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강노랑 Sep 26. 2021

위드 우울증 프로젝트(1)

때로는 멀게 다른 날엔 너무나 가까운

코로나로 인해 삶이 망가지고 많은 선진국가들은 위드 코로나를 발표했다. 우리나라도 위드 코로나를 할 거라는 얘기가 늘 나오고 있고 최근엔 뉴스까지도 나타나면서 코로나는 결국 독감처럼 우리가 평생을 가지고 가는 바이러스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다른 질병을 안고 가고 있다. 바로 우울증이다. 물론 정확하게 진단받은 적은 없다. 다만, 우울증이 아니고서는 이 깊은 무기력감과 우울을 설명할 수 없기에 자연스레 우울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병원을 갈 생각도 있었다. 상담을 한 번 받아본 적도 있었으나 월급 받고 술 마시고 남는 돈은 고작 몇 천 원 그 돈으로 내 정신상태를 감정하기엔 검사비용이 만만하지 않았기에 상담과 약은커녕 그저 ‘위드 우울증’으로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언제부터 우울증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처음 내 앞에서 자살을 시도했을 때부터? 지옥 같던 고등학교 3년? 서울살이가 시작되고 찾아온 무기력감? 정확한 날짜를 말할 수 없는 건 내가 오랫동안 우울과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보니 나는 우울이 내게 달려있었고 그걸 떼어놓기엔 나는 너무 힘들었고 참고 자라니 결국 내 일부가 된 우울을 나는 아직도 앓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우울증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내가 우울증이 있다고 자각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다. 지독한 불면증에 벗어나지 못하고 매일 밤을 새우며 공부하고 나를 스스로 몰아가며 생활을 하면서도 무기력감이 나를 감싸고 있어 그 어떤 의욕도 없었다. 오로지 서울에서 살겠다는 그 목표가 나를 살게 했던 거 같다. 자해도 했었다. 손목에 커터칼을 그었는데 생각보다 잘 베이지 않아 지금은 손목 주름이랑 거의 비슷한 얕은 흉터 정도만 있다. 그다지 심각하다고는 생각을 못했다 가끔은 차도에 뛰어드는 상상도 하고 육교를 건널 때면 떨어지자는 생각을 수십 번 했지만 서울만 올라가면 뭐든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악착같이 버틴 고등학교 3년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도 우울증의 효능이 아닐까. 사람의 뇌는 너무 힘든 기억은 잊게 해 준다는데 더듬더듬 기억하자면 난 매일 울고 있었던 거 같다. 누군가 나를 죽여줬으면 하는 생각을 매일 하며 등하교를 했던 거 같다.


서울살이가 시작되었지만 나이로는 19살이라 술, 담배 모두 하지 못했다. 착실하게 나름 대학교를 다녔고 외부 활동도 많이 했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지독한 불면증은 여전해서 출석을 하기가 어려웠고 부족한 용돈을 채우기 위해 밤에도 아르바이트를 했고 자연스레 나는 점점 학업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위염과 식도염으로 인해 야간 응급실 이용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쓰러지기까지 하자 용돈과 아르바이트 시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병원비가 자퇴를 이끌게 했다. 성년이 되어 자퇴를 하고 술을 시작했다. 매일 술을 마셨다. 자퇴 전에는 술을 마시며 과제를 했고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엔 친구들과 술 마시기 바빴다. 매일 술에 빠져서 사니 위는 버티지 못하고 나를 더 아프게 했고 의사 선생님과 매일 보게 되면서 술 대신 담배를 시작했다. 위가 아프지도 않았고 술보다는 비싸지만 담배는 개수가 많아서 한 번 사면 오래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담배를 하니 술이 생각났고 술을 마시면 담배 생각이 나는 굴레에 빠져 약 1년을 술과 담배에 의존하며 살았다.


술과 담배에 의존하면 정신상태라도 괜찮아야 했는데 난 매일 울었다. 밤마다 누구든 붙잡고 울었고 매일 나를 저주하고 내가 태어난 것을 괴로워하고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을 비난했다. 울다 쓰러져서 일어나면 낮이다. 배가 고파도 밥을 먹을 힘이 없어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다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와 술을 마시고 또 울고 잠들고 이런 생활을 반복하니 눈은 매일 쓰라리고 건강은 더 나빠져서 밥만 먹으면 토하는 때도 있었다. 누군가 옆에 있어주길 바래서 애인도 사귀었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늘 헤어졌었다. 헤어지면 이런 상태인 나를 또 비난하며 잠들었다.


그러다 문득 친구들과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 해외는 처음이었고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신나게 놀았고 내가 너무나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병원에 상담을 받아서 약을 먹으라는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였지만 주 1회씩 나가는 약값도 걱정이었고 상담의 문턱을 넘어서기엔 아직도 조금 두렵다. 여행을 다녀온 후 내가 원하는 것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저 평범하게 월급 받고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돈을 쓰고 돈을 모으며 여행도 가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조금 더 삶이 윤택했으면 했고 소소하게 살다가 죽고 싶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죽고 싶었지만 앞에 붙은 말들이 많아졌기에 나는 조금씩 힘을 내기로 했다. 술을 제일 먼저 줄였다. 술을 줄이니 담배도 줄었지만 여전히 많이 하기는 했다. 아르바이트보다는 직원, 정규직을 통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과 돈을 모으고 싶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면서 나는 중소기업에 취직을 했다.


여전히 나는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매일 밤마다 울던 버릇을 고치기 위해 억지로라도 잠을 자고 영화를 매일 보고 잤다. 그렇게 나는 한 달에 한 번만 크게 울었다. 이유는 없다 슬픈 영화나 영상을 보고 크게 울기도 하고 아무것도 안 하다가 갑자기 울 때도 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과 눈 마주치는 것이 어려워졌다. 직업 특성상 눈을 마주쳐야 했지만 눈만 보면 숨 쉬기가 너무 힘들었고 지금은 정도가 약해졌지만 여전히 우울이 심할 때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특히 거울에 비치는 나 모습을 보는 타인의 시선은 더 견디기 어려웠고 생각도 비관적이고 극단적이지만 죽고 싶다는 생각은 덜하게 되었다. 겉으로는 티가 전혀 나지 않겠지만 속으로는 내 자신을 계속 채찍질하고 비난하고 있다. 자존감은 떨어져 남 눈치는 여전히 많이 보고 생각은 더 많아졌다. 전에는 도전을 즐겼지만 이제는 도전을 즐기지 않는다.


그렇게 내 위드 우울증 프로젝트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보면 내가 한 달을 간신히 버텼다는 증거였고 차도를 보며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도 나 자신을 스스로 헐뜯으며 매일 상처를 주고 결론은 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난 살아가고 싶어서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게 하며 어쩔 땐 여행을 가고 하고 싶은 것들, 사고 싶은 것들을 하며 스스로에게 보상을 주기도 한다. 우울증을 조절하면 그저 우울이란 감정만 남을 줄 알았는데 정도가 약해질 뿐 나는 여전히 우울증을 가지고 있다.

떼려야 뗄 수 없지만 거리를 둘 수는 있는 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작가의 이전글 레스토랑과 면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