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해파랑길, 작은 돌개구멍

17코스 : 송도해변-칠포 해변. 17.9km

by 물냉이

해파랑길 17코스는 송도해변에서 시작해 영일대해수욕장을 지나 여남해변, 죽천해변을 거쳐 칠포해변까지 가는 길이다. 층층이 쌓인 세월을 꼭꼭 눌러 동시대의 생물들을 품은 지층이 이 구간을 대표한다.

쉬다가 걷다가(송도해변-영일대 해변)

비와 바람이 멱살 잡듯 불어대는 송도해변을 떠나 송도로를 따라 내항 쪽으로 걷는다. 원래는 해안을 따라가야 하는데 이렇게 비바람이 들이칠 때는 바닷가에서 좀 떨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 노선을 변경했다. 비 내리는 밤이라 송도라는 이름의 바탕이 된 소나무숲을 감상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길을 걸으며 모든 걸 다 볼 수는 없다. 동빈내항에는 바람을 피하려는 배들이 들어와 있다. 배들도 편히 쉴 곳이 필요하다. 죽도시장의 환한 불빛을 쫓아 걷는다. 천장이 있는 시장을 걷는 것은 비도 맞지 않고 바람도 없어 짧은 거리지만 오늘 같은 날 도움이 된다. 궂은날임에도 시장을 찾은 사람들이 꽤 된다. 대게철 임을 죽도시장의 수조를 통해 느끼게 된다. 다시 비 내리는 길을 걷는다. 오늘 내리는 비는 쏟아지다가도 금방 줄어들고 바람과 섞여 흩날리기도 하며 변덕이 심하다. 크루즈선들이 있는 부둣가를 지나다 젖은 길 위에 앉아 있는 사람과 마주쳤다. 그게 조각품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지만, 순간 당황했었다. 비 오는 한밤중에 부둣가의 인도에 앉아 그물을 만지는 사람이 어디 흔한 일인가. 포항지방 해양수산청 앞쪽의 예약해 놓은 모텔로 갔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니 몸이 풀어졌다. 하루 종일 비를 맞으며 걸어 말릴 것이 많은 날이다.

송도해변의 여신상이 있는 곳에서 해파랑길 17코스를 시작한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잠시 가라앉아 주었다.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게 경로를 수정해 죽도 시장을 들렀다. 손님들은 상점의 수조를 보며 대게에 관심을 보인다.
부두의 길에서 주저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흠칫 놀랐다. 어둠은 조각에도 생명을 나눠준다.

잠은 일찍 깼지만 궂은 겨울 해변가에 일찍 문을 여는 식당이 없을 것 같아 뉴스를 보다 여덟 시가 다되어 숙소를 나섰다. 영일대 해변은 어제처럼 비와 바람이 뒤섞여 내리고 있었다. 건물들의 뒤쪽으로만 가도 바람이 한층 덜한데 바닷가의 상황은 바람이 심하게 분다. 마침 해수욕장 옆에 문을 연 곰탕집이 있어 아침 식사를 하고 나왔다. 이렇게 춥고 비바람 부는 날에는 따뜻하게 몸을 데우고 출발할 필요가 있는데 적당한 집을 운 좋게 찾았다. 영일대해수욕장의 해변길을 걷는데 세찬 비바람이 자꾸 우산을 뒤집어 놓는다. 조금 편하려고 접이식 우산을 가져왔는데 오히려 비만 더 맞게 되었다.


화석을 품는 바위(두호동 화석 산지-여남동-죽천리-칠포 해변)

사람 없는 영일대 전망대 앞을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다. 제방 아래로 거친 파도가 비와 함께 그르렁거리는 해안도로는 보긴 좋지만 걷기는 불편하다. 해안도로에서 바로 보이는 해변공원 앞에 이르렀을 때, 잘 생긴 수형의 팽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해변공원은 환호공원의 여러 주제 공원 중 하나이다. 공원의 잔디밭이 주변 숲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팽나무 덕에 봐줄 만한 곳이다. 그래도 이곳에서 일출을 보기엔 한적하고 좋을 것 같다. 해변공원을 지나 좀 더 걸어가면 작은 돌들이 너덜지대처럼 쌓여 있는 곳이 있다. 도로공사를 하며 노출된 사면에서 돌조각들이 떨어져 나와 쌓인 것으로 보이는 이곳은 '두호동 화석 산지'이다. 쌓여 있는 작은 돌들은 흰빛이 나는데 퇴적암인 이암이다. 쌓여 있는 이암 더미 속에는 약 1,300만 년 전에 살았던 생물들의 화석들이 숨어있다. 안내판에 따르면 이곳에서 나뭇잎 화석이나 게의 화석, 거미불가사리 화석, 물고기 화석 등이 나왔다고 한다. 혹시 화석을 볼까 싶어 돌들을 눈으로 훑어보지만, 쉽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이곳에서부터 여남방파제에 도착할 때까지 바닷가에는 자갈만 한 크기의 몽돌들이 있다. 이 몽돌들은 퇴적암으로 강도가 강하지 않아 구멍이 생겨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몽돌의 구멍은 돌 표면에 붙은 모래나 작은 돌들이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회전하면서 내놓은 것들이다. 하천의 바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돌개구멍(pot hole)이 생기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해파랑길의 1코스인 이기대의 해안에서는 파도에 의해 만들어진 너럭바위 위의 큰 돌개구멍을 보았었다. 여남방파제 있는 곳까지 천천히 걸으며 바닷가의 몽돌들을 찾아본다. 구멍이 많이 난 돌을 손으로 꼭 쥐면 바삭 부서지는데 갯벌이나 진흙이 퇴적되어 형성된 이암이니 마른 흙처럼 부서진다. 이암층의 생물화석들은 다른 암석에 생긴 화석들보다 더 섬세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런 암석의 특징이 스스로를 지키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혼자 걷는 해파랑길은 품어주는 것을 배우는 길이다. 잠시 돌아본다. '나는 오늘까지 살며 무엇을 얼마만큼이나 품어 주었을까.'

