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기간을 마무리하며
제본을 맡겼던 학위논문을 받았다. 열다섯 권의 지루하고 현학적인 냄비받침대. 이제 학위 취득을 위해 내가 해야 할 것은 이들 중 몇 권을 학과 및 도서관에 제출하는 일뿐이다. 물론 공식적인 졸업 날짜는 8월 15일이지만, 디펜스도 끝났고 학위논문도 나왔으니 - 나는 이제 공식적으로 박사다.
프로포절 심사를 받은 건 지난해 12월 3일, 그러니까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한 날이고. 디펜스 심사를 했던 건 6월 4일, 이재명의 대통령 취임일이었다. 하필 학위논문 심사의 중요한 일정이 대한민국에게도 역사적인(?) 날들이어서, '나 졸업하냐?'에서 '나 졸업한다!' 사이의 기간이 여러 의미로 혼란스러웠다. 그런 탓에 글을 많이 쓰지 못했다-라고 변명을 하려고 했는데 브런치에 올린 글이 24개네;; 원래... 힘들 때 글이 더 많이 써집니다..
그래도 바쁘다는 핑계로 중요한 것을 놓치며 살지는 않았다. 해외 학회 출장이 있었던 시기를 빼면 매주 문학의 뜨락 정모도 나갔고, 음주도 규칙적으로 했다. 참, 자랑하지 못했는데 논문 하나가 더 생겼다. "저는 뭘 하고 있는 걸까요" 글에서 우울하게 제출 소식을 알렸던 롱테일 논문이 감사하게도 AAAI라는 학회에 붙었다. 역시 인생사 새옹지마. Representation learning 쪽 연구 트랙에서도 논문 하나를 건졌으니 참 다행이지... 기쁘다. 이래놓고 또 졸업 연구는 3D 쪽으로 했다. 끊임없는 포지션 변경... 아마 내가 동아리 좀 덜 하고 술 좀 덜 먹고 한 연구 주제에 집중했으면 난 그 분야의 대가가 되었을지도?! (*아님) 모쪼록 연구도 열심히 하고, 놀 건 또 다 놀면서 알차게 박사과정의 마지막 한 학기를 보냈다.
학위기간을 돌아보면 진짜 다사다난했고 많이 힘들었는데, 이 매거진 "대학원생이여, 비전을 가져라"에 그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앨범처럼 남아있다. 대학원을 진학할 때의 다짐과 각오, 첫 논문 합격의 순간, 기숙사를 떠나 자취를 시작하던 날, 취업과 진로에 대한 고민 등. 위에 언급한 것 말고도 뭐 정신과 상담을 받은 이야기를 비롯해 혼자 반성하고 위로하고 우울해하고 다시 힘냈던 그 흔적들이 전부 애틋하다. 그 과정을 더 많이 기록해 둘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연구에서 얻은 교훈들도 좀 글로 남겨보려고 매거진을 따로 하나 만들기도 했는데, 결국 글 두어 개밖에 못 씀 ㅋㅋㅋ 부끄러워라..
자평해보면 나는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유능한 연구자는 되지 못했다. 대학원 3년 차까지 논문이 없다가 졸업에 가까워져서야 국제 학회 논문 두 편을 겨우 냈고, 그것도 모두 공동 1 저자로 낸 논문이었다. 학위 논문 뒤에 들어갈 CV(Curriculum Vitae)를 적는데 publication 칸이 너무 짧아서 부끄러웠다. 하소연을 하자면 끝도 없지만, 변명 따위 해봤자 나만 초라해질 뿐. 나의 대학원 생활은 좌절과 실패의 역사였다. 오래 연구했던 주제에서 아무런 성과 없이 도망친 적도 있고, 안 되는 아이디어를 1년 넘게 붙잡고 있다가 시간만 낭비하기도 했다. 루저처럼 자책도 원망도 질리도록 했다. 건강도 많이 상했고, 취업한 친구들처럼 돈을 모으거나 20대 청춘을 폼나게 즐기지도 못했다.
그렇게 얻은 "박사"라는 타이틀이 끝끝내의 승리로 느껴지진 않는다. 디펜스가 끝나고도 일상이 달라진 게 없어서 체감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전문연구요원 이슈로 대전에 1년은 더 남아있어야 한다) 이제부터 Doctor Koo라는데, 척척박사가 된 기분은 아니고 아직은 그냥 박사인 척만 하는 것 같다. 카이스트 박사라는 명함에 부끄럽지 않게 앞으로도 열심히 고생해야겠구나 하는 막막한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학위 취득이 그동안의 개고생을 보상해주진 않는다는 말이다. 패배감을 느꼈던 모든 시간이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불어난 체중과 상한 피부가 뾰로롱 씻은 듯이 낫는 일도 없다. 그것이 억울하진 않다. 학위 자체보다는 피땀눈물로 얼룩진 내 학위기간의 상처와 흉터들이, 그 흔적이 내겐 더 훈장 같아서.
