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해파랑길, 바다와 생활

13코스 : 양포항 - 구룡포항. 19.4km

by 물냉이

해파랑길 13코스는 바닷가를 걸으며 바다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한 어촌문화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 해파랑길 13코스 끝에 만나는 구룡포항이 가장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구룡포항까지 가는 길에는 알리기보다는 숨기고 싶은 자연과 사는 이야기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바다에 의지한 삶(양포항-신창 간이해변-일출암-영암 방파제)

포항시내에서 잠을 자고 부지런을 떨어 양포항으로 왔다. 혼자 걸으면서 숙소는 적당한 곳에서 자는 게 멀리 이동해 잠을 자는 것보다 훨씬 덜 피곤하지 않느냐고 묻는 이도 있다. '그러게'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너무 시끄럽거나, 춥거나, 침대보가 깨끗하지 않은 곳에서는 몸과 마음이 편치 않다. 물론 대충 잘 수 도 있다. 하지만 내 돈 내고 내가 자는 숙소라면 굳이 불편함을 참아가며 자고 싶지 않다. 날은 쌀쌀하지만 햇살이 가득한 날이다. 양포항을 지나 만난 양포위판장에서는 매일 아침 활어 경매가 이루어진다. 오늘은 너무 늦게 도착해서 인지 작업이 다 끝난 텅 빈 선창을 햇살이 채우고 있다. 위판장 옆 양포근린공원을 지나면 호젓한 길이 나온다. 여기 바닷가부터는 퇴적암인 이암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이암 중에는 신생대에 형성된 화석들이 많아 연구자들에게는 포항의 이암이 분포하는 해안가는 화석의 보물상자와 같은 곳이다. 화석도 식물, 곤충, 동물 등 특정 생물군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생물의 화석이 나온다. 포항은 혼자 걷는 여행자의 발길을 가장 많이 잡는 곳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자연경관뿐만 아니라, 신생대의 화석, 식물, 다양한 어촌문화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한창 공사 중인 창바위공원을 지나 신창 간이해변을 걷는다. 해변의 폭은 좁지만 겨울 파도가 밀려와 만들어내는 하얀 포말이 해수욕장을 반쯤 채운다. 그동안은 날씨가 좋아 파도가 그리 높지 않았는데 포항 경계를 넘어오면서부터 파도의 높이가 점점 높아진다. 겨울에 걷는 해파랑길에서 만나는 높은 파도는 여름철에는 볼 수 없는 강함과 거침이 있다. 요즘처럼 개발에 의해 살아 있는 생태계가 계속 줄어드는 시대에, 한 겨울 해파랑길에서 만나는 거친 파도는 해파랑길을 겨울에 걸을 때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해변이고 길이고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데 길가엔 생선을 높이 매달아 말리고 있다. 오징어와 멸치도 건조대에서 함께 말리고 있는데 사람의 손을 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생선의 보관법 중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말리는 것이다. 썩을 수 있는 내장을 제거하고, 살에서 수분을 빼내는 것. 소금을 뿌려 염장을 할 수도 있지만 짜지 않은 살을 오래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포기할 수 없는 방법이다. 사람이 살며 어떤 일이고 오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썩지도, 짜지도 않으면서, 수분 같은 감정을 살짝 말려버린 삶의 철학을 지킬 때 가능한 게 아닐까.

아침햇살이 가득한 양포 위판장
밧줄이 묶여 있는 창바위 주변에는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어 번잡하다
해안가에서 높이 매달아 말리는 생선(우)

어영부영 일출암이 있는 장기천하구에 도착했다. 문장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그는 친일 행적으로 자신의 업적에 먹칠을 했다. 어쨌든 그는 장기천하구의 일출을 조선십경(十景) 중의 한 곳으로 뽑았다. 지금도 낡은 안내판에 그의 이야기가 적혀있다. 장기천하구는 최근 몇 년 동안 심하게 몸살을 앓고 있다. 둔치가 없는 하구에 둔치를 조성하더니 땅이 굳어지자 차들의 주차장이 되어가고 있다. 하천은 하천의 땅이 있고, 바다는 바다의 땅이 있다. 최근 하천이나 바다 같은 공유지의 형태를 변경하거나 공유지를 불하해 사유지화 한 후 건물을 짓는 행위들이 많아지고 있다. 자연이 자신의 땅을 되돌려 달라고 할 때 생기는 피해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다.

