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 나 역시, 교사의 입장에서 동료 교사나 수많은 학생들과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적인 관계를 맺어왔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은 관계를 딱 부러지는 한마디 말로 명징(明澄)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10월 18일, 포항 병원 응급실을 거쳐 일반실로 입원을 하면서부터는 생각지도 못했던 고민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보아하니, 몸이 완치되어 퇴원할 때까지는 시일이 제법 걸릴 게 분명한데 인간적인 도리를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은 바로 눈앞으로 다가와 있다. 22일에는 오랜 동료이자 총각시절 하숙을 같이했던 권 교장 아들의 혼사 날이다. 특히, 이번에 장가가는 녀석은 내가 3년 간 영어를 직접 가르친 제자이기도 해서 그 의미가 남달랐는데, 하필이면 이럴 때 환(患) 중이었다.
이 녀석은 공부도 잘해서, 수능의 모든 영역에서 제2 외국어를 포함해 올 1등급을 맞을 만큼 성적이 뛰어났으나, 입시운이 따르지 않아 한의학과로 교차(交叉) 지원해서 지금은 창원의 한방의료원 공의(公醫)로 주어진 소임(所任)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사흘이 지난 지난 화요일에 카톡으로 권 교장의 청첩장이 날아온 것이다.
'내가 연락을 못 했네. 미안하다.' 짤막한 두 마디의 말과 함께 동봉(同封)된 청첩장을 열면서 마음이 몹시 찹찹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중 하나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리 없는 내가 얼굴을 내밀지 않았으니 나를 둘러싼 일신상의 안위(安危)가 우선 궁금했을 터이고, 두 번째로는 학교 게시판으로 일반 공지(公知)를 하긴 했지만 개별 청첩을 깜박함으로써 친구에게 예를 다하지 못했다는 송구스러움에서였을 것이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전화를 했다.
"권 교장, 많이 미안타. 지금 난 영남대 병원에 폐렴으로 입원 중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데이."
"걱정해야 할 큰 병은 아니제! 그라마 됐다. 니 얼굴이 안 보여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았는데, 최근에 아무도 너와 연락이 닿은 사람이 없다더라. 그래서, 혹시라도 이 청첩장을 보고 답장이나 해줄까 싶어 니한테 보낸 기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고마웠다. 진심 어린 그의 염려는 내게 새로운 용기를 돋우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의 따뜻한 배려에 반드시 보답을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동안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29일 토요일은 아버지의 기일이자, 현직에 있을 때 기간제 영어교사로서 내게 큰 도움을 주었던 한 선생님의 본인 혼사가 있는 날이다. 한 선생님은, 1996년에 내가 영어교과 직무연수를 다녀왔던 West Virginia University에서 1년간 어학연수를 했다기에 상당한 호감과 함께 같은 대학에서 동문수학 했다는 동질감(同質感)을 가졌던 선생님이기도 했다. 특히,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해서 학교의 특색교육이었던 영자신문을 주관하고, 학내 영어캠프를 활성화하기 위해 나를 도와 관내(管內) 원어민 교사를 학교로 초치(招致)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기간제 교사를 마친 그 이듬해, 한 선생님은 영어교사 임용시험에 당당히 합격해서 지금은 공립 고등학교의 영어 교사로 학생들을 열심히 지도하고 있다. 학교를 떠난 후로도 종종 안부를 물어왔기에 이번 대구에서 있을 결혼식에는 열일 젖혀두고라도 꼭 참석하겠노라 미리 약조(約條)를 했던 것이다. 결국, 10 월의 아리따운 신부를 영접(迎接)할 행운마저 영영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30일은 고등학교 후배이자, 포항의 사립고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임 중인 정 교장 고명딸의 혼사 날이다. 발병하기 1주일 전에 별도로 전화를 내어 꼭 참석해 줄 것을 청해 왔기에, 막상 이런 처지가 되었지만 막연하게 묵묵부답(默默不答)할 수는 없었다. 영남대 병원으로 전원하면서, 구급차 속에서 영남대 의대를 졸업하고 포항에서 개업 중인 정 교장 동기 송 원장과 통화를 할 때 저간의 사정을 미리 일러주도록 부탁한 것이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31일은 안타까운 일이 겹쳐서 일어났다. 동료 교사였던 박 선생님의 부친이 소천(召天)을 했다는 기별이 왔고, 고등학교 동기 단톡방에는 친구 부친의 부고(訃告)가 올라왔다. 갑자기 분주해진 단톡방에서는 단체 문상이 안건으로 올라왔는데, 부친의 존체(尊體)를 모신 곳이 바로 영남대 병원 장례식장이었다. 지난여름, 고등학교 정기 산행을 포항에서 해안 트래킹으로 대신한 후 부쩍 더 친해진 친구였는데, 지금쯤 영안실에 모여 단체로 문상하고 있을 친구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리자니 황망(慌忙)스러움과 함께 마음이 더욱 안타까워졌다. 멀리 창밖으론, 황갈색으로 더욱 새초롬해진 서너 그루의 단풍나무가 세찬 가을바람에 못 이겨 이리저리 몸을 뒤틀고 있다.