아마 인터넷에서 본 글귀 같은데, 힘들 때 보면 명랑해져서 저장해 놓은 게 있다.
다행. 실로 그런 것이, 글 쓰는 인용구의 정체성이 없었더라면 구인용의 대학원 생활은 몇 배는 힘들었을 것이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인생 참 가혹하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너무 많구나,' 생각이 들 때마다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와 또 개꿀잼 썰 생김ㅋㅋ. 억까당했지만 이겨낸 썰 푼다.txt' 같은 걸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쓸만한(remark-able) 교훈을 찾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증명해야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종이 위에다 한풀이하듯 엄살과 자조를 섞어 풀어내면, 그것을 이겨낼 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깨달음, 정신 승리와 자기 합리화로 살아남으면서 획득한 경험치가 지금의 나 - 대단한 건 못 되지만 그냥 지금의, 용케 아직 살아있는, 나 - 를 있게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까, 만약 연구도 술술 풀리고 논문도 쓰는 족족 붙으며 갓생을 살아냈다면 분명 좋았겠지만. 좋은 실적을 얻는 대신 삶에 중요한 배움들은 오히려 많이 못 얻었을 것 같다. 절대 열심히, "잘" 해낸 친구들의 노력과 성취를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다. 다만 남은 인생도 언제까지나 승승장구할 수 있다면 베스트겠지만,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인생 뜻대로 안 된다 싶은 순간이 온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나도 대학원 오기 전까지는 남들보다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은 성취를 이뤄낼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감사한 일이지만, 그러면서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오만함도 함께 자랐음을 부정할 수 없다. 대학원에 와서야 내 안의 무언가가 꺾였다. 슬픈 일이지만, 그게 젊은 지금이어서 차라리 다행이다,라고 느꼈다는 말이다.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야 좋은 이야기가 되는 것처럼, 실패의 경험, 좌절의 기분은 오히려 좋은 글감이 되었다. 힘들어하는 후배들에게 해줄 말이 생겼다. 성공한 선배는 되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어려움을 이겨냈던 사람으로서 건넬 말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동생들에게 반면교사로만 남고 싶지는 않고, 모범도 보여야지. 이제 나에게 남은 일은 박사 졸업 이후를 멋지게 행복하게 살아내는 일이다. "잘하지 못했다고 해서 잘못한 게 아니다,"라는 말을 증명하는 삶으로.
(그리고, 사실 나 정도면 잘한 것도 맞다. 학부, 대학원 석박사를 9년 반 만에 졸업. 만 27세 카이스트 박사. 이 정도면 사기캐 아님? *진짜 아님)
학위논문 마지막에는 결론 및 제언, Concluding remarks 섹션이 있다. 선배들의 논문을 보니 그냥 연구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 끝내도 되는 것 같던데, 왠지 어차피 아무도 안 읽을 논문 내 맘대로 의미부여를 좀 해보고 싶어서, 아래처럼 썼다.
~ 그전에 살짝 내 학위논문 연구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ㅎㅎ. 나는 자율주행 등에서 사용하는 LiDAR 포인트 클라우드 입력으로부터 사물의 정체와 위치를 파악하는 '3D 객체 탐지(3D object detection)'이라는 주제를 연구했다. 내가 제안한 기법은 첫째로 LiDAR 센서의 측정 방식의 한계로 우리가 볼 수 없는, 가려진(occluded) 영역의 포인트 클라우드를 예측 생성하는 것을 통해 성능을 높이겠다는 내용이었고 (PG-RCNN), 둘째는 우리가 볼 수 있는 포인트 클라우드도 일부를 지웠다가 다시 그 부분을 복원해내는 훈련을 통해 모델이 정답 레이블 없이도 지식을 학습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MUTE라는 연구인데요, 저널화 coming soon). 이를 포인트 재구성(point reconstruction)이라는 공통된 방법론적 제재로 묶어 정리한 내 학위 논문의 제목이 "Supervised and Self-Supervised Learning Methods for 3D Object Detection Based on Point Reconstruction(3차원 객체 탐지를 위한 포인트 재구성 기반의 지도 및 자기지도 학습 기법)"인 것이다.
그런 맥락으로. 아무도 읽지 않을 내 논문의 결론부, 그 마무리 두 문단을 여러분들이 읽어주었으면 한다.
The findings presented in this dissertation collectively underscore the value of point reconstruction as a powerful tool in both supervised and self-supervised paradigms for advancing 3D perception.
