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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Jul 08. 2024

집에 가고 싶다

아침 풍경

아침, 커피를 사러 아파트 상가에 가던 길이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 않고 비상구 계단을 걸어서 내려간 지는 꽤 되었지만  발걸음 씩 내디딜 때마다 내딛는 발걸음에 통증과 함께 무릎이 결려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과체중으로 인해 아래로 내딛는 걸음걸이의 하중이 단련되지 못한 무릎에 여전히 부담을 주고 있으니, 단순히 운동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계단 오르기만으 족할 일이었지만, 테이크 아웃해 온 뜨거운 커피를 들고 14층까지 걸어 오르자갓 우려낸 커피의 선도는 차지하고라도 우선 커피의 온기가 이미 식어 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오늘은 어디 한 번 계단을 걸어 올라볼까나', 1층 필로티까지 계단을 걸어서 내려오는 내내 머릿속이 한가득 상념으로 젖어 있을 때, 아직은 멀찌감치 떨어진 아파트 경비실 건너편으로부터 울음소리 섞인 어린아이의 자지러드는 듯한 절규가 들려왔다.


" 엄마아, 이제 그만! 나 집에 가고 싶다."


아파트의 동과 동 사이를 잇는 간선도로 한쪽으로 노란색 어린이 통학버스가 세워져 있고, 동승해 온 선생님과 아이들을 배웅 나온 어머니들, 그리고 이들 틈새에 뒤섞여 저마다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들로 둘러싸인 채 길바닥에 누워 울면서 떼를 쓰고 있는 양갈래 머리의 여자아이가 언뜻 눈에 비쳤다. 막 출근 준비를 하다가 서둘러 나온 듯, 후줄근한 실내복 차림 그대로의 아이 엄마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 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커져만 가는 아이의 울음 섞인 쇳소리에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듯 양볼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문득, 헝클어진 머릿속에, 꼭꼭 닫아둔 유리창 저편으로부터 일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의 날카로운 편린처럼 재빠르게 기억을 할퀴며 스쳐가는 어린 날의 추억이 있다. 내가 네댓 살 즈음되었을 때였을까?


 머릿속 기억은, 산아래 강변에 넓게 펼쳐진 들녘으로 아스라이 스며들고 있는 물안개로부터 시작된다. 계절이 바뀌어 하루가 다르게 날이 무더워지면, 아직은 약간의 냉기를 머금고 있는 땅으로부터 피어오른 늦은 봄날의 아지랑이가 어느새 자욱한 물안개로 바뀌어 샛강 건너편에서 슬며시 산자락을 타고 오를 때가 있다. 아마 모심기가 거의 마무리가 되어갈 무렵이었을 다. 여전히 군대 간 우리 아버지는 제대를 목전에 둔 말년 병장이었을 테고.


아마도 외할매는, 홀시어미에다 시누이가 손위 아래로 여럿인, 그러면서도 농사거리마저 만만치 않은 곳을 혼처로 삼아 첫딸을 출가시키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마음 한구석으론 골 깊은 시름이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요즘 같은 농번기에 젖먹이와 다를 바 없는 네댓 살배기 어린애까지 딸린 스무댓 살 철부지 딸년이 얼마나 마음속에서 알알이 눈에 밟혔을까. 


그래서였을까. 흐릿한 기억 속에서, 약간은 화가 나 있는 듯한 외할매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서는 어린 내 손엔, 어김없이 막대 사탕이나 한주먹 가득 손아귀로 잡히는 왕눈깔 사탕이 들려있었다. 마치 금방 미끼를 문 물고기처럼, 마음 한쪽으론 깊고 아득한 물속으로 자맥질하고 싶은데, 하릴없이 눈앞의 사탕발림에 끌려 외할매를 따라 사립문 밖을 나서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으론 하염없이 '집에 가고 싶다'를 되뇌면서도, 뭔지 모르게 엄마를 위해서라면 외할매의 손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이 여린 내 마음을 눌렀고, 이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번갈아가며 양손으로 훔치고 있었다.