영암 1리로 넘어가는 산길에서 로프를 씹어 먹은 소나무를 만났다. 끊어진 끈들은 소나무에 박혀 바람에 삭아가고 있었다. 사실 이건 소나무가 씹어 먹은 것이 아니다. 나무에 무언가를 매달 때 용수철 기능이 있는 철사줄을 사용할 때가 있다. 나무가 자라면서 용수철을 밀어낸다는 것인데, 나무는 용수철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성장하면서 삼켜버린다. 그 과정에서 나무 조직이 수피의 원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상처를 입게 된다. 약하게 묶어 두었다고 부담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이 나무이건, 동물이건, 아니면 관계이건 간에 잘 생각해 볼 일이다. 바닷가 절벽의 소나무가 보여주는 교훈이다. 영암리에는 해파랑길을 걸으면서 꼭 보고 갈 필요가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첫째는 영암 1리의 집 마당에 있는 관암이다. 관암은 옛날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가 갓을 풀고 쉬다가 갓을 잊고 그냥 가버렸는데, 선비가 놓고 간 갓이 바위로 변했다. 이 바위는 매일 해가 뜰 때마다 조금씩 자라났는데 사람들이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효험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바위를 영암(靈巖)이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영암이라고 바꿨다 한다. 남의 집안으로 들어가 바위를 본다는 게 망설여졌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개 두 마리가 짖어댄다. '반기는 거겠지.' 영암 2리에는 팽나무 두 그루가 있는 곳에 제를 지내는데 요즘은 근처에 있는 절에 동제를 맡긴다고 한다.


일출암의 동편으로 해가 높게 떠올랐다.

밧줄을 머금은 소나무는 몸으로 고통을 보여주고 있다.
일출암의 아침 풍경(좌), 줄을 먹은 소나무(중)와 멀리보이는 영암포구(우)
영암2리의 팽나무가 자라는 서낭숲(좌)과 영암3리의 소나무가지를 엮어 세운 당나무(우)
집 안 마당에 자리잡고 있는 갓바위. 개가 짖어대 오래 감상할 수는 없었다.

두 번째로 봐야 할 곳은 영암 3리의 길가에 있는 당나무이다. 영암 3리의 수용포마을은 다른 지역과 달리 마을의 신당을 바닷가 길가에 세워 놓는다. 신당의 형태도 남다른데 소나무 가지 여럿을 묶어 하나의 통나무처럼 만들고 금줄을 둘러놓았다. 박창원*의 글에 의하면 포항지역의 당은 당나무, 당나무와 제단, 바위, 당나무와 당집, 당나무와 바위, 하천 바닥에 제단을 쌓는 경우 등이 있다고 한다. 수용포마을의 당나무는 전설이 있다.

'옛날, 지금도 그렇지만 수용포마을은 어업이 주업이었다. 어느 날 마을 앞바다로 소나무 한그루가 떠밀려 왔다. 배가 다니는데 방해되는 나무를 다른 곳으로 치우면 다시 밀려오기를 반복해 사람들은 소나무를 꺼내 마을의 당목으로 모시고 제사를 드렸다. 그러자 고기도 잘 잡히고 마을이 평안해졌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매년 솔가지를 새로 꺾어다 당목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원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인데, 이 마을은 전설의 형태로 마을의 신화를 지키고 있으며, 당나무를 섬기는 모습도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지금도 마을 주민들이 파도나 해일이 높아도 마을을 지켜주는 당나무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다.


* 박창원. 2008. 동해안 민속-장기 수용포 마을의 신앙. 경북매일신문. 2006.6.9자 기사


하나를 봐도 생각이 다르다(영암 방파제-대진리-구평 포구)

영암리를 지나 대진리로 접어들면서 방파제를 만난다. 이 길을 겨울철에 지날 때에는 신경을 써야 한다. 방파제 밖의 파도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언제 파도가 넘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름이면 그냥 물에 씻어버리면 되는데 겨울철에는 옷이 젖어 춥고 소금물의 꿉꿉함이 길을 걷는 동안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도를 안 맞으려 눈치를 살피고 재빠르게 걷는 건 놀이 같아 재미있다. 오늘은 잘 지나가나 했는데 마지막에 뒤편으로 넘어오는 파도에 약간 젖었다. '뒤에서 때리는 건 반칙이야.'

