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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전주 여행, 한옥마을의 낮과 밤

7월 둘째 주 - (2) 전주 한옥마을

by 인용구

칵테일 바에서 나와서, 잠시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을 가졌다. (그 정도로 씁쓸했냐고...) 좋은 경험이었다, 라고 되뇌며 속상함을 달래 보지만, 문득 동행인 하나가 간절했다. 이 일을 함께 경험하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 하나가 있었다면 훨씬 마음이 편했을 텐데. 같이 욕이라도 시원하게 한 번 내뱉고 나면, 다시 가벼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외로움을 모처럼 느꼈다. 그럴 때는 카카오톡을 열어 '나와의 대화' 창을 연다. 그날도 짧은 메모를 남겼다.


무던한 사람이 좋다.
무딘 사람은 아니지만, 남을 대할 때 수더분하고 너그러울 줄 아는 사람.


청년몰에서 내려오니 야시장 점포도 모두 문이 닫혀있었다. 어느덧 자정에 가까운 시간, 술기운에 더해진 센티함에 숙소로 곧장 돌아가긴 싫었다. 그래서 숙소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두운 한옥마을을 향해서.

풍남문과 전동성당, 한옥마을 초입에서

밤의 한옥마을, 게슈탈트의 재구성


좀 자화자찬 같지만, 나는 공간과 기억을 결합시키는 능력이 꽤 탁월한 편이다. 컴퓨터 비전에도 로봇이나 자율주행차가 주변 정보를 수집하여 지도를 만드는 'SLAM (Simultaneous Localization and Mapping)'이라는 기술이 있는데, 나한테도 그것이 탑재되어 있다고나 할까. 한 번 걸어본 곳은 몇 년 후에도 지도를 펼치지 않고 원하는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스팟들을 보면,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 떠올렸던 생각이나 감정도 바로 불러오기가 된다. 공간에 사연을 부여하며 '기억의 궁전'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전주 터미널에서 내리면, 길 건너에 멋들어진 느티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한옥마을로 가려면 그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풍남문 앞에서 내리면 됩니다. 풍남문은 아주 작은 흥인지문 같다고 친구와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는데요, 주위로 로터리형 교차로가 있어서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천막 하나가 보입니다. 몇 해가 지났음에도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천막은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서글픈 마음으로 천막에 그려진 얼굴들을 보고 있으면, 신호등이 바뀝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오른쪽에 전동성당이 있고, 왼쪽에는 한복 대여점과 비빔밥 가게가 나란히 붙어있습니다. 여기서 비빔밥을 먹는 것이야 말로 '하수'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외국인이나 뜨내기 여행자들을 위한 관광지 식당처럼 보이는 곳입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왼쪽에 경기전이 보이고, 그 사이 골목으로 들어가 쭉 직진하면 전주 첫 방문 때 친구와 묵었던 찜질방이 있습니다. 그때 친구와 모주를 몰래 들고 들어가 나눠 마시며 "이게 술이야?" 했던 기억도 나네요.

이번엔 오른쪽을 보겠습니다. 경기전이 끝나는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베테랑 칼국수"가 나옵니다. 면이 좀 기계식이라고 할까요, 일반적인 칼국수 면과 다르게 균일한 원통형 면발이 약간 특이하다고 느꼈습니다. 계란과 깨가 잔뜩 들어간 국물이 인상적인, 적당한 맛집입니다. 친구들과 올 때마다 들렀던 곳이네요. 그 맞은편에는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아무튼 여중이었나 여고였나, 저는 갈 수 없는 학교가 있었습니다.

베테랑 칼국수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특이하게 바게트 빵 안에 피자 소 같은 걸 넣는 음식이 있었습니다. 그게 한옥마을 길거리 음식 중에서는 제일 먹을만했습니다. 이름이 "길거리아"였나 아마 그럴 거예요, 롯데리아 이런 느낌으로. 재치 있는 상호여서 기억이 납니다. 바로 옆에 임실 치즈를 꼬치에 꽂아 구워주는 노점이 있었는데, 가격이 꽤 비쌌습니다.