물론, 외갓집에서 달포 가까이 머물고 나면 어김없이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듬해 대구로 이사를 오고 난 후 국민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여러 차례 방학을 번갈아 가며 외갓집을 드나들게 되면서부터이다. 외할매가 어린 나를 어미로부터 떼어 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고 깨닫게 된 것은 또 그로부터 아득히 세월이 흘러서이지만, 네댓 살 시절의 어린 내 모습을 관조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양손에 막대사탕을 쥔, 여전한 그리움으로 겁을 먹은 어린아이의 물기 어린 눈망울이다.


동승한 어린이집 선생님이 사람들 틈을 헤치고 양갈래 머리 여자아이에게로 다가서자 아이는 마치 경기를 하듯 다시 자지러진다. 방금까지 아이를 얼르고 있던 엄마가 한쪽으로 슬그머니 비켜서자 바짝 다가선 선생님이 두 손으로 아이를 냉큼 안아 드는데, 어느샌가 아이 손에는 개나리 색깔의 샛노란 막대사탕 하나가 쥐어져 있다. 아파트 단지 내 이들이 어린이집으로 등원하는 모습을 모닝커피를 사러 가는 길에 종종 보아왔던 나로선 오늘 아침 풍경은 무척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버스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양다리를 헛다리로 안간힘을 쓰며 몇 차례 바둥대긴 했지만 울음소리는 금세 잦아들었고, 안타까운 눈으로 시종일관 이를 지켜보고 있던 또래 아이들 몇몇이 뒤따라 버스에 오르는 것을 끝으로 이내 아파트는 다시 이른 아침의 고즈넉한 풍경으로 되돌아갔다.


글쎄, 양갈래 머리 여자아이처럼 누구에게든 간절하게 되돌아가고 싶은 '우리 '이 있을 것이다. 두 잔의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들고 내가 어김없이 되돌아가고 있는 곳 역시 근래 아무런 생각 없이 드나들곤 하던 우리 집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양갈래로 예쁘게 머리를 땋은 그 여자아이의 간절한 절규가, 생각지도 못했던 한 순간 가슴속으로 사무쳐 와서였을까, 집 안으로 들어서며 맞닥뜨린 실내 풍경이 그저 낯설기만 하다. 마치, 훌쩍 커버린 어른 몸뚱이 속에 똬리를 튼 네댓 살배기 어린애의 시선에 닿아 있은 익숙지 않은 풍경처럼.


가끔, 정말 가끔 '우리 집' 꿈을 꾼다. 그곳은 내가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고향의 생가일 때도 있고, 외갓집일 수도 있고,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지고 없는 대구의 본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꿈을 꿀 때마다 한결같은 것은 그 '우리 집'이 바로 간절한 그리움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꿈속에서는, 지금은 생가터에 흔적으로만 남은 우리 집을 눈앞에 두고 눈물짓기도 하고, 외갓집에선 좀처럼 꿈에 보이지 않던 외할매를 뵙는다. 대구 본가를 찾아선 이미 재개발이 끝난 옛 집터의 자취를 쫓다가 꿈과 생시의 언저리에서 갈피를 잃고 만다. 사라지고 없는 것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탓이다.

 

내 나이 이제 예순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그렇긴 해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이 살아생전 마지막 집은 결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태 전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무렵, 한 달 여의 입원 중 생사의 갈림길에서 난 정말 간절하게 마음속으로 이 말을  되뇌곤 했다. '집에 가고 싶다, 정말 집에 가고 싶다.'


오늘, 아니  집에 처음 들어 선 그날만큼 또 시간이 훌쩍 흘러, 지나 온 세월이 낯설고 생소해질 때, 난 오늘의 이 익숙한 커피 냄새와 함께 우리 집 아침 풍경을 기억해 내고 그리워하기는 할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온통 헤집고 있다. 가던 길 멈추고 한참 동안 서서 바라본 노란 어린이 통학버스 속에서 훌쩍 커버린 어린 나를 찾아낸 것도 바로 그때쯤이었고.




쓰고 싶은 글보다 써야 할 글의 무게에 짓눌려 글 쓸 엄두를 내지 못한 지 벌써 한 해를 훌쩍 넘겼습니다. 그동안 여러 작가님들이 염려와 함께 많은 격려를 주셨습니다. 이에 힘입어 이제부터라도 용기를 내어 부족함이 많지만 다시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계속 관심 있게 지켜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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