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일지 3
Nurces on a night shift. 병원에서의 첫날밤, 심한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몸이 기억하고 있는 대로 잠에 익숙한 방향을 찾으려 몸을 뒤척이며 괴로워하던 순간에 어이없게도 이 짤막한 말이 떠올랐다. 아마, 과거 수업 중 관련 지문 속에서 떠밀려 다니다가 잠재의식 속에서 지금의 내 처지와 순응해 머릿속으로 기어든 말이리라.
지문의 자세한 내용까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아마 밤중에 환자들을 수발해야 하는 야간 근무 간호사의 열악한 환경이 이들을 둘러싼 갖가지 에피소드와 함께 버무려진 글일 것이라 짐작이 갔다. 과연, 현실 속 이들의 근무 환경이 그랬다. 벌써, 나 자신마저도 거의 10분 단위로 호출벨을 눌러 그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지 않은가.
우선, 목이 마르고 호흡이 가팔라졌다. 진통해열제를 요청했으나, 아직은 평균값에 미치지 못하는 체온을 거론하면서 야박하게 거절을 한다. 대신, 얼음팩을 두 개 준비해 와서 양쪽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주었는데, 일순 드라이아이스의 냉기로 몸이 서늘해지긴 했으나 낯선 이물감과 함께 얼음이 기화(氣化)되며 배어 나오는 습기에 오히려 몸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이 두 개의 아이스팩은 각각 베개와 등받이로 그 쓰임새를 달리했다. 아울러, 아무리 금식(禁食)이라도 입속에 침 한 방울 없을 만큼 갈증이 심한데 가글링이라도 하면 어떨까 싶어 냉수를 갖다 달라하니 뜻밖으로 흔쾌히 허락을 한다. 물론, 단 한 모금의 물도 삼켜선 안되며 단지 입속만 축이라는 것이다. 냉기를 가득 품은 물이 입속과 혀, 목구멍을 요란스럽게 한번 훑고 지나가자 금세 혀끝 어딘가에서 꼭꼭 숨어 있던 침들이 방울방울 솟아오르고 있다.
전날, 7시 20분으로 통보받았던 시간은 20분을 더 넘겨, 검사실로 이동한 후 MRI 튜브 속에 몸을 뉘일 때는 8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양손을 모으고 배 위에 제법 중량감이 있는 뭔가가 올려졌다. 그때부터였다. 마치 발작하듯, 애써 억눌러 왔던 기침이 마구 터져 나오는데 숨을 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안간힘을 다 해 검측 기사가 일러준 사전 주의 사항을 떠올리며 머리맡에서 들리는 기계음의 지시를 따르려 애를 썼다. 아마, 검사가 시작된 지 내 생각으로 20분, 실제로는 10여 분도 흐르지 않은 시간쯤에 다음 검사과정으로 넘어가는 휴지기가 잠시 있었다. 뭐 보나 마나, '숨을 들이켜고 참으세요', '숨을 쉬세요' 등등 호흡과 관련된 행동을 지시하며 내 몸속의 장기(臟器)들을 스캔하려는 것일 테지. 하지만, 바로 이 틈이 내 몸이 버틸 수 있는 임계점(臨界點)을 넘어서는 순간이기도 했다. 눈 돌아간다는 표현이 내게도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을 만큼, 몸이 한번 크게 더 뒤틀리고 숨 가쁜 잔기침이 다시 시작되자 마치 상대방 양 팔뚝으로 목이 제압된 격투가처럼 어쩔 수없이 양손으로 튜브의 양쪽을 강하게 탭을 했다. 정말이지 완전 백기를 든 것이다.
처음부터 몸상태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검측 기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내 뜻에 동의를 해주었다. 말로 표현은 않았지만, 그들의 동의는 이 순간만큼은 내 생명의 구명줄 인양 고맙기가 그지없었다. 비록, 전문적인 의료인으로 볼 때는 환자의 어린양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반대편인 내 머릿속에서는 코마(coma)나 섬망(譫妄) 같은 아직은 낯 선 의학용어들이 잔뜩 날을 세운 채로 여기저기를 헤집고 있었다.