길거리 먹거리 하니까 또 "오짱"이 생각나네요. 큰길에서 왼쪽에 가판대가 있는데요. 오징어를 통으로 구워 꼬치로 파는데, 그 역시도 길거리 음식 치고는 너무 비싼 가격이어서 아직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오짱 맞은편엔 또 꽤 유명한 만두집이 있을 텐데, 그 삼각형 모양의 새우만두 있죠? 그걸 저는 이곳에서 처음 맛보았습니다. 재료가 재료인 만큼 맛은 있었는데, 역시 비쌉니다. (안 비싼 게 없네?!)


(뭔가 기억력 자랑 같아서 존댓말로 써봤습니다. 헤헤.) 설빙, 육전집, "한국집"이라는 비빔밥 식당, 풍년제과, 전통주 박물관 등 줄줄이 위치와 그 사연을 읊을 수 있지만. 쓰다 보니 그냥 한옥마을 먹거리 지도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이쯤 할래


그러니까, 이제 내게 전주 한옥마을은 눈을 감고도 대충 풍경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나와바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번에 찾은 한옥마을도 여전했다. 복습. 기억하는 위치에 여전히 그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보는 감정은 조금 낯선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동안 이곳을 늘 낮에만 와봤기 때문이다. 언제나 사람들이 빽뺵하고, 활기가 넘치는 곳. 또 나도 늘 누군가와 함께였다.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고, 익숙한 장소를 다시 찾으며 여러 추억을 쌓던 곳이었다. 그런데 밤늦게 혼자 찾은 한옥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거리, 활기를 거둔 공간. 활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밤 동안만 잠시 접어둔 듯한 느낌. 그것이 노래 "연극이 끝난 후" (by 샤프) 같은 묘한 서정성을 자아내고 있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이세계로 가기 전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묘한 두려움마저 들었다.


와중에 요즘 유행하는 "네컷인생" 같은 사진촬영 부스나, 이미 한 철 간 탕후루 가판대. 한 번도 유행한 적 없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타로 운세, 연애점 같은 가게들이 눈치 없이 조명을 밝히고 있었다. 그것이 '한옥 마을'과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전주 한옥마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전통과 근본을 위시한 공간이지만, 막상 그 안을 채운 것은 너무나도 상업적인- 휘발성의 한 철 장사 매장들이라는, 그 "짜침". 그것이 질색이 나올 정도로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눈물이 살짝 날 정도로 반가운 것이었다. 키치(kitsch)의 미학. 맞아, 한옥마을은 원래 이랬지.

정적만이 남아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그러자 새삼, 내가 이곳에 어떤 애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고향도 아니고, 막 추천하는 여행지도 아니지만.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 번도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와 동행해서 이곳을 다시 골목골목 탐험해보고 싶다. 이 지긋지긋한 민속-현대촌에서 또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추억을 만들 수 있겠구나. 그래서 언젠가는 다시, 이 길을 걷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래도 자식이 생기면 한 번은 오지 않을까, 싶은. 그때도 베테랑 칼국수니, 길거리아 피자 바게트 같은 것들이 여전히 있을까, 하며.


재밌다. 기시감과 이질감이 공존하는 느낌. 익숙함에서 발견하는 낯선 감정. 약간 게슈탈트 붕괴(한 단어를 너무 집중해서 생각하다 보면 그 정의나 개념이 낯설게 다가오는 현상)처럼, 전주 한옥마을이라는 공간이 내 머릿속에서 해체되었다가 다시 구성되고 있었다. 조금 더 애틋하게.


