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코스 : 정동진역 - 안인해변. 9km
해파랑길 36코스는 정동진역에서 안인해변까지의 해발 339m의 괘방산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산길이다. 9.5km의 짧은 구간이지만 등산을 해야 하는 코스로 난이도가 높은 편이다. 등산에 자신이 없는 이라면 바다쪽으로 난 길을 걸으면 된다. 구간도 9km로 짧고 시간도 훨씬 짧게 소요된다.
드라마가 문화로 자리 잡은 곳(정동진역 - 남침 사적탑)
정동진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모래시계 소나무가 있다. 정동진은 관광이라는 측면에서 '모래시계'라는 드라마 때문에 유명해진 곳이기 때문에 드라마와 관련 있는 이 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더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모래시계는 1994년에 최민수, 고연정, 박상원, 이정재 등을 비롯한 쟁쟁한 배우들이 나온 드라마로 최고 시청률 64.5%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보였다. 소나무는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과 함께 출연(?)한 덕에 관광객들이 모래시계 소나무를 보기 위해 찾아오기 시작했고, 정동진을 유명 관광지로 만들어 주었다. 모래시계 드라마가 방영된 지 25년이 넘었지만 소나무의 키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연륜이 묻어 나올 정도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역을 떠나 바닷길로 접어든다. 해파랑길의 코스를 따라 한번 걸었기 때문에 이번 해파랑길은 해안길을 중심으로 걷고 있다. 그리고 이미 몇 번씩 걸어 본 경험을 보태 새로운 코스를 찾아보겠다는 개인적인 욕심도 있다. 길의 노선은 언제나 같을 것 같지만 환경의 변화나 편리성, 경관, 관리, 이야기 등에 의해 바뀌게 된다. 길의 노선이 변하게 되는 다양한 원인들 때문에 길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들처럼 생명력을 갖게 된다. 해파랑길 36코스의 산길이 힘들긴 하지만 괘방산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풍경과 안목항 일대의 전경 등은 매우 아름답다. 산길을 좋아하거나 체력이 있는 분들은 산길을 가보시길 추천한다.
해변의 철길 옆에는 가이츠카향나무가 빽빽하게 식재되어 있다. 철로변에 식재하는 나무들은 대개 기차가 지나면서 내는 소음을 줄이기 위해 식재하는 방음수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겨울에도 낙엽이 지지 않는 상록수를 식재하는데 향나무, 사철나무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많지 않은 한적한 역이나 철로변에는 소나무 외에도 이팝나무, 메타쉐콰이어, 벚나무 등을 심기도 한다. 봄철이면 벚꽃으로 유명한 창원의 경화역 주변에 벚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바다쪽으로 가는 길은 평탄하고 무난하다. 해안의 곰솔숲 앞에 있는 서낭당 주변에 관광객들이 작은 돌탑을 여러 개 쌓아 놓은 등명해변을 지나면서부터 경사로가 시작되어 남침 사적탑과 하슬라아트월드를 지나는 길이 경사지지만 걷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다.
안보의 현장을 걷다(남침 사적탑- 등명낙가사-강릉 통일공원-안인해변)
남침 사적탑은 6.25가 발발하기 한 시간 전에 북한군이 등명해안에 침투한 것을 증언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우리는 6.25 전쟁의 발발하면 38선을 먼저 떠올리지만 전쟁이 처음 발발한 곳은 38선보다 더 남쪽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적탑에 있는 조각물 중 사람을 죽이는 조각물은 단순한 조각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잔인함을 소름 끼치도록 느끼게 한다. 이 나라에서 이제 동족 간의 싸움은 영원히 사라지길 기도한다. 사적탑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하슬라 아트월드를 지나면서부터 길은 내리막이다. 등명낙가사의 너른 앞마당을 빠르게 지나 바닷가로 나선다. 바닷가의 길은 자전거도로 덕분에 편하게 길을 갈 수 있다. 하지만 몇 군데에서는 자전거도로가 길과 겹쳐져 있어 걷기가 위험해 철조망과 도로 사이의 좁은 공간을 따라 걸어야 한다. 그렇지만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바다의 절경은 덤이라기엔 너무 아름답다.
바닷가에 터를 닦고 함정을 전시해 안보교육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강릉시 함정전시관에 도착한다. 전시관으로 쓰이는 함정은 2차 세계대전 때부터 미국의 군함으로 쓰이다 1972년 우리나라에 인도되어 1999년까지 현역으로 뛰던 전북함이라는 이름의 군함이다. 이 군함이 퇴역한 후 전시관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최근에는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수가 감소하고, 유지보수비가 많이 들자 강릉시는 이 전함을 군에 반납하고, 코로나 이후 새로운 관광체험 시설을 짓는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에 따른 사람들의 관심과 경제적인 이유가 이곳을 바뀌게 하고 있다. 이곳에는 1996년 강릉의 안인진리에 침입했던 잠수함과 북한에서 타고 남하한 뗏목선도 함께 전시하고 있으니 이 시설들이 사라지기 전에 꼭 가보시라고 말하고 싶다. 이곳은 우리에게 휴전선에서 먼 해안을 왜 군인들이 밤잠을 자지 못하면서 지키고 있는지 깨닫게 해 준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해안이라 해도 낮에는 민간인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또 왜 그런지 생각을 해볼 수도 있는 곳이다.
부지런히 걸었는데도 통일공원 앞에서 해가 저물고 말았다. 이 구간은 밤에 걷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다. 될 수 있는 한 차들이 안지나 갈 때를 기다려 가면서 안인해변에 도착하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는 식사를 할 곳과 잠잘 곳만 찾으면 된다. 다행히 석촌이라고 하는 한식뷔페집이 문을 열어 들어갔더니 다른 손님은 없고 나 혼자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오늘은 세 구간을 무리해서 걸었더니 배가 많이 고팠다. 국수와 밥을 한 공기씩 떠다 배가 차게 먹고 안인해변의 파도소리가 들리는 모텔에 숙소를 잡았다. 방 안에 있어도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이곳에는 화력발전소와 관련해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 모텔에 장기 투숙하는 손님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옆방에도 사람들이 자는 모양인데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 한잔 하면서 끊임없이 떠들었다. 잠귀가 얕은 편인 나는 몸은 피곤한데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새벽까지 창문을 열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소리에 위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