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겨울 바다는 쓸쓸하다. 오는 봄을 눈앞에 두고는 늘 그랬다. 아침 댓바람에 바닷가로 길을 나서면, 야멸차게 불어오는 맞바람이 잘 벼른 칼날 같아서 콧잔등이 시리다 못해 얼얼하다. 아직은 어둠이 깊어서인지, 바닷길을 걸어 두무치 마을에 이르는 둘레길로 접어들 때까지도 사람들의 행적(行跡)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실은, 이른 아침에 집밖으로 나선 것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며칠째 한파(寒波)가 이어지기는 했지만, 겨우내 게을러진 몸이 조바심만 앞세우는 속마음을 시적시적 따라주질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눈을 뜨자마자 나들이 행장(行裝)을 꾸렸다. 귀마개를 대신할 헤드폰에 넥워머를 목에 두르고, 막내가 제대(除隊)할 때 갖고 나온 가죽장갑에다 바람막이 다운재킷까지 걸치자 이른 아침의 칼날 같은 바닷바람을 맞아서도 온몸이 거뜬했다.
길을 걷다 되돌아보니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 너머로 서서히 동이 트고 있었다. 가끔씩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크게 한번 바다가 술렁였지만, 적홍색(赤紅色) 햇살이 노을 진 먼바다는 여전히 적적했다. 방파제 가까이로 바지런히 밀려온 파도가 데트라포트 허리춤에 세차게 부딪치자 파르라니 물보라가 일었다. 발아래 아스팔트까지 축축이 젖어있는 것으로 미루어 온 밤새 바다가 몹시 거칠었던 것으로 보였다.
영일대 해상 누각(樓閣)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주변이 어수선했다. 오후에 날이 풀려 재차 집밖으로 나선 발걸음이었다. 네댓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길 양쪽으로 나뉘어 누각 입구를 막아서 있었고, 이들을 둘러싼 몇몇 사람들의 얼굴 표정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바닷가를 걸을 때는 영일대의 누각 아래 앉아 잠시 쉬어가곤 했으므로, 이들이 길을 통제(統制)하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왜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겁니까?"
무전기를 든 청년은 거듭되는 질문이 성가신 듯,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 지금 누각 위에서 드라마를 촬영 중입니다. 이제 촬영이 거의 끝나서 장비(裝備)를 철수하고 있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 말을 듣고서야 실눈을 뜨고 바라다본 누각 위로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이리저리 굼실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입구를 막아선 가림막을 걷히자, 누각 저쪽으로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길밖으로 쏟아져 나와 맞은편 광장에서 대기 중이던 버스에 올랐다. 혹시라도 알만한 연기자가 있을까 싶어 까치발을 들고 살펴보았으나, 배우일 듯 보이는 사람들 대부분이 두터운 패딩으로 몸을 감싸고 있어 남녀의 성별조차 구별하기 힘들었다.
마침, 누각 위에는 마지막까지 남아서 촬영팀의 마무리를 지휘하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아래층 기둥 아래에 일행이 모르고 두고 간 촬영용 장우산(長雨傘)이 있어, 이를 건네주며 지나치는 말로 넌지시 물었다.
"어느 방송국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입니까? 드라마 제목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JTBC에서 8월 이후에 방영될 예정이지만, 드라마 제목은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그런데, 자칫했으면 이 우산, 내버려 두고 갈 뻔했는데 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촬영팀까지 모두 물러나자, 누각 주변을 서성이고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사실, 오늘처럼 평일 오후의 나른한 시간, 영일대 누각 아래층은 온통 비둘기 세상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난 뒤끝이어서인지 그처럼 흔히 보이던 비둘기가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오히려 생경(生硬)스러웠다. 그런데, 썰물 빠지듯 사람들이 일 시간에 다시 누각을 비우자 어느샌가 날아든 비둘기들이 누각 좌대(座臺) 아래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뒤뚱 걸음하고 있다.
비둘기는 내륙의 산간지역이나 해안 가까이의 섬이나 절벽, 그리고 농촌이나 도시할 것 없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텃새이다. 이에 비해, 갈매기는 주로 동해안과 남해안 하구(河口) 등 해변가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로, 혹한(酷寒)의 겨울철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두루 관찰할 수가 있다. 그런데, 포항과 같은 해안 도시에서는 비둘기나 갈매기의 야성(野性)이 사람들에 의해 길들여져 이 둘을 서로 구별하기 힘들 때가 있다.
오후 들어 날이 풀려서인지, 영일대 해수욕장은 모처럼만에 사람들로 붐볐다.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는 몇몇 아이들 손에는 새우깡 봉지가 쥐어져 있고 갈매기떼가 그 꽁무니를 쫓고 있었다. 덩달아, 인도(人道)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던 비둘기 몇 마리도 갈매기 무리 속에 섞여 들지만 아무래도 힘이 부쳐 보였다. 마침, 발아래를 지나던 비둘기 몇 마리도 새우깡 봉지를 든 아이를 발견하고는 뒤뚱뒤뚱 잰걸음으로 바지런히 그 뒤를 따랐다.
