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의고백
내가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간다고 했을 때 제일 많이 들은 말이다. 전 세계 많은 나라들 중에 콕 집어서 중국을 선택한 이유는 친구의 가벼운 제안 때문이었다. 20살의 나는 인생의 목표였던 대학생이 되어 (원하던 대학은 아니었지만) 6개월 동안 그 누구보다 새내기답게 캠퍼스를 누볐고, 남은 6개월은 피 터지게 반수를 했다. 수능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수시를 쓰다가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분명 내가 가고 싶은 '대학교'는 확실한데 '학과'는 갈팡질팡인 것이다. 결국에는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고르듯 성적에 맞는 학과를 골라 지원했다.
어찌어찌 수능까지 잘 치르고 수시 결과를 기다리던 중 ' 왜 대학을 가야 하지?'라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나는 대체 어떤 걸로 먹고살까?'가 더 정확한 질문이었던 것 같다. 진작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결론 냈어야 했던 그 질문을 '대학만 가면 다 해결될 거야'하고 회피했더니 수능이 끝나고 부메랑처럼 다시 날아와 내 마음을 때렸다. 정답이 없는 이 질문은 곧 나를 '대학교'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무기력하게 만들기에 이르렀다.
수시 발표가 나고, 그토록 원했던 대학교에 가게 되었는데 뜬금없이 대학 공부 말고 다른 걸 해보고 싶었다.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난 다 잘 해낼 것만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내 몸을 감쌌다. 20살의 내 머리에서 나온 것 치고는 매우 똑똑하게도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그때 대학을 가도 늦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해냈다. 나는 대학을 위해 달린 그 수많은 시간들이 무색하게 다음 해 입학 예정이었던 대학교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포기했다. 그 결정을 하기까지는 손이 덜덜 떨릴 만큼 무서웠는데 막상 포기하고 나니 속이 탁 트이는 해방감이 들었고 곧 기분 좋은 설렘까지 밀려왔다. 그 후 21살의 나는 1년 동안 해보고 싶던 아르바이트를 이것저것 해보며 살았다. 말 그대로 내일 죽어도 아쉽지 않게 살아가던 그때의 내게 친구 E가 솔깃한 제안을 하나 했다. 중국 북경으로 어학연수를 가려고 하는데 나도 같이 가자는 것이다! '고민'이라는 단어를 잊기로 했던 그때의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얼마 뒤 나의 북경행 소식은 부풀려지고 부풀려져서 어느새 내가 정말 중국에 큰 뜻이 있어서 떠나는 걸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제야 고백한다. 그냥 친구 따라가려던 거다.
내가 중국을 간다고 했을 때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말렸다. 특히 부모님의 반대가 너무나도 컸었다. 엄마는 너무나도 완강한 내 고집에 포기한 지 오래였지만 의외로 아빠가 출국 직전까지도 제발 중국만 가지 말라고 말렸다. 부모님 말씀도 맞는 게 내가 중국을 가면 안 되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았다. 몸이 약해 병원을 투어 돌듯이 다녔고, 한 번도 집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한국과 연락도 잘 안되고 꼭 비자가 있어야만 갈 수 있는 중국이라니! 그때의 내 고집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될 정도였지만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이미 사방에다가 말을 해놨기 때문에 여기서 포기하기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 어학연수로 미리 중국을 경험하며 내 꿈을 찾은 후 중국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하겠다는 나만의 야심 찬 계획도 있었다.
그렇게 중국에 갈 준비를 하나씩 해나가며 친구 E와 중국어 학원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다가 그녀가 갑자기 어학연수를 못 가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선택한 거라 마음을 바꾸라고 할 수도 없었다. 원래의 내 성격이라면 ‘그럼 나도 안 갈게!’라고 하는 게 어울린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정말 중국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중국에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럴래? 근데 그래도 난 혼자라도 가야겠어!"
중국어를 잘하는 친구 E만 믿고 중국어 학원도 대충 다녔지만 '니하오'라도 알고 가는 게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나는 혼자 중국에 가게 되었다. 그렇게 크고 신기한 게 많다는 대륙으로!
Ps. 북경 서바이벌행 열차가 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