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해파랑길, 퇴적된 시간의 그림자

16코스 : 흥환보건소-송도해변.19.2km

by 물냉이

해파랑길 16코스는 시간공작소이다. 공작소에서는 먼 옛날 지층을 뚫고 폭발한 화산의 상처를 보듬는다. 투박하게 굳어 단단해진 바위들을 어루만져 미인을 만들기도 하고 이야기들을 한 자 한 자 새겨 놓은 비문이 되게도 한다. 그러나 시간공작소의 작품에 빠져 있다 보면 금방 어둠이 내린다. 다음 코스와 이어져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조각한다 너의 시간을(흥환보건소-하선대-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

해파랑길 16코스 시작점은 흥환보건소인데 그곳까지 가는 일을 이제는 하지 않는다. 하구의 하류에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놓였기 때문이다. 저기 보이는 보건소를 바라보며 손을 한번 흔들어 준다. "반갑다.^^" 흥환보건소에서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까지의 길은 마치 조각전시장 같은 느낌이 든다. 곳곳에 파도로 깎아 놓은 바다의 조각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신생대에서 시작해 6천5백만 년 동안 퇴적된 토양을 치고, 깎고, 어루만진 바다의 손길이 얼마나 섬세한지 감탄하다 보면 어느새 전시관의 끝자락에 도착하게 된다. 흥환간이해수욕장의 해변에는 사람들이 적은데 끝자락에 있는 몽돌밭에는 낚시하는 사람, 걷는 사람, 파도에 돌팔매 하는 사람 등 꽤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 되어 본다. 손바닥만한 몽돌들이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와그락, 와그락, 와그르르" 소리를 내며 얼굴 붉힌다. 혼자 걷는 해파랑길은 듣는 거다. '비가 오면 어떻고, 발이 아프면 어떨까. 잠시 길을 멈추고 몽돌의 노래를 감상한다.'


흥환에서

이 소리 내려 파도는 그렇게 오랜 시간 오가며 몸을 부벼댔을까

비가 오면 비를 받고 눈이 오면 눈을 녹이며 애 태웠을까

호미곶에 부는 바람 곰솔숲따라 백두의 등을 탈 때

삭이고 삭인 천만의 세월들을 손가락으로 헤아렸나 보다

하나의 꽃이 필 때마다 숨을 멈추고 다정한 눈길로 보았나 보다


20200126_143728.jpg 저 앞에 흥환보건소가 있다. 해파랑길의 코스 시종점인 저곳을 나는 그냥 지나칠 거다.
20200126_143740.jpg 하구에 놓인 작은 다리는 걷기 여행자의 본능을 도와준다. 하구의 얕은 물을 만나면 돌아가기보다 신을 벗는 속성을 알고 있는 것만 같다.
vDegWOm6WHUDZDkxbybA2WpxqME.jpg 흥환간이해수욕장의 끝자락에서 몽돌들이 바닷물에 몸을 씻는다. 몽돌들의 물내림 소리는 여행자의 발길을 놓아주지 않는다.


흥환간이해수욕장을 벗어나며 해안에 설치된 데크길을 걷는다. 흰 빛의 퇴적암은 쓰러질 듯, 부서질 듯 파도를 견디며 서 있어 위태로워 보이지만 금방 무너지지는 않는다. 지구의 역사로 보면 순간도 되지 않을 시간이겠지만 우리의 눈으로 보면 억겁의 시간을 버텨온 바위들이다. 신랑각시바위, 미인바위, 물개바위, 비문바위 굳이 이름을 살피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 붙여준 이름을 따라 형상을 떠올리는 것보다 지금 나의 눈에 비치는 모습으로 감상하는 것이 더 흥분되고 기분 좋은 일이다. 바위들을 감상하며 걸을 때 조심해야 할 것이 파도이다. 겨울 파도는 언제고 데크를 타고 넘지만 조심만 한다면 그 또한 즐거운 걷기의 일부분이다. 밀고 당기고의 재미가 있는 포항의 바다이다.

20200126_150930.jpg 해안에 있는 다양한 모양의 바위들이 여행자의 발길을 잡는다. 저 앞에는 미인바위가 숨어있다.
20200126_151753.jpg 비문바위는 우리에게 바다의 기록을 읽어보라 이야기한다.
H3-BIarxefF7w8u26HKuBeNkc28.jpg 머리에 잔돌을 잔뜩 얹고 있는 바위는 마치 곱슬머리를 한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다.


