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14코스는 구룡포에서 호미곶에 이르는 바닷길이다. 근대역사문화자원과 대게로 유명한 구룡포항에서 출발해 구룡포해변, 삼정해변, 석병리, 다무포, 강사리, 대보리를 거쳐 호미곶에 이르기까지 바다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계속해서 이 길을 걷는 이들이라면 구룡포에서 시작해 남구의 약전리까지라도 하루에 걷는 것이 좋다. 걸어야 할 거리가 많다는 게 단점이지만.^^
우리는 어디에고 흔적을 남긴다(구룡포-구룡포 해안-두일포마을)
점심을 먹고 나오니 오후 3시 20분이 넘었다. 잠시 고민했다. 3일 전 7코스 태화강 전망대에서 시작한 해파랑길 걷기를 오늘까지만 걸을 예정인데 돌아오는 길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남은 시간 갈 때까지 가보자." 일본인 가옥거리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지만 작년에 비하면 훨씬 적은 수이다. 해안을 따라 걷는다. 바닷가의 퇴적암들은 파도에 깎여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유명 관광지가 있는 해안가이지만 사람 사는 흔적이 더 진한 길에는 연탄재가 쌓여 있기도 하고 바닷물을 끌어오는 배관이 길게 늘어져있기도 한다. 기묘한 형상의 바위에는 구멍마다 촛불에 그을린 자국이 있다. 김이 붙어 있는 바위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 조심하며 구룡포 해안으로 나간다.
일본인 가옥거리의 관광객들과 구룡포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해변의 바위 주변에 버린 연탄재가 쌓여 있다.
구룡포 해안은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연탄을 버려 쓰레기장이 되어 버렸다.
구룡포 주상절리는 축포를 쏘듯 위쪽으로 향해있다. 주상절리가 형성될 때의 상황을 그려볼 수 있게 해주는 모습이다. 주상절리의 모습이 절경을 이루지만 이미 여러 차례 주상절리를 보고 오는 길이라 그런지 차가운 바람 부는 전망대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다. 마음속의 남은 거리와 오늘 집으로 가려는 생각이 발걸음을 재촉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길을 걸을 때 나름 즐기리라 했는데 벌써 코스에 연연한다. 일정을 맞춰 빨리 걸으려 하고, 쓱 지나치는 것도 꽤 많다. 갈매기 가득한 삼정해변을 거쳐 삼정 3리에 이르자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그래도 서낭당이 나오니 열심히 돌아본다. 구룡포 포스코수련원 앞에 있는 서낭당은 돌담장과 기와지붕이 마치 옛집처럼 보인다. 두일포마을에는 작은 바위 위에 가지를 아래로 늘어뜨린 소나무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나무들을 집 안의 화분에 키우며 작은 자연을 구상하는 분재에서 이 같은 작품을 현애(懸崖)라고 한다. 벼랑에 매달려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라는 뜻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나무 아래에 있는 기념비이다. 예비군 휘장이 비에 새겨져 있고 전국 최우수 예비군 소대라는 글이 쓰여 있다. "아, 저런 게 있었구나." 나도 예비군 훈련을 받긴 했는데 저런 게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기념비를 세울만하지. 끄덕끄덕"
불꽃놀이 축포가 터져 오르듯 윗쪽으로 퍼져 나가는 형상을 한 구룡포 주상절리
삼정해변해변에는 갈매기가 가득하다. 다들 뭘 먹고 사는지.
삼정 3리에서 키가 훌쩍 커버린 나를 만났다. 돌담장이 이채로운 삼정리의 서낭당과 두일포마을 입구의 분재의 현애처럼 작품이 되어 버린 소나무.
별빛에 빠진 밤길(두일포마을-석병리 성혈-다무포-강사 2리-호미곶)
석병리의 해안을 걸을 때 뒤를 돌아보니 해가 빛을 잃고 떨어지고 있었다. 석병리 양어장의 물이 배출되는 곳에는 갈매기들이 떼를 이루어 물을 보고 있다. 양어장을 탈출해 나오는 물고기들이 이들에겐 손쉬운 먹이이다. 만일 물고기들이 빠삐용이나 쇼생크 탈출의 앤디처럼 양어장을 탈출한다면 그들에겐 더 큰 위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참 서글픈 일이다.' 양어장을 지나며 잠시 쉬는데 양말의 뒤쪽이 떨어져 구멍이 났다. 어째 발뒤꿈치의 감촉이 계속 안 좋더라니. 걸으면서 벌써 여러 개의 양말이 떨어졌다. '너무 걷는데만 열심이었나?'