대진리의 바닷가에 짓고 있는 고층의 리조트 때문에 오징어 건조장은 바다를 볼 수 없다. 그래도 겨울 햇살이 강한 덕분인지 오징어들은 잘 말라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 오징어는 앞으로 '뒷골목 오징어'라고 불러야 하나. 바닷가에 지어진 펜션들 덕에 펜션 손님이 아니면 바다로 나갈 방법이 없다. 해수욕장은 있는데 접근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이곳은 최근에 지은 건물들이 거의 모래사장 위에 얹혀 있다. 누가 바다를 땅이라 하고 지번을 부여하고 팔아먹었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대화천의 하구 모래톱에 앉은 갈매기들은 파도에 등을 돌린 채 바람을 견디고 있다. 대화천하구는 모래톱이 쌓여 바다로 가는 물길을 막는 '닫힌하구' 일 때가 많은데 오늘은 물이 넘쳤다 말았다 한다. 이러다 물이 더 많아지거나, 갑자기 불어나면 자연스레 하구와 바다가 연결되는 '개 터짐'현상이 일어난다. '이럴 땐 빨리 건너는 것이 최선이다.'

파도가 넘어오는 대진리 방파제, 제방이 높아 파도를 보지 못하니 넘어 오는 파도를 피해 걷기가 쉽지 않다.
리조트의 뒷마당이 되어버린 오징어 건조장(좌)과 개터짐이 일어나기 직전의 대화천하구와 갈매기떼 (우)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장소(좌), 제당을 보호하려 돌을 놓은 마음(우)
모포항 북쪽해변의 촛대바위
모포항 북쪽 해변의 몽돌(좌)과 구평리의 눈향나무(우)


모포항을 지나가는데 바다의 모래유실을 막고 방풍을 위해 조성해 놓은 곰솔 숲을 누군가 나무를 뽑고 배추밭을 만들어 놓았다. 이 마을은 마을 뒤편에 느티나무와 팽나무를 심어 바람과 재해를 막고 있는데, 이 정도면 곰솔숲을 해치는 것이 어떤 일이라는 건 뻔히 알고 있을 것이다. '어디고 미꾸라지는 있으니까.' 모포항 빠져나가는 곳의 절벽에 단을 차리고 그곳에 차를 대지 못하도록 돌로 경계를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전통과 자연을 지키려 하는 사람이 잘살아야 하는데.' 물고기 양식장인 축양장이 있는 곳에서 해파랑길은 언덕을 올라간다. 이때 언덕으로 올라가지 않고 아래 바다 쪽으로 가면 붉은색을 띤 몽돌들이 해안을 채우는 바닷가를 걸을 수 있다. 이곳은 평소에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 곳이어서 조용하고, 해변에 다양한 해초들이 자라 바다목장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최근엔 이곳에 있는 절경의 바위를 보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자갈밭도 사람의 흔적이 더 많아졌다. 이제 한적한 바다의 신비함은 조금씩 사라지고, 그에 따른 감동 또한 반감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곳의 바다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나는 양말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가 자갈 위로 올라가 겨울 햇빛과 바람에 젖은 발을 말린다. 붉은 몽돌을 타고 올라왔다 빠져나가는 파도의 소리는 하나의 음악이다. 마침 뒤져보니 아침에 편의점에서 산 음료수와 삶은 달걀이 있다. '해파랑길 최고의 간식시간을 이렇게 보내고 있다.'

영암 1리의 산길에서는 어린 향나무를 만났는데, 구평리 영일수산의 출입문 옆 바위에서 눈향나무를 처음 만났다. 이제부터 고성에 이를 때까지 바닷가에 자생하는 향나무를 자주 만나게 된다. 포항지역의 바닷가에서는 눈향나무 자생지를 더 자주 접하게 되는데, 해풍에 맞서 부러지기보다는 몸을 낮게 깔아 살아남은 눈향나무의 적응능력을 배울 필요가 있다. 이곳의 바닷가를 찾는 사람들은 향나무에는 별 관심이 없고 낚시에 열을 올린다.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른 건 분명하다. 내가 길에서 서낭당을 찾아다니는 것도 이상해 보일 것이다.