영일대해변에 찬 비가 내리는 날 사람들은 나오지 않는다. 따끈한 곰탕으로 속을 채우고 영일대전망대 앞을 지나간다.
환호공원의 주제 공원 중 하나인 해변공원의 경관. 쉼터에 앉아 바라보는 바다의 전망이 좋은 곳이다.
두호동 화석산지의 모습. 잘게 부서져 너덜지대를 이룬 저 안에 오랜 시간을 거쳐 화석이 된 생물들이 있다.
바닷가의 몽돌들은 작은 돌과 모래를 품어준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자신의 가슴은 구멍이 생기다 쪼개지고야 만다.

여남동은 여씨(汝氏)가 사는 집성촌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골목의 담장에 요란하게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이 아니라 벽은 깔끔하게 한 가지 색으로 칠하고, 강조할만한 곳은 다른 색을 써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간혹 담장의 거친 면에 작은 그림들을 그려 놓았는데, 나는 담장 아래쪽에 박힌 돌에 파란 물고기를 그려 놓은 것을 좋아한다. 몇 년 전 봄, 이 마을 골목의 화분에 복수초가 피어 있었는데 꽃을 가꾸는 주인의 품성을 보는 듯 깔끔하면서도 화려했었다. 겨울인 지금 골목에서 복수초는 보이지 않고 먹으려 심어 놓은 대파만 화단을 지키고 있다.

마을 뒤 산길을 넘어가는데 소복한 낙엽이 여행자의 쓸쓸함을 덮어 준다. 산길에 낙엽이 그렇듯 사람에게도 살짝 정성으로 감싸준다면 큰 위로가 될 텐데. 이 산길에도 퇴적암들이 많이 있어서 사면에서 떨어져 나오는 돌들을 부담 없이 집어보고,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산을 넘어 소나무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대와 억새가 호위하는 산길 저 끝에서부터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죽천리 해변이다. 죽천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해안에는 테트라포드를 넘어 파도가 길 위로 쏟아진다. 길을 깎아내거나 사람에게 위협이 될 정도의 파도는 아니지만, 파도를 맞는다면 흠뻑 젖을 정도의 양이다. 이 길을 피해 없이 지나가려면 우산을 쓰던지 아니면 파도가 잠시 숨을 고를 때 재빨리 뛰어가야 한다. 해안길을 걸을 때에도 요령이라는 게 필요할 때가 있다.

여남동의 골목에서 만난 헤엄치는 푸른 물고기

예쁜 풀꽃들이 살던 화단엔 겨울 휴식이 찾아오고, 삐죽 대파만 골목을 지킨다.

지나가라 생긴 산길에 드러난 선사의 시간이 안 보곤 못 간다며 발길을 잡는다.
저기 멀리 죽천리 해변이 보인다. 혼자 걷는 여행자의 발아래 파도의 노래가 차인다.
바다의 높은 파도와 바람을 피해 해파랑길 안내표식을 포기하고 도로 안내판을 따라 걷는다.
낮은 해안길로 파도가 넘어온다. 하나 둘 숫자를 세다 잠깐 한눈파는 파도를 피해 지나가야 한다.

죽천리에서 바닷가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길을 따라 걷기로 한다. 죽천 방파제에서 해안을 따라가는 길을 포기할 경우 영일만 산업단지 앞에서 칠포 해안에 이르는 동안 만날 수 있는 넓은 모래밭과 소나무 식재지, 모래밭에 만들어 놓은 방풍밭 등을 놓치게 된다. 하지만 이곳은 평소에도 바람이 만만치 않은 곳이다. 1,2분마다 우산이 뒤집히는 상황에서 바닷가로 나가는 건 피해야 한다. 혼자 길을 걸을 때 항상 살펴보아야 할 것 중 하나가 나의 몸상태를 잘 파악해 길에서 만나는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다. 칠포해수욕장으로 가는 도로표지판을 보며 큰길을 따라 걷는다. 큰길에서는 인도로 갈 수 있었는데, 공단지역으로 들어가니 인도가 없어진다. 위험하지만 마침 다니는 차가 드물어 별 어려움 없이 걷는다.

좀 돌기는 했어도 걷다 보니 칠포해수욕장이 저 앞이다. 해수욕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비를 피할 수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정류장에 앉아 젖은 양말을 짜고 신발의 물을 빼냈다. 바람은 무슨 점령군이라도 된 듯 씽씽 소리를 내며 거리를 훑는다. 걷기 힘든 길을 피해 돌아왔지만 체력이 많이 떨어진 날이다. 배는 고프고, 몸은 춥고, 다리는 뻑뻑하다. '이럴 때는 집에 가는 게 최고인데 작정하고 내려온 게 어제니 어떡하나.' 겨울비는 그칠 줄 모르고 칠포 바다엔 사람이 없다.

잠시 비를 피해 버스정류장에 앉아 칠포 해변을 바라본다. 나는 누구, 여기는 또 어디.
대보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가슴에 쌓아 놓은 바램들을 소나무가지와 함께 바닷가에 쌓는다. 달집이 타오르면 꿈도 이루어지길 바라며(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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