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해파랑길, 살아온 흔적인 것을

15코스 : 호미곶 - 흥환보건소. 12.9km

by 물냉이

해파랑길 15코스는 호미곶에서 흥환해변까지 해안산책로를 걸으며 바다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바다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슬픈 일도 있고 반가운 사람이 찾아오는 기쁜 날도 있다. 거친 겨울 파도를 넘어 자신들의 삶을 만들어 갔던 사람들의 희비의 흔적을 한 발자국씩 찾아가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갈증처럼 생기는 그리움(호미곶 - 대보항 - 독수리바위 - 동구만포구)

3년 전에 해파랑길 15코스를 걸을 때에는 고금산을 거쳐 우물재산에서 흥환간이해수욕장으로 빠지는 경로를 걸었었다. 고금산의 바람 부는 임도에 앉아 이 산길을 해지기 전에 내려갈 수 있을까 걱정했었다. 그때는 점심을 호미곶의 식당에서 먹고 출발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해파랑길 14코스 호미곶까지 걷기를 마치고 일 때문에 집으로 왔다 열하루 만에 다시 내려오는 길이다. 부산, 울산, 경주, 포항 등 KTX가 닿는 도시는 새벽 첫 기차를 이용하면 오전에 해파랑길에 올라설 수 있다. 오늘도 호미곶에 도착하기 위해 첫 기차를 타고 포항역에 도착해 텅 빈 아침 버스를 타고 구룡포까지 왔다. 호미곶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간단히 편의점에서 산 샌드위치 한 조각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10시에 호미곶에 도착했다. 버스 시간만 잘 맞았으면 30분은 더 일찍 도착했을 거다. 문제는 하늘이 잔뜩 찌푸린 얼굴이더니 호미곶을 출발해 걷기 시작하자마자 비가 내린다. 호미곶 바로 옆에는 이육사의 청포도 시비가 있다. 이곳에 육사의 시비가 있는 것은 1936년 폐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된 이육사가 포항 송도 근처에 10개월 정도 내려와 요양을 했다고 한다. 그때 이 지역에 일본의 동양척식 회사가 운영하던 미쯔와(三輪) 포도원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육사가 이곳을 와보고 청포도 시를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구룡포에서 같이 버스를 타고 온 부부가 있었는데 나보다 앞서 걷던 부부는 30분쯤 걷다가 비가 굵어지자 걷기를 포기하고 호미곶으로 되돌아 간다. '저분들이 현명한 건데, 오랜만에 내려온 길 쉽게 포기할 수도 없고' 비 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자꾸 우산을 뒤집어 버리는 바람이 문제다. 오늘 부는 바람은 지난번까지 겪은 바닷바람과는 결이 다르다. 바람 끝에 칼날이 지나가는 것 같은 매서움이 있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길이 그렇다. 걸을 땐 힘들어도 한동안 걷지 못하면 다시 갈증 같은 그리움이 생긴다.

3년 전에 걸었던 우물재산의 산길
호미곶 상생의 손 앞에 있는 호랑이 조각을 보며 오늘 걸을 길을 가늠해 본다
이육사의 청포도 시비. 이 시를 처음 읽을 때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이라는 구절이 유난히 당겼었는데.
살살 비는 내리고 바람은 점점 드세지는 곳에서 시동을 건다. 대보항이 저기 보인다.

대보항을 지날 때 새 밧줄과 통발이 쌓여 있다. 아직 바닷물을 경험해보지 못한 저 밧줄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을까? 사람이나 물건이나 새내기는 우리에게 기대감을 생기게 한다. 능숙하지 않아도 사랑스러운 때가 그때이다. 구만리의 방파제를 지나면 바닷가에 세워 놓은 비석이 보인다. 비문은 '수산강습소 실습선 쾌응환(快鷹丸) 조난 기념비'라고 쓰여있다. 한자가 일본식이다. 우리말이라면 '쾌응호' 나"독수리호'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1907년에 수산실습선이 사고가 나 인명피해를 입은 것이니 기념한다기보다는 추모의 개념이 강한 비이다. 배 사고라면 유난히 가슴이 아린데, 100년이 더 지난 그때에도 젊은 학생들의 죽음에 부모들은 얼마나 애를 끓였을까. 그 옆 바닷가에서 날 준비를 하는 독수리바위가 애처롭게 느껴진다. 그나마 사면에 심은 곰솔들이 미래의 숲을 보는 것 같아 조금의 위로가 된다.

이곳의 바닷길은 포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걷기엔 편하다. 그렇지만 단지 걷기 위해 바닷가에 이렇게 포장도로를 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조난 기념비와 독수리바위를 본다. 청운의 꿈을 꾸던 젊은이들의 희생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가슴을 저미게 한다.
사면에 심은 곰솔은 미래의 숲을 꿈꾸게 한다.



