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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 풍경

by 박상진

올해는, 아파트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환호공원의 광장이 하얗게 분칠이 될 만큼 눈 내리는 일이 잦다. 내일 새벽부터 다시 눈이 내릴 거라 예보되어 있으니 아침에 눈을 뜨면 잠시이긴 해도 눈 구경을 할 순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난 이틀 사이에 날이 풀려 아침나절이면 쌓인 눈이 녹아버리거나, 오후 들어서 내릴 비에 이왕 분칠을 한 흔적마저 말끔하게 지워질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 바닷길을 걸을 때 데트라포트의 응달진 쪽으로 새하얗게 말라붙은 잔설(殘雪)이 무척 결기(結氣)가 있어 보였다. 며칠 전, 이곳 포항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함박눈이 내렸었다. 한여름 소나기 퍼붓듯 잠시 쏟아진 폭설로 세상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입춘을 사나흘 지난 날씨는 마치 오는 봄을 시샘하듯 올해 들어 가장 쌀쌀하기도 해서, 볕이 들지 않는 그늘진 곳에 쌓인 눈은 드문드문 잔설로 남아 모질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데, 세찬 물보라를 흠뻑 뒤집어쓰면서도 데트라포트가 여전히 머리 위에 이고 있는 설빙(雪氷)은 차가운 겨울 햇살에 반사되어 이를 흘겨보는 눈이 오히려 눈부실 지경이었다. 가는 길을 좀 더 이어가다 보면, 요트 계류장(繫留場) 가까이의 방파제 데트라포트에는 갈매기가 잠시 쉬어가는 휴(休)트라포트가 있다. 물론, 내가 달리 이름 붙인 곳이지만 유독 이곳에는 웃자란 성체(成體)의 갈매기들이 무리 지어 몰려와 얼마동안 머물다 가곤 했었다. 하지만, 허리와 머리 위에 얼어붙은 잔설 때문인지 오늘만큼은 휴트라포트 곳곳이 개점휴업(開店休業) 중이었다. 창백한 햇살에 잔잔히 아롱진 윤슬이 물밀듯 바닷바람에 밀려와 길손 잃은 트라포트를 희롱하고 있다.


사실, 이곳 영일대 해수욕장 들머리에는 지금은 다른 이름으로 영업 중이긴 하지만, 여로(旅路)에 지친 나그네들이 잠시 쉬어가는 휴(休)모텔이 있었다. 바닷가를 산책하다 모텔이 눈에 들어오면, 마치 맞춤옷처럼 잘 지어진 이름이라는 생각되어 일부러라도 한 번쯤 쉬어가고픈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모텔 이름과 함께 건물 외관(外觀)이 화려하게 바뀐 뒤로는 오로지 성인 모텔 고유의 음습(淫濕)한 기운만이 돋보였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 영일대 해수욕장에서 휴식을 위한 진정한 공간은 휴트라포트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다. 잠시 내리다만 눈이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건너편 도로의 인도 블록만 그저 희끗할 뿐, 가로등 불빛을 품은 도로의 노면(路面)은 막 내리기 시작한 진눈깨비로 다시 젖어들고 있었다. 오늘은 제대로 된 눈 구경을 하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자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이부자리의 따스한 품속이 다시 그리워졌다.