묘한 호젓함을 느끼며 숙소로 돌아가다가 남천교(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하며 친구와 또 낄낄댔던 다리입니다.)의 기다란 정자(청연루라고 합니다. <- 이건 방금 찾아봤습니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노상 술판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았다. 한쪽에서는 야밤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이 배경음악을 깔아주고 있었다. 퍽 운치 있었다. 나도 정자에 올라가 사람들의 소근거리는 말소리, 웃음소리를 들으며 잠시 누워있었다. 덥지도 않고, 이대로 잠들어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청연루와 달

콩나물국밥의 심오한 세계



물론 숙소에서 잤다. 이미 낼 돈 냈는데 노숙을 왜 해? 편의점에서 로컬 막걸리와 모주를 한 병씩 사서 시원하게 들이켜고 잠들었다. (모주는 근데 진짜 도대체 뭐쥬?? 이런 걸 왜 먹쥬?) 다음날 아침을 맛있게 먹기 위해 조금 더 취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 전주에 왔으면 콩나물 해장국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죠. 주변에 전주 출신 친구가 있는데, "전주 하면 비빔밥 아니냐?" 하고 물어보면 (물론 놀리려고 한 것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전주는 콩나물국밥이다," 라고 말을 해주더라. 그 말을 믿고 나도 마지막 전주 방문에서 처음으로 콩나물국밥을 먹어보았는데, "와 이렇게 맛있는 거 너희들만 먹고 있었냐?!" 소리가 절로 나왔다.


충분히 예상했겠지만, 나는 국밥충이다. 국밥에 충성한다는 말이다. 국밥은 國밥이니까. 한국인이 국밥을 좋아하는 것에는 사실 이유를 들 필요도 없다. 다들 펄펄 끓는 애국심 한 뚝배기 정도는 가슴에 품고 살잖아요? 그러나 고백하면, 콩나물국밥은 내 국밥의 세계에서 단칸방 하나조차 점유하지 못하는 장르였다. 뼈해장국, 돼지국밥, 순대국밥, 소국밥, 설렁탕... 너무 맛있는 국밥이 많잖아요. 가끔 본가에 가서 술 마시고 자는 날이면 아침에 어머니가 황태가 들어간 콩나물국을 끓여주시곤 했다. 솔직히 말하면, 한심한 아들을 위해 아침을 준비해 주신 그 마음 때문에 먹었지, 찾아먹을 음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단 단백질이 들어가지 않는 음식을 돈 내고 먹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콩나물의 숙취해소 효능은 인정합니다. 콩나물 들어가면 국물이 얼마나 시원합니까. 아스파라긴산 최고! 그렇지만 콩나물이 주인공이 된다고 하면 이제 정색하게 되는 나였다. 선 넘지 마십시오.


그런 내 생각을 바꿔준 것이 "전주 현대옥"의 콩나물국밥이었다. 현대옥이야 이제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지만, 그것을 본토에서 먹는 것의 의미는 남달랐다. 더욱이, 현대옥의 펄펄 끓지 않는, 토렴하는 방식의 콩나물국밥을 "남부시장식"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제대로 먹기 위해 현대옥 남부시장 지점을 방문했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처음 접하는 음식은 가장 유명한 곳에서 먹는다. 현대옥이 최고의 콩나물국밥 맛집이란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전주 콩나물국밥'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아, 콩나물국밥은 원래 수란과 김이 같이 나오는구나. 오징어가 들어가는구나. 국물을 몇 숟갈 푹푹 떠서 수란 위에 얹고, 김을 찢어 넣은 뒤 후루룩 먹는 수란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그냥 계란 한 알 같이 먹었다 하면 아무 감회가 없었을 텐데, 이 '먹는 방식'이 뭐랄까... 진짜 별미 같은 느낌을 준다. 약간 라임이랑 소금이랑 곁들여 마시는 테킬라처럼. 하나의 문화를 배우는 기분이어서 인상 깊었다. 국물은 역시나 시원했고, 오징어와 콩나물이 서로의 냄새를 잡아주는 것이 절묘했다. 먹는 내내 아저씨처럼 '크어~, 좋다' 같은 감탄사를 남발하는데, 실시간으로 숙취가 떠나가는 게 느껴졌다. 건강한 맛. 다시는 콩나물국밥을 무시하지 않으리라.