마산리해변에는 흰돌과 검은 돌을 대비되게 하여 만든 화장실이 있다. 벽에 연오랑, 세오녀의 그림을 새겨놓은 이 화장실의 세련된 디자인이 눈에 띈다. 간이 화장실 하나 갖다 놓고 청소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과거의 사례들에 비하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 안 들어갈 수가 없다. 화장실도 다녀왔겠다 여유 있게 마산리 마을길을 천천히 걸으며 발목을 풀어준다. 하선대 가는 길에 육지 쪽으로 뱃머리를 둔 배처럼 서있는 바위가 있다. 먹바위다. 전설에 의하면 이 바위가 세오녀를 싣고 일본으로 갔던 바닷가의 바위라고 한다. 그때 일본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우리 바다로 다시 돌아왔나 보다. 먹바위를 지나 데크를 걷다 보면 찰랑거리는 물속에 잠긴 널찍 편편한 바위가 나온다. 그 옛날 동해 용왕은 칠월칠석에 선녀들을 이곳으로 초청해 춤과 노래를 즐겼다고 한다. '이 대목은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한마디로 논 것이기 때문이다.' 이중의 한 선녀에게 마음이 끌린 용왕은 선녀와 혼인을 하고 싶었으나 옥황상제가 허락하지 않자 파도를 낮추고 바다를 잠잠케 해 옥황상제의 허락을 받아 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이 하선대이다.

20200126_152304.jpg 마산리 해변의 현대식 화장실을 만나면 걷기 여행자는 위로를 받는다. 해수욕장을 찾는 이들을 위한 시설이 아닌 걷는 여행자를 위해 만든 화장실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20200126_153319.jpg 연오랑과 세오녀를 일본까지 태워준 먹바위. 그는 이번엔 누구를 태워 어디로 보내줄 계획일까?
SRdiQPbDBIil-JIEl3CPyLtsRuo.jpg 하선대 위로 파도가 밀려온다. 하선대가 뭍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얕은 수심을 통해 하선대의 넓이나 바위의 모양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하선대를 뒤로하고 입암리 마을을 걷는다. 선바위의 마을 입암리. 영광군의 입암리에는 매향비라는 선돌이 있지만 포항의 입암리에는 바닷가에 선돌이 있다. 퇴적층을 파도가 파헤치고 바람이 다듬어 만든 6m 크기의 선돌이다. 흥덕이라는 말이 변하여 '힌디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바위부터 시작해 '여왕바위''킹콩바위''선바위' 등 다양한 이름을 가진 바위들을 이곳 해변에서 만날 수 있다.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터키의 카파도키아가 떠오른다. 카파도키아는 바람과 사람이 각각 다른 양식의 건축물을 만들어 놓은 곳이라면, 선바위 일대는 바람과 파도가 합작하여 만들어 놓은 조각품이다. 어쨌든 둘 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이 다듬어 놓은 조각품들이며, 사람들은 자연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입암리의 해안 일대는 눈향나무군락이 가파른 절벽에 매달려 살아가는 곳이다. 걷다 보면 파도와 바위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당연하지만, 천천히 걸으면서 이런 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는 눈향나무, 해국, 곰솔 같은 식물들을 함께 본다면 그 감동이 배가 될 수 있다.

vymgjgmPp9FfaAYM04a2TWNHHF0.jpg 바위 위에 눈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벼랑의 급한 경사면에서 살아가기 위해 향나무는 바위에 바짝 붙어 기어야 하는 생활을 택하였다.
20200126_154006.jpg 입암리 해안의 입구에 있는 흰디기바위.
20200126_154347.jpg 뒤쪽에서 바라본 여왕바위
20170209_174846.jpg 일몰을 바라보는 선바위


입암리마을을 지나 바닷가에 낮게 조성된 길을 걸으며 바위에 붙어 있는 흰색의 해초를 보았다. 알비노인가 싶어 지는데 해초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나중에 찾아보지' 한다. 걷다 보면 '이름이 뭐지?'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식물을 여러 해 보아 왔음에도 처음 보는 것처럼 생경한 식물들도 많다. 익숙한 것들도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다 사라지곤 한다. 그래서 겸손하라고 하는가 보다. 내가 알고 있는 게 얼마나 된다고, 세상의 널린 지식들의 한쪽 끄트머리도 제대로 만져보지 못한 수준이니 어디 가든 조신하게, 겸손함으로 나를 수련해야 한다. '물론 절대 쉽지 않다.'