오늘처럼 영일대 바닷가에서는, 비둘기와 갈매기가 사람들 가까이서 뒤섞일 때가 있다. 이럴 때 이 둘은, 마치 종(種)이 다른 한 개체(個體)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른바, 어느 쪽에서 보든 비둘매기가 되는 것이다. 단, 이들이 터를 잡는 경계는 서로 분명해 보인다. 즉, 도로 가까운 보도(步道) 블록 위를 분주하게 나돌아 다니다 기분 내키면 바닷가 모래사장 위로도 거침없이 내딛는 쪽은 비둘기이다. 갈매기는 주로 얕은 바다 위를 자맥질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가, 젖은 날개깃이라도 말릴 때면 어김없이 널따란 백사장이나 데트라포트에서 제자리를 잡는다.
비둘매기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사람들과 가까운 곳, 모래사장 위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다만, 지나치게 사람들과 가까워지다 보면 그나마 남아 있던 야성이 사라지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결국, 생존을 위해선 스스로 먹잇감을 해결하지 못할 땐 어쩔 도리 없이 야생에서 도태(淘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들에 의해 살찐 비둘매기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그래서, 잠시 궁금했다. 이들이 사람들과 가까운 세상에서 꾸고 있는 꿈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과연 꿈을 꾸기는 하는 것일까? 이들을 뒤로하고 영일대 광장에서 한참 멀어질 때까지, 비둘매기의 구성진 울음소리가 줄곧 귓전을 "구르륵, 구르륵" 구슬프게 맴돌았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 사거리에서 환호공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GS The Fresh가 있다. 중소 규모의 이 마트는 아파트가 들어설 무렵부터 주민들과 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편의(便宜)를 위해 여태껏 큰 기여를 해 왔다. 아울러, 내가 바닷길을 걷거나 공원의 등산로를 산책하고 돌아올 때면 주전부리 하나라도 챙겨 오곤 하는 곳이다. 그런데, 달포 전에 폐점 안내문이 출입문에 내걸린 것을 보고는 그만 맥이 풀렸다. 마치, 남들 몰래 숨겨 놓은 소중한 보물창고 하나를 도둑맞은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 40%까지 할인한다는 공고문이 내걸린 것은 열흘 전부터였지만, 그런 미끼 상품의 유혹에 아랑곳없이 거의 매일처럼 마트를 들락거렸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영영 추억의 장소로만 남아있게 될 이 공간이 갑자기 소중해져서였다.
오늘은 유산균 요구르트와 과일 주스를 종류별로 각각 두병을 샀다. 사실, 마트에서 물건이 빠지는 데에도 순서가 있었다. 브랜드 가치가 높은 유명 제품이나 유효기간이 넉넉한 제품은 할인을 않거나 다른 매장에서 판매를 하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고 없었다. 육류나 해산물처럼 매일매일 선도(鮮度)를 유지해야 하는 농수산물은 평상시와 같이 저녁때가 되어서야 할인율이 더 커졌고, 재고 처리를 위해 40%까지 할인을 했다. 그동안 전혀 눈에 띈 적이 없던 콘돔이나, 내복과 같은 간편 의류, 판매 시일을 넘긴 채소나 과일, 20kg 포대 쌀과 파스타나 국수 같은 면류, 잡다한 음료수와 봉지 과자 만이 계산대 앞 매대(賣臺)에 나뉘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나머지 매장 안 제품 거치대나 매대는 며칠에 걸친 할인행사로 인해 휑하니 비워져 있었다.
계산대 앞에 서니 낯익은 캐셔 아주머니가 가벼운 목례(目禮)로 인사를 건넸다. 잠시 망설이다, 며칠째 마음속에다 쟁여둔 말을 꺼냈다.
"이곳이 폐점(閉店)을 하면 가까운 매장으로 고용이 승계(承繼)가 되나요?"
매장 관리자를 제외하면 캐셔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직원들이 계약직이란 사실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 만큼은 꼭 물어보고 싶었다. 앳된 얼굴의 캐셔 아주머니가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자리가 나는 대로 본인이 원하는 매장으로 고용 승계가 되기는 해요. KTX 포항역 가까운 곳의 신설 매장으로 갈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전 당분간 쉬려고 해요. 그동안 잠시 쉬지도 못하고 줄곧 일만 해 왔거든요."
흐릿하게 미소 띤 얼굴에서 어쩐지 슬픔이 묻어났다. 몸에 잘 맞는 옷처럼 익숙하던 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거나 낯선 공간에 둥지를 터야 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과연 어떠할까? 문득, 조금 전까지 귓전을 맴돌던 비둘매기의 울음소리가 다시 머릿속에서 되살아 났다. 어쩌면, 우리 인간들도 태생적(胎生的)으로 보자면 비둘매기의 운명을 타고나지는 않았을까. 자신에게 익숙한 제약(制約)과 편리한 틀 속에서는 야성이 숨을 죽이고 있지만, 다시 본연의 열린 세상으로 내던져질 때는 스스로 어떤 꿈을 꾸고자 하는 것일까?
올해 늦겨울은 유독 쓸쓸했다. 봄이 가까울수록 지난겨울이 더욱 마음에 시렸다. 하지만 며칠 사이에 날이 풀리고, 하루가 다르게 밤은 늘그막이 익어간다. 그리고, 세상모를 어디선가 "구르륵, 구르륵" 비둘매기 구슬프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