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힐(rincon hill)의 일상
일 년 내내 특별히 비가 온 기억이 없는 곳이지만 겨울에는 며칠씩 비가 오는 날이 이어지기도 한다. 안개 미스트로 분사하는 듯한 독특한 비가 특징이다. 비가 오는 날엔 오렌지색 조명과 아마존에서 사서 의자에 걸쳐둔 러그가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최근 이사 온 곳은 링컨 힐(rincon hill)로 불리는 이곳은 인근에 세일즈포스, 링크드인, 도어 대시, 옐프, 인스타 카트 본사가 모두 500미터 이내에 있고, 딜로이트를 비롯한 대형 오피스들, 각종 은행과 다양한 사무직 종사자들의 오피스가 집중되어 있다. 여기서 5분 정도 운전을 하면 트위터 본사도 나온다.
이곳의 주거 시설들은 30-40층에 달하는 신형 고층 빌딩에 내부는 내가 살고 있는 스튜디오부터 원베드룸, 2-3 베드룸까지 다양하고, 각 빌딩의 펜트하우스는 다른 세대에 비해 굉장한 대형 면적과 쾌적한 뷰를 자랑한다.
샌프란시스코의 많은 지역이 그리 깨끗하지는 않지만 이 지역은 아주 깨끗하고, 젊은 인구들이 많고 동쪽으로 embarcadero를 끼고 바다와 베이 브릿지를 바라보고 있는 쪽은 거의 일 년 내내 파란 하늘을 보여준다. 운전으로 10분 정도만 서쪽으로 가면 날씨가 이곳과는 다르다. 집을 계속 동쪽에서 찾는 이유도 안개나 구름이 적은 날씨에서 명쾌하고 쾌적하게 살고자 한 이유가 크다.
팬데믹 이전에는 최고의 가격을 자랑하던 렌트비가 반 이상 내려갔던 작년 10월 경 집 구경을 하러 예약을 하고 와서 다양한 레이아웃의 스튜디오들을 구경했는데, 주거 환경이 정말 좋아 보였고, 당시 살 던 집은 룸메 두 명들이 아침에 늦잠을 자는 스타일이라 준비하고 출근하는데 불편함이 많아서 내 생활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간절했던 차에 당일 어플라이를 하면 추가로 할인까지 제시해 준다고 해서 과감하게 결정을 하고 두 달 뒤 이사를 올 수 있었다. 준비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고, 이사업체도 고용했는데도 이사란 매우 피곤한 일이었다. 여기서 두 번 이사를 할 때마다 얼굴에 큰 뾰루지가 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드디어 나의 공간을 가지고 나니 1년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한국과는 다른 생활을 해온 것에 대한 피로감이 일제히 몰려왔고, 마침 연말에 1년간 못쓴 휴가를 의무적으로 써야 하여 2주간 실컷 나의 공간을 누릴 수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공간을 셰어 하던 시간 동안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내가 이제 새벽형 인간이 되었나 했는데, 무의식 중에 나의 시간 확보가 간절해서 그랬던 것 같다.
셰어 공간에 살아본 사람들은 비슷한 경험이 있을 텐데, 아무리 자유로운 공유라도 결국은 같이 사는 사람들의 눈치를 무의식적으로라도 보게 되고, 요리는 가급적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게 돼서 밀프렙도 하고 갖은 방법을 써보게 된다. 룸메들과 즐겁게 대화를 하거나 가끔 요리를 공유하는 재미도 있지만 월세와 유틸리티를 공유하는 관계는 군더더기 없는 우정도 아닌 점이 있다.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요리와 세탁을 필요한 만큼만 할 수 있다는 것과 tv와 라디오를 듣는 것 등 한국에서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 일상이 되자 그걸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가구는 지난번 집에 들어가면서 시집을 가는 여성에게 구입한 퀸사이즈 침대, 원목 책상과 의자 두 개, 사이드 테이블 세트를 그대로 사용하고 스탠드 두 개와 tv와 tv 스탠드, 조립식 신발장만 샀다. 기존 가구들의 디자인이 매일 봐도 좋아서 새로 더한 몇 개가 잘 어우러진다. 웨이페어에서 구입한 티브이 스탠드는 받침대 하나가 나사 스크루가 없다고 남기니 전액을 환불해 주면서 가구는 가지시거나 알아서 폐기하라고 해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완벽하진 않아도 무리 없이 티브이를 잘 받치고 있고, 원목 색깔도 기존 가구와 마룻바닥과 잘 어울린다.
여행가방 두 개만 들고 와서 많은 것을 해낸 것 같아 매우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