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만남

병상일지 2

by 박상진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스트레처에서 병상으로 옮겨지고 난 후 바로 코에 산소 흡입기가 소의 코뚜레처럼 꿰어지고 이내 코로 산소가 강제로 공급되었다. 언뜻, 뇌간(腦幹)에 손상을 입고 식물인간이 되다시피 해서 한 해 가까이 산소호흡기에 몸을 의탁(依託)한 아버지 생각이 났다. 폐렴인지 뭔지 제대로 병명도 확인조차 하지도 못한 채 일순간 난 중환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산소 공급치 레벨을 5로 시작한다는데 갑작스럽게 그 수치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더욱 가빠왔다. 옆에서는 간호사가 호흡법을 일러주느라 여념이 없는데도, 내 의식의 한 자락은 과연 이게 꿈일까 생시일까 현실과 미몽(迷夢) 사이를 헤매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양쪽 눈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 눈물은 불같이 달구어진 양쪽 뺨을 위로하듯 슬그머니 어루만지면서 방울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병상 머리맡에는 500ml 용랑의 산소통이 기포(氣泡)를 일으키며 호스로 이어진 관을 타고 내려와 내 코를 통해 산소를 왕성하게 폐 속으로 욱여넣고 있는데, 코로는 들숨을 입으로는 날숨을 쉬어 산소의 공급 효과를 높이려 함이 금세 이해가 되었다. 살려면 별 수 없이 이런 호흡법을 따라야 하고, 산소가 마구 머릿속으로 엉겨 들수록 내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지고 있었다.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는지 벌써 배식(配食)이 시작되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모든 것이 거추장스러웠다. 손에 주사기를 꽂아 항생제와 수액을 주렁주렁 연결해서 달고 있는 거치대가 우선 꼴 사나웠고, 산소포화도를 측정한다고 손톱과 센서를 연결해 놓은 감지선 역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팔다리를 선으로 연결해서 암중(暗中)으로 조종하는 퍼핏(꼭두각시) 꼴이 된 모양새였다. 더욱이 용변마저 이 협소한 공간에 사방으로 커튼을 치고 해결해야 한다니 참으로 마음이 암담했다. 식탁에 펼쳐진 식판 속의 밥과 반찬은 먹을 만했으나, 숟가락으로 한술 떠 넣자마자 마치 모래를 씹는 듯했고, 저염(抵鹽)으로 간을 맞춘 익힌 오징어무침이나 미나리무침, 계란말이와 명탯국은 슬쩍 입에 댔다가는 비위가 상해 그만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점심을 물리고 나자 몸에 오한이 들면서 온 몸으로 열이 뻗히기 시작하며 호흡이 가빠졌다. 간호사를 부르니, 해열 진통제를 처방할 수 있는 조건이 양쪽 귀의 체온을 잰 37.8°가 평균값이란다. 몸은 견딜 수가 없는데 열이 오를 때까지 참으라니 이건 또 뭔 말인가! 평상시처럼 왼쪽, 오른쪽으로 모로 누워도 몸이 편치 않고 양쪽 늑간(肋間)이 찌를 듯 아팠다. 마치, 골프 입문 시에 멋모르고 몸통 회전을 하며 스윙하다가 갈비대가 나가거나 실금이 생겨 늑간 신경통이 생겼을 때처럼 말이다. 몸을 반듯이 하여 천장을 보고 정자세로 누우면 바로 기침이 잇달아 이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어쩔 수 없이 자세를 바로 하고 앉는데, 통로 바로 맞은편 병상의 환자와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목례를 나누고는 이내 서로 말문을 닫고 말았다. 그칠 줄 모르고 쇳소리를 내며 잇달아 터지는 나의 기침이 심상치 않아 보였으니까. 이곳 4인실은 기저질환(基底疾患)이 같은 환자들을 동(同) 호실로 모은 것이 아니어서 앓고 있는 환자의 병증도 제각각이었는데, 건너편 환자의 병명은 장폐색증(腸閉塞症)이었다. 장폐색증은 소장이나 대장의 일부가 여러 요인에 의해 부분적으로 혹은 완전히 막혀 장의 내용물이 내려가지 못해 장내에 축적된 배변과 가스가 장애를 일으키는 병증이다. 이 환자의 경우는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입원한 지 9일이 지나도록 물 한 방울 마시지도 못한 채, 영양제만 수액으로 체내 투입을 하면서 방귀나 설사로 장의 위아래가 뚫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젠장! 먹으면 바로 물 설사가 나고 입맛이 없어 제대로 먹고 싶은 마음조차 없는 사람도 있는데, 오로지 물 한 모금이라도 제 힘으로 아래로 내려 보내기를 오매불망, 간구(懇求)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그때부터였다. 어찌 보면 먹을 것을 두고 서로 처지가 반대인 이 기막힌 상황이 은연중에 서로 위로가 되었다. 가끔은 행동이 자유로운 그가 자리를 한참 비울 때면 속이 상하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 식사 때를 전후해서 자리를 비켜주는 일이긴 하지만. 나 보다 네댓 살은 연상인 듯 보이는 그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을 때면 귀가 솔깃해질 때가 더러 있었는데, 특히 전화기 너머의 상대방 이름에다 선생이란 호칭을 붙여서 말할 때였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학교에서 근무하신 적이 있냐고.


