 길게 쉬는 기간은 있겠지만, 그건 휴가 아니면 휴직(...) 이겠지. 이것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마지막 방학 숙제. 더위에 지치지 말 것. 이열치열, 치열하게 놀 것. 나의 대학원 생활을 잘 마무리 할 것. 박사님은 놀고 싶어. 같이 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