깜박 졸았던 새벽잠에서 깨어난 것은, 거실 구석구석까지 새날의 기운이 밝게 스며든 여전히 이른 아침이었다. 여덟 시에 오픈하는 동네 커피숍에 맞춰 먼저 분리수거나 해둘 작정으로 빈 박스에다 재활용할 물건을 골라 담았다. 아파트 문밖을 나서 잔뜩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니, 씨알 굵은 진눈깨비가 분주하게 허공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 잠시 온기(溫氣)를 품었던 새벽 공기가 볼이 얼얼할 만큼 순식간에 냉랭해지더니, 재활용 창고 쪽으로 몇 발짝 떼지도 않았는데 그새 함박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눈앞을 마구 헤살 대던 성긴 눈송이는 슬쩍 불어 온 바람에 떠밀려 저만치 날아가더니 화단 건초더미 위에 살포시 몸을 실었다. 슬금슬금 쌓인 눈송이로 새하얗게 막 분칠을 시작한 울타리 너머 동백은, 빨갛게 익어가는 꽃망울이 마치 새색시 입술인 양 새초롬하니 열릴 듯 말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나지막이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래층 꼬마아가씨가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반달 같은 눈웃음이 어여쁘기도 하지만, 긴 겨우내 처음으로 만난 사실이 반가웠던지 아이의 눈꼬리가 저도 모르게 오르락내리락거렸다. 이른 아침부터 어딜 가느냐고 물었더니, 방학 중 방과 후 교실로 요리를 배우러 간다고 한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에 지나지 않는데 방학 중에 학교에서 요리까지 배운다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만, 그저께 있었던 대전의 김하늘 양의 죽음과 오버랩되어 걱정스러운 마음과 함께 안타까움이 따르긴 했지만, 새나라의 어린이답게 아침 일찍 일어나 씩씩하게 제 할 일을 다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절로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두 잔의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막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건너편 아파트 저만치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나어린 오누이의 모습이 심상찮아 보인다. 쏟아지듯 내리는 눈이 쌓일 겨를도 없이 녹고 있기는 해도 바닥이 미끄러울 은 분명할 텐데, 달음박질하는 오빠를 쫓아 킥보드를 타고 뒤따르는 아이가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인도 위로 올라서는 경계의 턱이 높기도 하거니와, 보도블록 사이의 틈새가 어긋나고 훼손되어 있는 곳이 많아, 자칫하면 킥보드의 바퀴가 블록의 이음새 안으로 끼어들 수도 있어 위험천만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쯤은 의당 알고 있다는 듯 앞서가던 오빠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내달리다가는 잠시 멈추어 서서 뒤따르고 있는 동생을 기다려주곤 했다. 그러고 나서, 아파트의 동과 동이 갈라지는 샛길에 이르러선 다시 잰걸음으로 아이에게 되돌아오더니, 킥보드 핸들을 슬쩍 위로 추켜올려주었다. 아마, 달려오는 탄력에 못 이겨 자칫하면 곤두박질이라도 칠까 봐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서너 살 아래 여동생은, 방과 후 교실을 가야 하는 오빠를 따라 발끝까지 닿는 롱패딩을 서둘러 입고 함박눈 내리는 집밖으로 뛰쳐나온 게 틀림없었다. 그 순간, 맑고 밝은 오누이의 웃음보가 한꺼번에 터지더니 여운이 긴 메아리가 되어 아파트 외진 구석까지 골고루 스며들었다.


펄펄 함박눈으로 내리던 눈은 얼마 안 있어 그쳤다. 일기예보대로, 비에 섞여 간간이 내리던 눈이 잠시 사이를 두고 드문드문해지더니 점심을 먹고 난 이후로는 굵은 빗줄기가 되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올해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함박눈이 마침내 끝을 보인 것이다. 아파트서 내려다본 공원 광장과 아파트의 공터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희끄러미 남아있던 눈 내린 자취가 지금은 깜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그렇긴 해도, 바닷길 휴트라포트에는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의 흔적이 이전까지 얼어붙은 설빙과 함께 여전히 잔설로 남아있을 것이다. 펄펄 내리는 눈발 사이로 힘찬 날갯짓 하며 비상(飛翔)했을 갈매기들이 오늘만큼이라도 휴트라포트 위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문득, 이른 아침 함박눈을 맞으며 해맑게 웃던 아이들과 함께 동요 '펄펄 눈이 옵니다'의 노랫말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까마득히 멀리 있는 기억 속에서 펄펄 내리는 눈을 맞으며 동구밖을 뛰쳐나가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내가 보인다.

펄펄 눈이 옵니다
바람 타고 눈이 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송이송이 하얀 솜을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하얀 가루 떡가루를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자꾸자꾸 뿌려줍니다

동요 '눈(펄펄 눈이 옵니다)'

https://youtu.be/1R6YPFbnlpE?feature=shared


눈이 내리기 시작한 아침 풍경
길손이 찾아 온 휴트라포트
바닷길 방파제의 데트라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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