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미국을 비롯하여 여러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작가님들의 글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실시간 중계를 보고 있는 듯, 예리한 관찰을 통해 인상 깊은 사진이나 유려한 글로 빚어낸 여러 나라의 생활상과 삶의 이야기는, 마치 잘 기획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시청할 때처럼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특히, 미국 동부와 서부 지역의 거점 도시나 유명 관광지를 다루고 있는 글에 유독 관심이 쏠리는 것은, 비록 오래전 일이기는 하지만 한 달여에 걸쳐 그곳으로 국외연수를 다녀왔기 때문입니다. IMF 외환 위기 바로 전인 1996년 7월 8일에서 8월 12일까지, West Virginia University에서 4주간에 걸쳐 영어교사 직무연수를 받고 나서, 서부 지역을 다시일주일 동안 자유 여행하는 국외연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서른일곱의 나이로 처음 간 미국이기에, 경유지인 시카고에서 하룻밤을머물며 들린 시어스 타워(Sears Tower) 전망대의 야경과 공항에서 다운타운까지의 지하철, 그리고 미시간 호수의 수려한 경치는 앞으로 전개될 흥미진진한 미국 여행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행하는 중에 인상 깊었던 장소나 장면을 시시각각메모로 남겨 후일을 기약해야 했는데, 학교로 복귀하고 난 후로는 그저 소중한 추억으로 마음 한 켠에다 묻어두고 말았습니다. 학생들의 입시지도에 여념이 없었던 당시로는 글 쓸 엄두가나지않았고, 퇴직한 지금처럼 유유자적하게글 쓸상황이되지 못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후, 미국에서의 직무연수와여행 경험은 영어수업이나 다양한 교육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시선을 넓히는데 충분한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시 국외연수를 통해서 현지에서 느낀 문화충격(culture shock)을제때 기록해 두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로 남았습니다. 이는, 밀레니엄 시대로 넘어오기까지세계 대중문화의 선도 역할을 한 미국문화의 진면목을 제대로알지도 못한 채 오히려 이를폄하하는 추세가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문화가 정체성을 갖고 발전하기에는 오랜 세월과 타 문화와의 교류, 수많은 시행착오와 대중의 수용, 영향력 확보 등 많은 필요 요소들이 담보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에만 집착을 하게 되면, 각 문화의 고유함이나 성장 과정은 무시되고 오로지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재적 현상이나 대중성에만 관심을 두는 이른바, 자국문화 우월주의라 할 수 있는 국뽕 현상만두드러질 뿐입니다.
돌이켜보니, 당시 현장 연수를 통해 내가 느꼈던 culture shock 가운데는 현재의 관점으로 보았을 땐 그저 실소가 나올 만큼 하찮은 것도 있습니다. 그만큼 대중문화에 관한 한 우리나라의 발전 속도가 빨랐던 것이고, 이와 더불어 K-food나 K-pop, K-drama처럼 전 세계적으로 대중성을 확보하서 이를 선도하고 있는 영역도 있습니다.New York의 Central Park에서 버스킹 하는 길거리 연주자를 보고 처음 보는 낯선 광경에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낸 것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 우리나라 방방곡곡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이런저런 버스킹이 행해지고 있고, 이는 곧 K-pop의 대중성을 확보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아쉬운 겁니다. 분명하게 드러나 있진 않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차이나 차별성이 두드러졌던 여러 문화적 현상들과 그에 따른 소회를 글로 남기지 못했다는 진한 아쉬움! 오늘 문득, 서가 책꽂이 한쪽에 방치되어 있던 현장 연수 보고서가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두 권의 보고서가 남아 있어서 지난날의 기억을 되살려 줍니다. 미국에서 연수를 받으며 시종일관 압도되었던, 미국 문화의 정신 요람 박물관에 관한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빠듯한 일정의 주중 연수를 마치고, 매주 주말(한국과는 달리, 당시 미국은 주 5일제를 시행하고 있어서 금요일 저녁까지 포함)을 이용하여 여행자로서의 느긋한 여유늘 갖고 미국 동부의 주요 도시들을 둘러보면서 내내 우리가 경탄해 마지않았던 것은 '역사와 전통'에 관한미국인들의 끊임없는 애착과 관심이었다. 미국이 주요 주권국가로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한 이후로, 이 나라의 역사는 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왔지만, 이에 못지않게 험난했던 국가 개척사에 있어서항상 이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대한 집착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인식을 실물적으로 망라해 놓은 것이 바로 박물관인데, 이는 이후 우리가 미국의 주요 도시들을 둘러봄에 있어서 여행의 우선 선택지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줄곧 경탄을 불러일으키면서 부러움을 산 대상이 되었다.