입암 1리를 지나 바닷가 소로를 걷다 보면 저기 멀리 신식건축물과 기와를 얹은 누각이 보인다. 신식건축물은 귀비고(貴妃庫)이고 누각은 일월대(日月臺)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연오랑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간 뒤 해와 달이 빛을 잃자 신라의 아달라왕이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이 다시 돌아와 주기를 간청하자 세오녀가 직접 비단을 짜 보내주었다. 왕이 비단을 놓고 제사를 지내자 해와 달이 다시 빛을 회복했다고 한다. 그 뒤 비단을 고이 모신 창고가 바로 귀비고이다. 지금은 다양한 체험과 교육을 할 수 있는 전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비단을 놓고 제사를 지냈던 곳은 지금의 포항지역인 영일현이라고 한다.

언나무재로 올라가는 산길이 갈라지는 곳에서부터 입암리에서 임곡리로 바뀐다. 숲이 우거진 골짜기(林谷)라는 뜻의 임곡은 숲실이라고도 부르는 1리와 2리인 조사리로 이루어졌다. 조사(造沙)는 모래로 만들어진 마을이라는 뜻으로 바닷바람이 만들어 놓은 모래언덕이 많은 곳이다. 바닷길을 따라가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에 있는 일월대에 올라 잠시 쉰다. 비에 젖은 옷이 겨울바람과 힘을 합해 살갗을 공격하는데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어서 이내 일어선다. "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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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길을 따라 걷다 흰 색의 해캄처럼 생긴 해초를 만났다
20200126_161848.jpg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으로 가는 길에서 바라본 귀비고와 일월대
20200126_162610.jpg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의 일월대에서 상상에 잠기고 싶었으나 차갑게 부는 바람에 떨다 금방 내려와야 했다.


바람에 옆구리를 맞으며(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 임곡리-도구해변-청림운동장-구형산교)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을 떠나 임곡리로 내려간다. 비는 좀 줄어들었는데 바람이 해파랑길 안내 리본을 흔들어 댄다. 걷는 것도 흔들림이다. 주기적으로 앞뒤로 반복해 팔과 다리가 움직이면 어느새 낯선 곳에 서있는 나를 보게 된다. 흔들림은 흔들림이되 목표가 있는 흔들림이다. 목표가 없다면 제자리를 빙빙 돌다 말 테니까. 임곡리의 커다란 팽나무를 볼 때마다 저게 당나무인가 싶지만 걷기여행자가 올라가기에는 부담스럽다. 그냥 시간이 켜켜이 쌓인 존재들이니 나무마다 자기가 가진 사연 꽤나 있겠지 생각하며 지나간다.

0US5O4lYv2hb8GSll_kUyRjfIr4.jpg 마을에 들어서면 보이는 노거수들은 오랜 세월을 살며 어떤 이야기들을 가슴에 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임곡리를 지나 도구해변으로 나선다. 곰솔을 심어 조성한 숲이 해안가의 바람을 줄여줄 만도 한데 아직 키가 작은 곰솔숲 너머로 부는 바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샤워장 시설이 있는 곳에 이르니 바람은 더 심해져 바닷가의 야자수가 정신없이 잎을 흔들어 댄다. 그래도 가야지 별 수 있나. 군부대와 비닐하우스가 잔뜩 있는 경작지를 지나며 심어진 소나무들은 삼분의 일쯤 몸을 누이고 있다. 바람의 성화를 어찌 이길까. 나무고 사람이고 자신이 사는 곳에서 적응된 몸짓들을 그대로 표현하며 산다. 그것을 감추려 해도 몸에 배어 있는 것을 쉽게 고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늘막이 있는 의자에서 잠깐 앉아 쉬었는데 한참을 가다 보니 그곳에 장갑을 놓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손이 시리다고 주머니에 넣고 오다 보니 장갑은 깜박한 것이다. 다시 길을 돌아 가는데 얼마나 그냥 가고 싶던지. 청림운동장을 꺾어 나올 때쯤 어둠이 목까지 올라왔다. 바람이 차가운 밤이다.