이번에는 콩나물국밥의 세계를 좀 더 확장하기 위해, 현대옥이 아닌 '로컬 맛집'을 찾아야지- 라는 마음으로, 전날 술을 먹으며 열심히 검색을 돌렸다. 그렇게 결정한 오늘 아침의 식사장소, 바로 "전주왱이 콩나물국밥", 짧게 "왱이집"이다. 전주 콩나물국밥의 3대장을 뽑으라 하면 현대옥과 왱이집, 그리고 삼백집이 있다고 한다. 삼백집은 계란이 국밥 안에 들어가고 펄펄 끓으면서 나오는 스타일이라 하여, 지난번에 먹었던 현대옥과는 장르가 조금 다른 국밥처럼 느껴져서 다음 기회를 기약했다.

왱왱 벌떼처럼 사람이 모이라고 "왱이집"이란다.

왱이집은 한옥마을에서도 아주 가까이에 위치해 있다. 커다란 건물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고, 앞에 놓인 대기용 의자에서 이미 맛집의 분위기가 풍겨나왔다. 나는 뚜벅이 여행자라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건물 뒤로 엄청나게 넓은 주차장이 있는 것도 인상 깊었다. 한옥마을 주변이라 땅값도 만만치 않을 텐데? 하는 생각.


다행히 웨이팅은 따로 하지 않고 바로 입장했다. 메뉴는 오직 콩나물국밥. 김과 오징어 사리 등을 추가할 수 있었지만, 일단 단일메뉴라는 것에서 또 믿음이 갔다.

왱이집 콩나물국밥과 모주

국밥은 맛있었다. 콩나물이 진짜 많았는데, 인상 깊을 정도로 그 모두가 '살아'있었다. 모든 채소가 그렇지만 삶으면 숨이 죽기 마련인데, 여기 콩나물은 한 번 데친 수준인가 싶을 정도로 아삭아삭했다. 씹으면 달콤한 채즙이 나오는데, 이건 현대옥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요소였다. 그렇다고 국물에 콩나물 향이 배어있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콩나물의 맛을 잘 우려냈으면서도 식감과 고유한 맛까지 살린 게 진짜 대단했다. 혹시 국물용 콩나물이 있고, 국밥을 내놓을 때에 밥과 같이 토렴하는 生 콩나물이 따로 있는 걸까? 그것 말고는 설명이 떠오르지 않는 맛이었다.


다만 밑반찬은 살짝 아쉬웠다. 양파김치가 특이하긴 했는데 그냥 달기만 해서 국밥과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는 느낌. 현대옥의 장아찌나 오징어젓이 그 부분에선 더 좋았던 것 같다. 헉, 수란 얘기를 안 했네. 수란은 뭐 별미죠. 뭔가 500원 추가해서 하나 더 먹을 수 있다 하면 엄청 고민할 거 같긴 한데, 욕심내지 말고 국밥 하나에 딱 한 알 먹어줘야 별미로서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모주도 기어이 재도전했다. 잔술로 팔길래 2천 원에 맛보았는데, 진짜 이건 모르겠음. 내가 싫어하는 술도 있구나,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매번 도전하지만 여전히 맛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알아보니 도수도 1도밖에 안 된다 하고. 그냥 수정과라 생각하고 들이키면 엄청 나쁘지는 않은데.. (그럼 그냥 수정과를 먹지.) 그래도 다음에 또 콩나물국밥을 먹게 되면 아마 다시 도전해보지 않을까? 먹다 보면 알게 되는 맛이 있거든. 전주 초코파이가 그랬듯이 말이다.



세상에 나쁜 초코파이는 없다.