본 논문에서 제시한 연구 결과들은, 포인트 재구성이 지도학습과 자기지도 학습 모두에서 3차원 인식을 향상시키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By explicitly reasoning about masked or occluded regions, the proposed methods enhance the detector’s ability to understand and localize objects under challenging real-world conditions.
지워지거나 가려진 영역을 추론하는 것을 통해, 제안한 방법들은 어려운 현실 상황 속에서도 객체를 더 잘 이해하고 정확하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More broadly, these methods embody the idea that learning should not be limited to what is directly observed.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이 방법들은 배움이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아이디어를 담고 있습니다.
By attempting to reconstruct what is not plainly given, we force the model to form a deeper, more holistic understanding of the 3D world.
직접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들을 재구성하려 시도하며, 우리의 모델은 3차원 세계에 대해 더 깊고 전체적인 이해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This principle extends beyond perception systems.
이런 원칙은 인식 체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At its core, 3D object detection is not only about identifying what is present, but also understanding where it is and how it relates to the observer.
본질적으로 3차원 객체 탐지 문제는 단순히 무엇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어디에 있고, 관찰자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이해하는 문제입니다.
It is a task grounded in both recognition and spatial awareness.
다시 말해 그것은 인식과 공간 의식 모두에 기반을 둔 문제입니다.
In life, what we see is often incomplete; however, what is unseen does not imply non-existence.
실제 삶에서도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By imagining what lies beyond the surface, we begin to understand people and situations not just as they appear, but as they might be—partially seen, partially inferred, yet more fully understood.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사물이나 사람, 상황을 단순히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아울러 더 온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Point reconstruction, then, is more than a technical device; it is a reminder that meaningful understanding often comes not just from what is given, but from the willingness to reason about what is invisible.
포인트 재구성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기술적 방법을 넘어서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바로 의미 있는 이해란 단순히 주어지는 것들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기꺼이 추론하고 상상하려는 자세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This dissertation concludes with the belief that true perception, whether of objects, environments, or life itself, requires both the ability to see clearly and the courage to imagine what lies beyond sight.
진정한 통찰(洞察)이란 - 그것이 사물이나 세상, 또는 삶 그 자체, 무엇에 대한 것이든 - 그것을 명확히 바라보는 능력과 그 너머를 상상하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믿음과 함께, 이 논문을 마칩니다.
뭐 좀 억지 같지만 내 대학원 생활도 메타적으로 비슷한 해석을 적용할 수 있다. 내가 바라던 것, 기대했던 것들이 모두 내 손에 쥐어지지는 않았다. 원망도 많이 했지만 스스로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했다. 남들에게는 있지만 내게는 없는 부분들을 깨닫기도 했고, 드러내고 싶었던 강점보다 감추고 싶었던 약점들이 더 많이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에겐 공부 아닌 것이 없다. 음각처럼 드러난 결핍도 나에 대해 새로운 것을 알게 했다. 나도 몰랐던 면모, 나의 구멍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자 좀 더 많은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와 주위 환경을, 세상을 좀 더 분명하게, 그러면서도 더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피카소의 그림처럼 세상을 바라보지는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일면(一面) 뒤에는 언제나 우리가 모르는 이면(裏面)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관찰력이 좋다 해도, 피상적으로 비쳐지는 모습만으로는 결코 대상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미지의 존재, 그것은 물리적 세계에 놓인 관측자인 우리에게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습, 그 너머의 이야기와 속사정, 어떤 배경(背景)을 가늠해 보려는 노력이, 어떤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통찰력(洞察力), 꿰뚫어 보는 힘은 그런 것 아닐까.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헤아리고 때로는 용서할 줄 아는, 그런 다정함의 모습도 있지 않을까.
호모 비덴투스라는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나는 잘 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컴퓨터 비전, 즉 컴퓨터의 세계관(觀)을 공부하며 박사과정을 잘 마쳐서 '본다'라는 행위를 수년간 고민한 사람의 시야를 얻고 싶었다. 나의 하찮은 학위논문, 그래도 그 끝에 '관점'에 대한 관점 하나는 제시한 것 같아서. 그것의 실증 사례를 몇 개 더한 것 같아서. 내 이름 석 자 박힌 이 책을 나는 자랑으로, 또 사랑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첩첩한 어둠 속을 헤매면서, 가끔 나는 등정의 의미를 생각한다.
언젠가 멈추게 되는 위치에서 보게 될 풍경이 사실 이제는 가늠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길을 후회하지도 않는다. 올라온 만큼 깊은 곳의 나를 발견하였으므로,
그것만으로도 좋은 구경 아닐까 하여.
- 야경 중
정상일리 만무하지만, 하나의 봉우리. 고생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