소형 비행기들을 전시해 놓은 해군6전단항공전시관 앞에 도착하니 박스형 버스정류장이 있다. 안에 들어가 보니 훈훈했다. "바람만 맞지 않아도 이렇게 살만한데." 어둠이 내린 청림동은 도로변에 포도나무가로수길을 조성하고 이육사의 시인 청포도를 써 놓기도 한 포도의 마을이다. 옛날에 청림동에 일지(日池)와 월지(月池) 두 개의 연못이 있었는데 두 못을 지키는 신들이 서로 싸워 일대가 어둠에 잠기게 되었다. 주민들이 월지 근처에 암자를 짓고 치성을 드리자 해와 달이 다시 떠 밝아졌다고 한다. 오늘같이 어두운 날 달이라도 뜨면 좋으련만, 별도 달도 없이 비만 내린다. 청림동과 포항제철소와의 사이에는 냉천이 흐른다. 냉천을 건너면 형산강에 이르기까지 포항제철소가 자리를 잡고 있다. 공장지대의 황량할 수 있는 길을 피라칸사스, 왕벚나무, 양버즘나무, 개잎갈나무 같은 가로수들이 보완해 주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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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해변에 부는 바람과 바람에 반쯤 누워 있는 곰솔. 곰솔숲이 조성된 도구해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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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길에 만난 해군6전단항공전시관과 청림동의 포도나무가로수. 포항체철과 현대제철이 있는 공단길(2017년)


도시에 부는 바람(구형산교-운하조각공원-송도해수욕장)

조명으로 빛나는 구형산교가 로터리에 세워놓은 전구탑보다 더 화려하다. 잠시 비도 멈추고 바람도 멈춘 형산강 옆 포항제철소의 풍경이 다른 별에 온 것처럼 낯이 설다. 포항제철소 공장을 항공지도로 보면 마치 로봇의 손같이 생겼다. 하는 일이 생김새마저도 관여하는 것 같다. 포항의 바닷가에서 자는 날이면 바다 건너 보이는 포항제철소의 건물들이 마치 미래소년 코난에 나오는 인더스트리아 같다고 생각했었다. 포항제철소 맞은편의 형산강 둔치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간이지만 자연스러운 강의 경관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 많이 본 식물은 답압이 심한 곳에서도 잘 사는 질경이, 서양민들레, 새포아풀 같은 개척자 식물들이었다.
포항운하관 아래쪽의 송도동 일대의 형산강 둔치는 최근 몇 년간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황량한 둔치에 여러 종류의 식물을 심어 경관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기 때문이다. 건조하고 마른땅은 주차장으로 환영받기는 했지만 그 외 사람들이 찾아올 만한 어떤 이유도 만들어 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포항시민들이 꽃을 보고 운동을 하러 이곳을 찾는다.

운하조각공원을 지날 무렵부터 바람이 거세지고 비가 마구 쏟아진다. 자꾸 뒤집히는 우산은 이제 우산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포항 송도해수욕장의 입구에 있는 워터폴리 맞은편을 걸어가는데 강하게 부는 북풍과 쏟아지는 비는 찻길을 건널 수 조차 없게 한다. 여신상 광장이 건너 보이는 길가에서 16코스를 마친다. 옷은 다 젖었고, 빗방울이 잔뜩 낀 안경 때문에 앞도 잘 안 보이지만 예약한 숙소까지 가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좀 더 남았다.


bJ11GSWuVrkBQjXlCUZDIHwlPjY.jpg 형산강 너머로 포항제철소의 야경이 화려하다. 흑백의 조명에서 색이 들어가며 더 화려해진 건물들을 보며, 이 지역의 환경도 과거보다는 엄청 개선되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20200126_191006.jpg 운하조각공원의 야경. 고즈넉하면서도 화려한 밤길을 혼자 걸으며 대중 속의 고독을 떠올려 본다.
20190607_103506.jpg 형산강 하류의 초화류 공원. 주차장과 나지뿐이었던 형산강 하류에 다양한 식물들이 식재되었다. 지역주민에게도, 여행객에게도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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