정성이 필요해(동구만포구 - 구룡소 - 발산항 - 흥환보건소)

구만리 방파제의 포장도로는 곧 끊기지만 이어서 나무데크길이 이어진다. 데크길을 걷다 보면 저 앞에 멀뚱 튀어나온 바위가 '모아이상 바위'라고 하는데 아직 얼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길을 조금 더 가 다른 쪽에서 바라보면 영락없는 사람의 얼굴이다. 바위라는 게 참 그렇다.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도 한쪽 얼굴만 있는 건 아닐 거다.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얼굴을 갖게 되는 건 그 사람의 일관성보다는 다른 환경이 더 중요한 요인은 아닐까. 선입관에 의해 치우친 판단을 하거나 한쪽의 이야기 만으로 사람을 오해하는 것은 살며 정말 조심해야 할 일이다.

구만리 해변의 포장길과 나무데크길. 나무테크길 끝에 보이는 모아이상 바위는 아직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가까이에서 본 모아이 얼굴바위, 얼굴 안에 작은 얼굴이 또 보인다. 작은 돌의 무늬에서는 사랑하는 두 연인의 모습을 찾아 볼 수도 있다.

해안가 바위에서 두 남녀가 껴안듯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돌이라는 것이 신기해서 그 작은 무늬에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닷가를 가면 돌들을 열심히 찾아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은 무늬가 주는 다양한 형상 때문이다. 무늬뿐만이 아니라 형태가 독특한 돌들도 있는데 몽돌들의 한 부분에 더 작은 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파도가 칠 때마다 빙빙 돌며 깎아 만든 구멍인 돌개구멍이 생긴 몽돌들도 있다. 작은 돌에 생긴 구멍으로 인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형태를 볼 수 있어 자꾸 손이 가게 된다. 바닷가를 걸으며 이런 돌들을 쳐다보다 보면 후딱 시간이 지나버린다.

작은 돌에 더 작은 돌이 돌개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아홉 마리의 용이 살다 승천했다는 구룡소 가기 전에 점심을 먹었다. 문을 연 식당이 없어 계속 걷다 들어간 집은 물회만 된다 하고, 그동안 손님이 없었는지 회도 썰어 냉동시킨 것이고, 밥은 해 놓은 지 오래되어 빛깔이 변한 삭은 밥이다. 어쩌랴 고픈 속을 달래려 먹었지만 이런 식사를 한 날은 계속 허기가 진다. 배고파지는 허기가 아니라 최소한의 정성을 함께 먹지 못한 헛헛함 때문이다. 구룡소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할 때 뚫어진 9개의 굴이 있다. 파도가 칠 때는 그 굴로 들어간 물이 다시 토하듯 뿜어지는 경관이 가히 절경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은 바닷가로 내려가 굴을 확인하고 굴에서 토해지는 물을 구경할 상황이 아니다. 그저 위쪽에서 이쪽저쪽 쳐다보지만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높은 파도 덕에 어디서고 우렁찬 바다의 소리를 듣는 걸로 만족한다. 구룡소를 지나 걷는 길들도 절벽 위에 있어 절경을 보며 걸을 수 있다.

구룡소 입구의 바다 풍경
구룡소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 공간에 서면 파도들이 밀려오는 격한 소리가 가득 주변을 채운다.
바위계곡 안쪽은 파도가 들이치지 않고 잔잔한 모습이다.

발산항 이르기 전 바닷가에 당나무인 소나무가 서 있다. 소나무의 가지 일부는 삭아 떨어져 안쪽의 심재만 앙상한 모습으로 놓여 있는데 이 가지에도 금줄을 둘러놓았다. 마른 가지에 정성을 보일 정도면 이곳에 동제를 지내는 이들의 나무의 신성에 대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당나무나 오래된 고목의 경우 가지가 부러져도 잘못 만지면 동티가 난다 해서 주민들은 나뭇가지를 그대로 두거나 잘 모셔두기도 한다. 발산항을 품고 있는 배후의 산자락에는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 군락지가 있다. 조경수로 많이 쓰이는 모감주나무와 병아리꽃나무야 요즘 어디서고 쉽게 볼 수 있지만 이곳은 넓은 산자락에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그 가치가 높아 보호하고 있다. 발산항 남쪽의 해변에 있는 장군바위는 이들 식물보호지역과 발산리의 주민들을 지키기라도 하는 듯 우뚝 서있다.

발산리를 지나 흥환리로 접어들면 길가에 '장기목장성비'의 비각이 있다. 군마를 키우던 장기목장에 쌓아 놓은 성을 기념하는 비이다. 단어가 붙어 있어 이해가 쉽지 않은데 '장기목장 성 비'로 뛰어 읽으면 이해하기가 쉽다. 흥환 1리 마을의 서낭당은 탐방로에서 마을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볼 수 있다. 팽나무 아래 자리 잡은 서낭당은 천장에 제수 용기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어 마을 사람들이 깨끗이 관리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나도 이 길을 걸으며 정성을 다하고 있는 걸까. 어느덧 흥환보건소가 저 앞에 보인다.

발산항 이르기 전 바닷가에 있는 당나무의 죽은 가지에 금줄을 두른 모습
바닷가에 우뚝 서 무언가를 지키고 서 있는 장군바위. 근처에 있는 모감주나무군락을 지키는 걸까.
장기목장성비와 시멘트로 깔끔하게 정리된 흥환 1리의 서낭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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