PNB, "풍년제과"의 초코파이는 전주 여행의 또 다른 별미이다. 경주 황남빵, 통영 꿀빵 같이 관광지라면 지역을 대표하는 빵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인데, 그들 중에서도 전주의 초코파이는 방문할 때마다 한 번씩은 사 먹게 되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오리온 초코파이를 情말로 좋아한다. 옛날부터 몽쉘, 오예스 이런 것 다 제치고 초코파이를 제일 좋아했다. 다른 케잌류는 엄청 부드럽고 달다는 느낌인데, 초코파이는 약간 투박한 게 좋았다. 근본 있잖아. 입안 가득 욱여넣고 목 막힐 때의 우유 한 모금. 얼려 먹어도 맛있고,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려 먹어도 맛있고. 질리지가 않아서, 전에는 12개입 한 박스를 앉은자리에서 먹기도 했다. 오랫동안 사랑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사실, '전주 초코파이'라는 것을 처음 마주했을 때 기대가 컸단 말이죠.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기성품보다야 훨씬 맛있겠지? 그러나 풍년제과의 초코파이는 오리온 초코파이와는 아예 다른 음식이었다. 일단 훨씬 더 투박하다. 과자처럼 부스러지는 파이 재질에 땅콩 같은 견과류까지 씹히니 식감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딸기잼이 들어있는 게,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다. 예? 초코파이는 마시멜로 아니었나요? 약간, 할머니가 손주들을 위해 난생 처음 만든 피자처럼, 초코파이를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사람이 '쪼코렛 묻힌 과자가 초코파이 아잉교?'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까닭에 처음에는 많이 실망했다. '이건 초코파이가 아니야!' 하며, 동행한 친구에게 무릇 초코파이가 갖춰야 할 덕목들에 대해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또 어느 날 누가 선물해 줘서 먹었더니, 이번엔 또 맛있는 거다. 그때 깨달았다. 음식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초코파이가 있다. 머릿속에 정답을 정해두고 비교를 하다 보면, 그 차이가 '감점'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 딸기잼을 넣어먹는 군대리아 햄버거에서 맥도날드 햄버거의 맛을 기대하면 안 되는 것처럼, 이탈리아 화덕 피자에서 파파존스의 맛을 기대하진 않는 것처럼. 그 '다름'을 존중하고 선입견 없이 대하면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더라.


아마 모주도 그럴 것이다. 술이라는 생각을 버려. 먹기도 전에 눈썹부터 찌푸리지 말고 그냥 먹어. 그럼 '나쁘지 않네, 맛이 꽤 괜찮네,'라고 생각하는 날도 오지 않겠지. (모주에 미련이 엄청 많은가 봄)



동문길에서 보물찾기



풍년제과 본점은 왱이집에서 한 블록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식당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동문길을 따라 조금 걷다가 우회전하면 바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아침식사를 마친 후 디저트 겸 식후 커피를 마시기 위해 바로 풍년제과를 향하다가, 거리에서 재밌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길 한쪽에 서점이 늘어서 있었다. 가장 간판이 큰 "홍지서림", 그냥 큰 동네 문고인가 보다 했는데 무려 소설가 양귀자의 지문이 묻은 곳이라니. 지난 학기 소설모임에서 양귀자의 <모순>이란 책을 너무 재밌게 읽어서 반갑고 신기했다.


들어가서 둘러보았는데, 그냥 적당한 크기의 문고. 사실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은 그 양 옆의 헌책방이었다. 일단 표지판에도 소개된 "한가네 서점"은 그 내부를 빼곡하게 채운 책들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와, 약간 분서갱유 직전에 지식인들이 만든 비밀 창고처럼, 정말 많은 책이 있어서 발 디딜 틈도 없게 느껴졌다. 다만 그런 이유로 책들이 수평으로 뉘어져있어서, 원하는 책을 찾는다던가 구경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긴 했다.


내가 좀 더 오랜 시간을 머문 곳은 살짝 구석진 자리에 있는 "일신 서점"이었다. 여기는 그래도 책장에 책을 꽂아놓아서 둘러보긴 더 좋았다. 그런데 딱히 장서 정리를 하시지는 않는 느낌. 대충 서가를 보면 '테마'는 느낄 수 있었지만 '이 책이 왜 여기 꽂혀있지' 하는 생각이 드는 들쭉날쭉함도 있었다. 그것이 또 매력으로 느껴졌다. 약간 유튜브 알고리즘에 뜬금없는 추천 영상이 뜨는 것처럼, 의외의 발견을 할 수 있는 것이 재미있었다.


