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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 얻고 걸어

7월 셋째 주 - (2) 강원도 평창, 오대산 선재길

by 인용구

이모 내외와 함께한 5인 여행은 끝이 났지만, 롤(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도 5인큐를 마치면 칼바람 한 판은 꼭 하듯, 높바람 부는 대관령의 숙소에 남겨진 우리 가족은 이틀 더 머물며 평창의 여름을 마저 즐기기로 했다. 사실 평창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겨울이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벌써 7년 전..)도 있었고, 보통 강원도는 겨울에 스키 타러 많이 가니까요. 여름에 간다 하면 속초나 동해, 강릉 이런 바닷가 쪽이 더 익숙하다. 그렇다면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모기한테 헌혈하는 것 말고 어떤 컨텐츠를 찾을 수 있을지.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발견한 여름의 평창은 제법, 매력이 있었다. 막 최고는 아니어도, 즐거움을 찾을 요소가 충분했달까. 강원도 여행의 후반전, 그 이틀의 이야기를 공개합니다.



선재 얻고 걸어



강원도 여행 3일 차. 전날의 곰배령 하이킹으로는 부족했던 우리 가족은 이번에는 "오대산 선재길"을 걷기로 했다. 숲 해설 자격증이 있는 우리 어머니는 이런 숲길을 잘도 알고 이렇게 소개해주신다. (곰배령도, 선재길도 이미 다녀오신 경험자다.)


우리나라 5대 명산에는 들지 않지만, 이름만큼은 멋있는 오대산. 선재길은 오대산의 절 "월정사"와 "상원사"를 잇는 길로, 예전엔 스님들이 수행길로 자주 걸었다고 한다. 이름은 불교경전 <화엄경> 속 선재동자에서 따왔다는데, 최근 방영했던 드라마 시리즈 <선재 업고 튀어>에서 동명이인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보진 않아서 내용은 비슷한지 모른다.) 또, 불교에서 '선재(善哉)'는 칭찬의 감탄사로, "훌륭하다", "좋다" 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도대체 얼마나 훌륭하고 좋은 길이길래, 한 번 기대를 품어보기로 했다.


평창 시내에서 김밥을 세 줄 사 들고, 월정사 근처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코스는 대략 4시간. 완만한 경사를 따라 상원사까지 오른 뒤, 버스를 타고 월정사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버스의 배차가 거의 한 시간 간격이긴 한데, 왕복 8시간 코스를 걷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서 시간을 잘 맞춰 걷기로 했다.


선재길의 시작점인 "일주문"을 지나는 순간부터, 내 기대감이 충족되기 시작했다. '천년의 숲길'이라고 불리는 전나무 길이 시원하게 이어지고, 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다니는 모습도 뭔가 경건한 마음을 더했다. 그리고 엄청나게 겁이 없는 다람쥐를 마주쳤는데, 진짜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귀여운 먹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후 상원사 앞에서도 다람쥐 두 마리를 더 만났는데, 카스테라 조금 떼어 던져주니 맛있게 받아먹는 모습이 심각하게 귀여웠다. 다 먹고 나서도 계속 주위를 맴도는데, 이러다 손에 올라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음.)

다람쥐를 봐주세요. 귀여운 다람쥐.


길 자체도 전날의 곰배령 숲길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곰배령은 관리가 잘 되어있긴 했지만 그냥 평범한 대한민국의 산행로 같았다면, 이곳은 시원하게 흐르는 오대천이 조금 다른 풍경을 선물했다. 마치 연어를 사냥하는 곰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이국적인 분위기였다. 하천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다리를 건너는 걸 반복하며 나무 데크길, 숲길, 바위길 등 다양한 장르(?)의 길을 번갈아 밟는 것도 걷는 재미를 더했다.

이끼가 초록의 눈처럼 돌을 덮고 있었다.

그런 다양성 때문에 어떤 구간은 전날보다 걷기 난이도가 더 높았다. 특히 바위랑 나무뿌리가 울퉁불퉁하게 솟은 길에서는, 고인 물웅덩이들을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야 했다. 그래서인지 더 '탐험'하는 기분이 들었다. 클라이밍을 하는 사람들은 벽에 돌출부를 보며 '길 찾기(route finding)' 훈련을 한다고 한다. 비록 경사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지만, 눈앞의 작은 '함정'들을 보며 단단한 디딤점들을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 보편적인 걸음의 리듬이 깨지고, 덩기덕 쿵더러러- 자유분방한 보폭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당연하게 수행(遂行)했던 '걷기'라는 행위에 대해 새삼스러운 인식이 생겼다. 그것이 즐거웠다. 하나의 명상, 수행(修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막상 월정사 지나친 시점부터는 스님은 한 분도 못 뵀네...)


루트 파인딩 (root finding)

그러면서 또 '길을 걷는 일'에 대해서도 사유할 기회를 얻었다. 빨리 가는 것보다 중요한 건 다치지 않는 것이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 밑을 살피는 일은 피곤하지만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억울함(?)도 찾아왔다. 한참 걷다가 고개를 들 때마다 너무 멋진 풍경이 펼쳐져 있어서. 그냥 발 딛는 곳만 보느라 그런 시야를 놓치고 걷는 중은 아닌가, 싶었다.

내가 "이 길을 '완주'했다," 그 말 한마디 하려고 이 고생을 하는 건 아닌데.

잘 걸으면서, 잘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했다. 멈추면 된다. 걷다가 멈춰 고개를 들어 풍경을 보고, 다시 걸으면 된다. 멋진 길이잖아, 천천히 걷자.


그 결론에 이른 내가 낯설었다. 나에게 '걷기'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가장 저비용의 수단이었다. 빠를수록 좋은 것이었다. 동행하는 사람에게 '걸음이 빠르다'라는 말을 종종 들을 만큼, 나는 평소에도 부지런히, 쉬지 않고 걸었다. 그런데 어떤 길은 천천히 걸어도 좋은 것이다.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만끽하며, 가끔 멈춰서도 좋다. 그런 여유를 갖고 삶도 뚜벅뚜벅 걸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선재' 아닐까.


발밑 주의, 전방 주시. 일시 정지.

선재 얻고 걸어. 명랑한 마음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버스 정류장이 있는 상원사 입구에 도달했다. 30분 정도 시간이 있길래, 절도 한 번 둘러보기로 했는데 - 엄청난 계단이 눈앞에 펼쳐졌다. '음~ 월정사 앞의 "천년의 숲길"은 참 좋았는데, 상원사 앞은 꽤... 쉽지 않네?' 하고 오르는데 발견한 길의 이름. "번뇌가 사라지는 길."" 이런 길, 만나면 백이면 백 그냥 '개빡센 길'이란 뜻이더라. (그러나 귀여운 다람쥐들을 만났으니 보람 있었다.)

burn 뇌가 사라지는 길


(3편에 계속...)


안녕하세요. 8월 2주 차, 충남 서천에 있는 할머니 댁에 놀러 온 용구입니다. 원래 이번 글에서 7월 3주 차 글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글 쓸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휴재(지각)보다는 적은 분량이라도 연재를 이어가는 것이 예의인 것 같아, 오늘 글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대신 주말 중에 보충편이 하나 더 올라올 예정이에요! 다음 주 수요일에는 정상적으로 7월 4주 차, 안동 여행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현실과 한 보름 정도 시차를 두고 여행을 복기하는 재미가 있네요. 앞으로도 즐겁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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