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여자는 두 부류로 나뉜다. 원피스를 입는 여자와 원피스를 입지 않는 여자. 예전에는 한여름에 아무리 더워도 바지에 무채색 티셔츠만 입었다. 흰색, 회색, 검은색, 청바지가 다였다. 무채색만을 몸에 걸치다 보니 무채색이 가장 편안했다. 나머지 색은 내 몸에 함께하기에 불편하고 어색했다. 블랙은 몸을 가장 슬림하게 보이게 해 주며, 가장 세련된 컬러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검은색만을 입는 사람은 뭔가 내면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라는 것은 내 경험으로만 봐도 맞는 말인 것 같다.
화사한 원피스를 입는 여자들이 있다. 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그런 여자들을 보면 부러웠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을 수 있는 종아리, 화사한 색깔과 패턴을 멋지게 소화하는 자신감까지도. 너무 예뻐서 입어보고 싶은 멋진 드레스를 발견하고 사두기는 했으나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집에서 감상만 한 적이 있다. 그 옷이 왜 그렇게도 두려웠을까. 그리고 나는 왜 내 몸과 그 옷에게 그렇게도 자신이 없었을까.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에 유난히 예민한 사람이 있다. 자존감이 낮은 탓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믿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제각각으로 생긴 몸이라고 해도 아무리 형편없는 성격이라고 해도 나름의 장점은 있기 마련이다. 스스로를 보는 시각이 장점보다는 단점에 집중되어있어서 자신의 장점을 즐기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손해인 삶을 산다. 마치 컵에 반쯤 물이 찬 것을 보고 누구는 물이 반이나 있다고 하지만 누구는 물이 반밖에 없다며 불평하는 것처럼. 나는 아무리 내 몸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적어도 허리만큼은 가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 세상에 통자 허리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허리가 잘록한 것은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허리를 강조한 옷을 얼마든지 입을 수가 있었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장점을 부각하고 단점을 커버하며 나만의 매력을 강조할 수 있었을 텐데 노력하지 않았다. 늘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에만 신경이 곤두서서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지 못하고 눈에 띄지 않는 어두운 색으로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옷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많이도 닮았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으로 내가 상처받을까 봐 내 의견과 감정을 감추기 급급하다. 말이 극도로 없어진다. 시키는 말에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깊은 대화로 이어지지 못한다. 혹여라도 길게 말을 했다가 내 의견에 대한 다른 사람의 견해를 듣게 되면 속으로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래서 더더욱 말이 없어진다. 상대는 또 자기와 거리를 두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더 이상 관계의 발전은 없어진다. 늘 어디서든 드러나지 않고 묻히고 싶어 한다. 수더분한 척 연기하고 스트레스를 삭힌다. 검은색 계열의 몸을 감싸는 옷을 입음으로써 내 몸과 옷에 대한 다른 사람의 지적을 원천 봉쇄한다.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삶의 자세는 자기 자신이기를 거부함과 동시에 세상을 참 살기 불편하게 만든다. 그동안 나는 세상이 참 불공평하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버거워 그냥 하루하루를 때우면서 버티며 산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런 내가 육아를 하면서 고통스러운 내 모습과 맞서고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어느 정도 스스로가 편안해졌다. 어느 순간 이렇게 전투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잠잠하다가도 약간만 방심한 틈에 날뛰는 마음속 검은 그림자를 누그러뜨리는 법, 사람들과 편안해지는 법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고 나서부터 이 세상은 내게 점차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화사한 원피스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오렌지 컬러의 원피스를 입고서 살면서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착장으로 많은 칭찬을 받았다. ‘잘 어울린다. 키가 크고 허리가 날씬해서 이런 옷을 입을 수 있다. 머리 색깔 하고도 잘 어울린다. 이런 화사한 원피스가 참 잘 어울린다.’ 내게 어울릴 거라고 100퍼센트 장담하지 못한 채 도전한 최초의 컬러풀한 원피스였다. 내 인생이 무채색이듯, 나는 늘 청바지와 무채색 티셔츠만 어울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컬러풀한 원피스가 잘 어울릴 줄은 몰랐다. 나를 알게 되는 것은 스스로를 향한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과 같다. 평소에 입어보지 못해 어색한 옷을 자신감 하나로 데일리 용으로 입게 되었고 그 자신감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것 같다. 내가 입어버리니 사람들이 어울린다고 칭찬하고 사람들이 어울린다고 하니 나는 또 화사한 원피스가 어울리는 여자가 된다.
영화 <브루클린>에서 고향을 등지고 혼자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주인공 에일리스는 향수병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가며 내면의 성장만큼이나 대담한 패션을 보여준다. 무채색의 답답한 너드에서 화사하고 세련된 모던한 여성으로 이미지가 확 바뀐다.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화사한 옷을 입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몸매가 예쁘고 얼굴이 예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 상태, 빛나는 자신감과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마침내 자신에게 화사함을 허락하는 것이다. “향수병에 걸리면 죽고 싶겠지만 견디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어요. 하지만 지나갈 거예요. 죽지는 않아요.” 영화 속 대사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나를 강하게 만들 뿐’이라는 니체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시련과 고통을 견뎌내어 성장하고 강인해진 여자는 화사한 원피스를 입을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