조금 더 찾아보니 바로 근처에 "최명희 문학관"도 있다고 하고. (직접 가보았으나 내부 정비 중으로 둘러볼 수는 없었다.) 뭐랄까, 문학의 뜨락에서도 문학 기행이라는 명분으로 한옥마을로 워크샵을 와도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자꾸 여행지를 찾을 때마다 어떤 문학의 요소를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또, 문뜨 동인들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게 사랑 같아서, 내심 나쁘지 않다.


헌책방에서 시집 한 권은 사고 싶어서, 일신 서점을 둘러보다가 지난주 계족산 산행에서 읽었던 김애란의 소설 <두근두근 내인생>에도 소개되었던, 서정운의 시집 <홀로서기>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1권 2권을 모두 사는데, 각각 천원씩(!!) 받았다. 가격에 깜짝 놀란 나는 조금 더 책 발굴에 시간을 들이기로 했다. 이번 방학 소설 모임에서 읽기로 한 테드 창의 <숨>은 없었지만, 그의 데뷔작 "바빌론의 탑"이 수록된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구할 수 있었다. 책 상태가 꽤 괜찮았는데, 앞에 전주한일고등학교 도서관 바코드가 붙어있더라 ㅋㅋ.


또 엄청난 수확을 할 수 있었는데, 바로 예반의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라는 책을 여러 권(!!) 구할 수 있었다. 옛날 "나는, 당신에게" 라는 글에서도 소개했던, 내가 전문을 필사할 정도로 정말 좋아하는 책이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 무언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그 누군가에게 그 무엇이 되고 싶을 따름입니다.


객관적으로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은 아닌데, 그 가치관과 건강한 생각이 너무 나의 철학과 비슷해서 하나의 잠언처럼 품고 사는 책이었다. 지금은 절판되어 중고서점에서밖에 찾을 수가 없는데. 여기서만 몇 권이 보이길래 전부(...) 사버렸다. 한 권은 동방에 두고, 한 권은 또 아끼는 후배에게 선물하고. 이런 선물의 목적으로 여러 권 구매했다. 그런데 또 놀라운 발견,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가 2, 3권도 있더라!! 이건 한 권씩밖에 없어서 개인 소장하기로 함.. ㅎㅎ


하염없이 책방을 뒤지며 오후를 보내다가 나오니 책을 무려 열두 권이나 사버렸다. 그런데도 2만 원밖에 나오지 않아서 매우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무거운 책을 가방에 넣고, 전주버스터미널로 걷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지 않은 이유는 가는 길에 또 들러보고 싶었던 스팟들이 많아서. SLAM 지도를 한옥마을 외부로 확장해보기로 했다. 터미널 방향으로 올라가며 "전주가맥거리",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거리", 또 "신중앙시장"을 구경했다. 가맥거리는 낮이라 그런지 별로 볼 게 없었는데, 영화의 거리랑 시장은 그래도 좀 활기가 느껴져서 즐겁게 구경했다. (돌아다니는 분들의 연령대가 다른 것도 재미있었음.) 데프콘이 맛집이라고 소개한 "진미집"에서 저녁을 간단히 2인분 먹었다. 김밥에 연탄불고기를 싸먹는 음식이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오징어볶음을 추가했거든요. 근데 그냥 불고기 드세요. (자세히 소개할 정도의 맛집은 아닌 듯.)


그렇게 내 2주차 여행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올때마다 새로운 경험과 느낌을 주는 곳, 전주. 다음에 다시 올 때까지 안녕!!


... 알찼던 전주 여행. 두 편으로 나누면 될 줄 알았더니, 분량 조절 완전 실패 같지만. 그만큼 재미있었다는 뜻이었겠죠? 오늘도 긴 글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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