11월로 넘어가면, 정말 중요한 혼사가 잇달아 있다. 5일 있을 고등학교 동기 아들 혼사와 12일에 있을 초등학교 막역지우(莫逆之友)의 딸 혼사가 그것이다. 고등학교 동기는 학교 교련이 공공연(公公然)하던 시절 우리 학교의 연대장으로 지금의 학생회장 격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곳 포항의 산업연구원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결혼한 이후로는 부부계로 모임을 이어갔다. 특히, 포항의 부부 모임은 동기들 사이에도 부러움을 사고 있는데, 우리가 포항에서 주관한 전체 동기 모임만 해도 지금까지 여러 차례이다. 어려서부터 서로의 자녀들을 세세히 알고 있어, 마치 이번 혼사가 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양 한껏 가슴이 부풀어 있었는데 그만 사달이 나고 만 것이다.
초등학교 막역지우의 딸 혼사는 아직 날짜에 여유가 있어 웬만하면 참석을 하려고 했다. 일치감치 전화를 주어, 우리 부부를 위해서 식장과 가까운 호텔도 예약해 두었다고 미리 알려왔다.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덧문을 마주한 채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 보낸 그는 내게 있어 친구 그 이상이다. 서울과 포항으로 직장과 삶의 터전을 달리했지만, 결혼해서 아이들을 키울 땐 방학을 번갈아가며 서로의 집을 내왕(來往)했다. 더욱이, 친구와 내가 함께 알고 있는 지인들을 위해 결혼 전날 피로연까지 준비를 했다니 정성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랬던 친구가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방 잡아놓을 필요 없나?"
아마, 이전 같았으면 하루를 멀다 하고 안부를 물어오거나 딸의 결혼식을 두고 덩달아 기뻐했을 친구가 근 보름 가까이 종무소식(終無消息)이었으니 내심으론 무척 섭섭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처지를 미리 알리면 딸의 혼사를 앞에 두고 걱정이 깊어질 수도 있으니 혼사가 끝날 때까지 그저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결국, 전화를 들었다. 두리뭉실 내 사정을 전하는 순간, 전화기 저편의 한숨소리가 깊어졌다. 꾹 참으려 해도 그만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나를 위로하는 친구의 목소리에도 마찬가지로 물기가 어려있었다. 그 역시도 지난 몇 해 동안 지독한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하지만, 기쁨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은 두고두고 오랫동안 가슴속에 남게 될 것이다.
무척 몸이 아팠다. 고열에 시달렸고 불면의 밤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집착(執着)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아마, 속절없이 잊히기 싫어서 일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갔던 세상에서 나란 존재가 완전히 지워지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참담(慘澹)한 심경 속에서도, 혹여 이런저런 궁금함으로 나의 안위를 염려하고 있을 그대들, 친구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