휠체어에 실려 병동으로 되돌아오며, 남들이 건강 검진하고 와서는 MRI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살짝 부러웠던 마음조차 이젠 구르는 휠체어 바퀴에 눌려 별 미련 없이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병실 식탁 위엔 아침이 차려져 있었으나, 간호사를 호출해서 우선 물부터 찾았다. 입안 그득히 고이는 냉기를 머금은 물이 그렇게 청량(淸凉)할 수가 없었다. 눈앞의 밥과 국, 반찬에서 스멀스멀 배어 나오는 여러 익숙한 냄새들로 인해 비록 배는 고팠으나, 지금 이 순간은 마치 모래 섞인 밥과 같아서 국이나 여러 반찬들과 함께 입맛을 떠난 식욕을 돋우지는 못했다. 그래도, 밥을 몇 숟가락을 꾸역꾸역 욱여넣고 국물을 후루룩 삼키고 나니, 그럭저럭 3분의 1 가량은 먹을 수는 있었지만 이내 아랫배에서 다급한 신호가 왔다.
다시, 오늘 새벽의 일이다. 몸이 주는 괴로움을 이겨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토록 몸에 과부하(過負荷)를 걸어놓고, 결국 체온이 38도를 넘나들 때 진통해열제를 주사할 까닭이란 대체 무엇인가? 의학적인 입장으로 볼 때 말 못 할 이유가 있는지는 나는 모른다. 하지만, 아침을 물리고 난 후 회진(回診)을 온 주치의에게 지난 새벽의 고충을 토로하며 진통해열제에 대한 내 생각을 밝히자, 그는 옆에 선 간호사에게 이르기를, 웬만하면 사후에라도 처방을 내릴 테니 약제실로 주문을 넣으라고 순순히 한발 물러서 준다. 이런 된장 같으니! 갑자기 조금 전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MRI 검사를 끝가지 버텨보려 했던 내 의지와 심사(心思)가 일순간 확 비틀려버린다. 하지만 어쩔 텐가. 그는 내 몸을 돌보는 의사이고 나는 그에게 병으로 시든 몸을 의탁(依託)한 일개 환자에 지나지 않은 것을.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서러움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나의 가르침을 받았던 많은 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역시 저리 하지 않았을까? 가르침의 자리란 무거운 것이다. 흔히, 소통보다는 지시에 익숙한 것이 선생님의 역할이다. 생활지도도 그렇고 전공교과인 영어를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선별된 우수한 학생들을 지도할 때가 더욱 그러했는데, 오로지 나만 따르라는 식으로 내 교직생활의 초반이 점철(點綴)되어 있었던 것 같다.
후일, 나는 학생들과 상담을 할 때 교사와 의사의 역할을 자주 비교해서 거론하곤 했다. 의사가 환자를 늘려가면서 임상적(臨床的)인 의료 성과가 쌓여 명의(名醫)로 성장을 하듯, 무릇 교사도 젊어서부터 수많은 학생들과 부대끼며 가르침의 깊이를 더 해 훌륭한 선생으로 인정을 받는 과정을 말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 초창기 교직생활은 실수투성이였다. 잠시 나의 수고를 덜기 위한 윽박지름과 학생들의 어쩔 수 없는 이런저런 부족함에 대한 야단, 그들의 목표가 이니라 내 목표에 매몰(埋沒)되어 오로지 공부만을 외쳤던 것이 내 젊은 교직의 일그러진 초상(肖像)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과분한 제자들을 맞아 이들의 분에 넘치는 도움으로 별 후과(後果) 없이 더 나은 교사로 순조로이 도약(跳躍)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여러 흐트러진 생각이 한자리로 모이자 모든 것이 명징(明澄)해졌다. 견뎌야 하는 것이다. 이 지난(至難)한 싸움이 언제 끝날 지는 모르지만 난 건강한 몸으로 집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불과, 하루밖에 지나진 않았지만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떠나는 뒷모습을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막내의 얼굴이 몹시도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