어둠이 내리는 시간이었지만 석병리 성혈바위에서 잠시 구멍들을 살펴본다. 성혈(性穴)은 성스러운 바위나 탑 같은 곳에 돌로 갈아 만든 구멍을 말한다. 주로 아들 낳기를 바라는 여성들이 바위에 구멍이 날 정도로 기원을 한 흔적이다. 요새 바위에 구멍을 낼 정도로 열심히 비는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 정도의 간절함이면 하늘이 감동하지 않았을까. 요즘 사는 나의 모습이 대충인 것이 많은 것 같아 어두워져 가는 길에서 나를 채근해 본다.
다무포에 어둠이 내리고 집집마다 불이 들어온다. 바닷가로 가는 길은 어두운데 누군가 나를 쫓아 나온다. 숙소를 찾는 사람인 줄 알았나 보다. 다무포 고래마을을 지나며 완전히 어둠이 내린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기만 한다. 이 근처의 바닷가가 낯선 풍경과 길을 따라 양어장의 물이 흐르는 곳 하며 감상할 만한 곳들이 꽤 여러 곳인데 지금은 볼 게 별로 없다. 추위와 파도소리, 멀리 보이는 불빛이 전부이다. 그나마 강사 2리를 지나면서부터는 바다의 데크길이다. 어둠에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걷다 휴대폰을 닫고 잠시 멈추어 하늘을 보았다. "아, 별이다." 하늘엔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이 코 앞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쏟아질 만큼 많은 별도 아니고, 바다에 떠있는 어선들의 불빛보다 약한 별빛이지만 깨끗한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이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 준다. "이게 밤에 걷는 맛이다." 어두운 데크길을 벗어나자 카페의 환한 불빛이 바다를 비춘다. 겨울 파도는 거칠다. 바위틈에서 부서지고, 불현듯 일어서는 파도의 밤놀이를 구경하며 어두운 길을 걷는다.
석병리 양어장 배출수 주변의 갈매기들과 석병리 성혈바위. 어둠이 내린 다무포에서는 다른 일정만 없다면 바닷가의 펜션에서 파도소리 들으며 자고 싶었다.
겨울 밤바다의 파도는 날것 그대로의 거친 모습이다. 어두운 밤길에 저멀리 호미곶등대가 보이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 앉으면서도 마지막 발길을 재촉하게 된다.
밤이 되어도 상생의 손은 열일을 하고 있다. 남이 안볼때는 좀 쉬지.
얼마나 걸었을까. 밤길에서는 걷는 속도도 빨라진다. 주변에 한눈을 파는 일이 없으니 자연스레 속도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멀리 호미곶의 등대가 사방을 비추는 것이 보인다. 목적지가 눈에 보이니 속도를 더 내게 된다. 조명을 받는 상생의 손 앞에 서니 성취감이 든다. '어쨌든 열심히 걸어왔다.' 버스를 타러 나오며 보니 새천년 기념관으로 가는 광장엔 장미꽃이 등에 반짝이는 고래며 화려하게 색을 바꾸는 문어가 나를 반긴다. 그런데 버스를 기다리는 데 막차시간이 되었는데도 차가 오지 않는다. 고민하다 택시를 부르려 전화를 거는데 20분 정도 늦게 다른 버스가 온다. 어렵게 구룡포까지 나왔는데 이곳에서는 몇 분 전에 막차가 끊겼다. 할 수없이 택시로 포항역까지 이동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호미곶에서 택시를 타고 직접 가는 건데. 항상 일이 잘 풀릴 수는 없는가 보다. 그래도 택시 덕분에 마지막 열차를 놓치지 않았다. 잠깐 남는 틈새에 가락국수 한 그릇으로 저녁을 먹는다. "그래도 끼니를 거르지 않았고 욕심껏 걸었으니 오늘도 성공한 거다. "
광장에 있는 손조각과 문어의 형형색색 변화 하는 모습은 진짜 문어의 위장색보다 훨씬 화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