이 같은 연유로, 우리가 여행의 첫 목적지로 삼은 곳은 바로 미국 최초의 도시 문화가 꽃망울을 터트렸던 Philadelphia였다.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우리가 Philadelphia에 도착했던 때는 한창 허리케인이 기승을 부리던 7월 중순 무렵이었는데, 과연 심한 폭풍우 속에 우리를 맞은 새벽 무렵의 Philadelphia는 처연하면서도 장중하기 그지없었다. trolley bus를 타고 둘러본 Independence National Historical Park와 그 밖에 미국의 독립이나 건국과 관련 깊은 사적지들, 예를 들어 American spirit의 상징이기도 한 Independence Hall과 Liberty Bell 등은 그 명성이나 실물을 눈앞에 마주한 것만으로도 미국이란 나라가 스스로 그 실체를 우리 앞에 활짝 드러내고 있는것 같아 한층 더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런데, 불과 220여 년 남짓한 일천한 역사 속에서 항상 미국인들이정신적으로 짓눌려 온 것은,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이런저런박물관을 통해서 그토록 과시하고자했던 역사나 전통에 대한열등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같은 뿌리 깊은 열등감을 단숨에 지워버리려는 듯이들이 심혈을 기울여 건축한 여러 상징적 기념비나유물로 가득 채운 박물관은 규모의 크기나 웅장함만으로도 벌써 우리를 질리게끔만들었다. 이런저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평등을 향한 미국인들의 염원을 반영하고 있는 박물관의모든 전시 유물은 잠시라도 한눈팔지못할게 만들만큼 다양하면서도 관리에 소홀함이 없어 보였다.
Philadelphia에서의 감동을 안고 2주 차 주말을 이용하여 우리가 방문했던 도시는, 미국의 수도이며 세계 정치의 중심이기도 한 Washington D.C.였다. White House와 The Capital, The Lincoln Memorial 등 하나하나의 명성만으로도 미국을 실감해 볼 수 있는 도시, Washington D.C.! 그러나, 미국을 대표할 수 있는 이들 여러 상징물 가운데서도 시종 우리들의 관심을 끈 것은 다양한 테마로 이루어진 박물관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으뜸이랄 수 있는 Smithsonian Institute는 인류 역사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바탕으로16개의 박물관과 미술관, 동물원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 최대의 종합 박물관인데, 국가나 이념, 인종을 초월하여이곳을 찾는 모든 탐방객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Smithsonian Institute에서는 역사유물 전시는 물론, 백남준 비디오 아트를 비롯해서 유명 작가의 현대 미술이나 순수 예술 작품을 두루 전시하고 있는 미술관과, 공룡이나 고대 생물체의 화석을 관람할 수 있는 자연사 박물관, 다양한 항공기와 로켓, 달 착륙선의 실물모형을 관람할 수 있는 우주항공박물관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후로도New York이나 서부 지역 여러 거점 도시들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방문한 도시마다 부러움을 살 만한 박물관이 즐비했는데,나름대로 독특한 특징과 규모를 갖추고 지닌 바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박물관은 미국 청소년들이 갖가지 실물 체험을 통해 American spirit를 고양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교육의 장으로써 국민정신 통합과 이를 선도함에 있어 박물관이그간어떤 역할을 해왔는지는 불문가지의 일일 것이다.
흔히melting pot라 일컬어지는 인종적으로 복합적이고 다원화된 미국 사회가, 어떻게하나로 집적된에너지를 바탕으로 세계의 중심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는지를이번 연수와박물관 탐방을 통해실감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미국 정신의 요람으로서 이들 박물관이 사회 통합 전반에 미친기여도를 하나하나 되돌아보면서, 보람 있는 어학연수와 현장 시찰연수의 기회를 마련해 준 국제교육진흥원과교육부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