지금부턴 이 환자를 두고 이분이라 말해야 할런지도 모른다. 당연히, 이 사람은 같은 관내의 다른 고등학교에서 6년 전 명퇴한 전임 상업 교사였다. 대통령을 배출한 이 지역 전통의 상업고등학교는 이후 인문계 학교로 전환을 했고 결국 지금에 이르렀다. 이런저런 친분이 있는 상대방 학교 선생님 이름을 거론하며 서로 서먹했던 거리를 좁히다가, 내 귀에 익숙한 말투가 포착(捕捉)이 되었다. 바로 부모님들로부터 익히 들어 귀에 익은 고향 말이었다. 그래서 넌지시 지나가는 말로 고향을 물어보았는데, 내 고향과 바로 이웃 한 마을이었다. 게다가 성씨도 같은 박가(朴家)라니!


내가 태어난 마을의 이름을 밝히자 그때서야 그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장 족보부터 물어온다. 몇 세 손인지는 정확히는 몰라도 정제 공파에 사문진파의 후손이다. 깜짝 놀라며 자신이 정제 공파 37 세손이며 사문진파 24 세손이란다. 파가 갈라진 것은 윗대에서 다시 분파가 이루어져 각자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아서 일 것이다. 본인은 3대가 자손 많은 집안의 막내로 이어져 주위의 다른 박가에 비해 촌수가 월등히 높다면서 돌림자로 추론을 해 보더니 내가 손자뻘 쯤 될 거란다. 본인의 할아버지가 태어난 곳이 바로 우리 마을이라는데 어찌 보면 집안 어른이고, 그 윗대의 선영(先塋)이 우리 문중 산에 있으니 틀림없는 먼 친척뻘이었다. 갑자기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공경해지고, 또 전직(前職) 역시 공교롭게도 지역에서 30년 가까이를 함께 한 동료 교사였다. 적어도 이런 이야기가 설왕설래하는 동안은 내 몸속의 모든 체열과 기침과 온몸을 짓누르던 둔통(鈍痛)이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밤 열한 시가 가깝도록 38도를 넘나드는 발열과 몸을 덜덜 떨리도록 오그라지게 만드는 오한과 씨름하고 있는데 간호사가 오더니 내일 오전에 mri 검사를 해야 해서 12시 이후부터 금식을 하라 한다. 밥이야 이미 밥맛을 잃었으니 먹은 게 있을 리 없고 먹고 싶은 마음도 없지만 벌써부터 메말라가는 입이 문제였다. 평소에도 물통을 옆에다 두고 생각나는 대로 물을 마시면서 잠을 청하는 습관이 있는지라, 불시에 와서는 이 고열로 메마른 몸에 밤새 물도 한 모금 마시지 말라니! 결국 물로 입속을 축이는 가글링 정도는 허락을 받았으나, 그때부터 궹해진 눈은 감길 줄은 몰랐고 결국 밤을 뜬 눈으로 새우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옆 병상에선 새벽부터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비록 한 번뿐이긴 했지만 위아래를 막았던 물꼬가 물 설사 한 번으로 시원하게 소통이 된 것이다. 오는 길에는 덤으로 방귀까지 뀌었다며 아이처럼 좋아라 했다. 기진맥진한 몸으로 mri 검사를 하러 가면서 나는 이미 마음속에서부터 실패를 예단(豫斷)하고 있었다. 약간의 폐쇄공포증(閉鎖恐怖症)이 있어 좁은 공간에 오래 머물면 쉽게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불안감을 느낄 때도 더러 있었는데, 지금의 몸상태로는 10분이라도 제대로 견뎌낼지 오히려 내가 더 궁금해졌다. 결국, 20분간을 관속에서 버티고 버티다 탭을 하고 말았다. 결국, 사람만 죽도록 고생한 꼴이었다. 이마 체온은 38도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고, 병실로 돌아온 병상의 식탁 위에는 아침이 차려져 있었지만 입속으로 넘길 수 있는 건 오로지 물 뿐이었다.


인연이나 뜻밖의 만남은 처지가 절실할 때 더 홀연히 의미가 살아나는 법이다. 비록, mri 실패자로 초라한 귀환을 했지만 그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큰 위로가 되었다.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9일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극한의 어려움을 겪었듯, 결국 내 몸을 버티게 하고 건사할 주재자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이른 새벽에 물꼬가 틘 이후로 다시 물길이 막혔지만 그는 자신을 사로잡았던 조바심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 보였다. 하루 이틀이 더 걸리더라도 이젠 희망이 바로 눈앞에서 어른거리니 현재의 괴로움은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아침상을 받아두고 그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죽으로 시작한 식사는 함께 곁들인 반찬과 함께 게는 감추든 그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10여 일 만에 먹는 음식이니 그 어떤 것이라도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옆에서 죽으로 함께 신청한 아침상을 그래도 반 이상 비우고 나니 나 역시 속이 든든해졌다.


비록 체구는 작으나, 마음의 도량(度量)이 깊어 보이는 저 사람은 삶의 위기에서 뜻밖에 만난 내 혈족(血族)이자 든든한 마음속 지원군이었다. 거듭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