때가 되면 먹어야 한다(구평 포구-장 길방 파제-하정 해변-병포 방파제-구룡포)

가는 길이 기니 보이는 것도 많다. 돌담집이 많은 구평 2리 마을을 지나 차길을 따라 걸으며 상정천 하구를 건넌다. 구룡장어집 주차장이라는 안내판이 있는 곳에 느티나무와 소나무고목이 있는데 느티나무의 수령이 450년이 넘는다. 이 나무는 오랜 기간 이 마을의 신목(神木) 역할을 해왔을 것이다. 세상은 언젠가부터 신보다는 정보를 중요시하는 사회로 바뀌어가고 있다. 구평리에서부터 개 한 마리가 계속 내 앞에 앞서가며 가이드 역할을 하는데 인도가 없는 도로를 따라오는 게 너무 위험해 보여 구평리로 돌아가라고 쫒아버렸다. '서운해하지 말길.' 혼자 걸어서 그런가 먼저 먹을 것을 주지도 않는데 어디서고 개들이 참 잘 쫒아 온다.

장길리 낚시공원을 지나 하정리 입구에서 특이한 형태의 돌집을 만났다. 촉이라는 게 있는데 이 집은 분명 서낭당이다. 시멘트에 날짜가 쓰여 있는데 잘 알아볼 수가 없다. 4295라는 숫자가 있는데 이는 단기를 서기로 치면 1962년이다. '오래도 됐다.' 옆에 뚫린 구멍으로 보니 천장을 뚫고 나온 곰솔 아래에 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곰솔이 당나무인데 왜 이런 식으로 건물을 지었는지는 이해가 안 된다. 언제고 해답을 찾을 날이 있을 거다. 하정리 바닷가에서 말리고 있는 과메기에서 기름이 반지르르 흐르고 있다. 과메기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하정리마을 담장에 현수막이 달려있다. 내용을 보니 은빛모래사장이 개인 땅으로 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제까지 오면서도 그랬고, 앞으로 가는 해파랑길에서도 자주 보게 될 것이 공공용지에 대한 문제이다. 하천이나, 바다의 모래밭이나 둔치는 지번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곳은 사람이 사는 땅이 아닌 바닷물이나 하천물이 주인인 곳이기 때문에 공유지로 두고 개발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현실은 그런 곳을 누군가는 불하받고 용도 변경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공유지는 개인이 소유해서는 안될 곳이다. 지금이라도 공유지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하고, 개인 소유가 된 땅들은 개발이 아닌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 거기에 많은 비용이 든다 해도 그리 해야 한다.

오후 2시가 넘었는데 아직 점심을 해결하지 못했다. 구룡포까지 가려면 좀 더 가야 하는데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병포리의 당나무도, 대규모로 오징어를 말리는 곳도 잠깐 구경하고 발길을 옮긴다. 겨울철 길을 갈 때 춥고 배고프면 그것처럼 서러운 것이 없다. 병포 5리 마을회관 앞을 지나 항구로 나간다. 커다란 배들이 줄지어 서있는 곳, 구룡포다. '무엇을 먹을까. 대게?, 짬뽕, 물회?'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도 막상 들어가지 못하고 길을 걷다가 구룡포항의 자그마한 '할매식당'에 들어간다. 하루 종일 할매신을 만났으니 늦었지만 점심도 할매 덕을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잘 들어왔다.' 7천원짜리 정식을 시켰는데 깔끔하고 맛있는 찬이 시장기와 더불어 입맛을 살려준다. 물론 밥을 한 공기 더 시켰다.

하정리입구의 서낭당(좌)과 병포리의 오징어건조장(중), 할매식당의 깔끔한 정식(우)
하정리 마을의 현수막(좌)과 병포리의 당나무(우)
잘꾸며진 구룡포시장의 건어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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