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해파랑길, 무엇을 보며 걸을까

12코스 : 감포항 - 양포항. 13.5km

by 물냉이

해파랑길 12코스는 경주의 감포항에서 시작해 포항의 양포항까지 13.5km를 걷는 길로 송대말등대와 소나무숲, 오류고아라해변, 양포해변 등이 걷기 여행객을 반겨준다. 부산의 오륙도 앞에서 시작해 12코스에 오게 되면 왜 길을 걷기 시작했는지, 무엇을 볼지 이런 생각들보다는 어디까지 가야지 하는 생각이 우점한다. 12코스의 송대말등대처럼 내 감성의 푯대를 한 번쯤 되돌아볼 때이다.


우리는 각자의 등대를 세우고 있다(감포항-송대말등대-척사항-오류고아라)

'깨끗한 바다, 신선한 수산물, 원자력과 함께'라고 커다란 글씨가 적힌 수협 냉동창고를 지나 골목길로 들어가면 나뭇가지를 푸른색 비닐로 감싸 지붕 위에 올려놓은 집이 나온다. 노란색 페인트를 칠한 담장과 어우러져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우리 집에 이런 식으로 해놓는다면 사람들 반응이 어떨지 예상이 된다. 나뭇가지들은 가만히 보면 집 밖으로 탈출하는 사람들 같기도 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사람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새다. 날아가는 형상의 새를 설치해 놓은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고정한 것이 쓰러져 알아보기 힘든 모습이 된 것이다. 이 작품을 만든 분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다. 전국에 새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보통 솟대를 만들거나 철새나 텃새의 조각을 한다. 솟대는 상상의 새니 상징성을 강조하고, 철새나 텃새는 구체적이고 예술적으로 표현하려 애쓴다. 이 둘 다 자연이나 문화에 기여하는 바도 크고 사람들도 즐겨 보니 앞으로도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 발전할 것이다. 골목에서 마주한 이 파란 새들도 그런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이다.

송대말등대는 감은사지 석탑을 본떠 2001년에 만든 것으로 등대 안에 전시공간이 있다고 하는데 문이 닫혀 있어 구경은 하지 못했다. 송대말(松臺末)은 소나무가 숲을 이루는 곳이다. 송대말등대로 가는 입구부터 보이는 굵은 소나무들은 이곳이 예전부터 마을 주민들에게도 중요한 장소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과거에는 지금보다 훨씬 넓은 공간에 소나무숲이 있었을 것이다. 송대말등대를 잘 관리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변의 소나무숲을 건강하게 가꾸고, 숨어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 공유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송대말등대가 보이는 바닷가에서 누군가 삼각대를 세워 놓고 카메라에 몸을 고정하고 움직일 줄 모른다. 갈매기가 모여 있는 바위섬을 찍는 것 같은데 열정이 대단하다. 길을 걸으며 렌즈가 큰 카메라는 포기했다. 카메라의 무게와 사진을 찍기 위해 자꾸 멈추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 손바닥 만한 똑딱이를 가지고 다녔지만 이것도 귀찮아 지금은 휴대폰 하나만 가지고 다닌다. 원래 사진을 잘 찍지도 못하고, 사진을 인쇄하거나 할 일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포기하면 몸이든, 마음이든 가벼워진다.

골목에서 만난 새를 만들어 문과 담장에 올린 집과 송대말등대로 가는 길의 소나무숲. 숲의 크기가 줄어든다는 느낌이든다


오류리의 바닷가 옹벽의 턱에 앉아 발을 식힌다. 바위가 만들어 준 얕은 바다에서 가슴장화를 신은 아저씨가 동해식 해루질을 하고 있다. '문어를 잡는 건가? 미역을 따는 건가?' 유전자 저 안쪽 어디엔가 사냥의 본능을 감추고 있는 사내들은 자연으로 나오면 무엇이고 잡으려 한다. 사내들의 사냥 본능을 부채질하며 재미를 뽑아내는 프로그램이 '도시어부'이다. 그 프로를 보고 있자면 낚시질 한번 제대로 못해 본 나도 낚시가 하고 싶어 진다.

척사항에서 오류고아라해변으로 넘어가는 작은 숲길에 나무기둥이 하나 서 있는데 기둥을 잘 다듬고 나무가 갈라지는 걸 막으려 감은 철사의 위치며 생김새가 전봇대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나무전봇대는 썩지 않고 오래가는 콘크리트전봇대가 나오면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무전봇대는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콜타르를 발랐는데 어쩌다 나무전봇대를 잘못 만지면 손이나 옷에 묻어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지방도시에서 가끔씩 나무전봇대를 만날 수 있기는 하지만 희귀하다.

사진을 찍는 이와, 해루질을 하는 이, 앉아서 멍 때리는 이
척사항의 붉은 등대는 에밀레종의 형상을 본뜬 것이다(좌). 산길에서 만난 전봇대로 보이는 나무기둥(우)


소박한 것들을 보며 소박한 생각을 한다(오류고아라-연동마을-두원방파제-계원2리-양포항)

엄지손톱만 한 작은 몽돌과 모래가 섞여 있는 오류고아라해변을 조금 빠르게 걷는다. 해수욕장 주변을 정리해 다져 놓아 발목이 빠지지 않으니 속도가 붙는다. 연동체험마을 입구에 금줄을 두른 당목이 서있다. 양지바른 곳에 서있는 소나무는 주민들의 관심 속에 이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잠깐 내 여정도 보살펴 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무 앞에 잠시 머물러 나무를 본다. 연동(蓮洞)은 연꽃이 많이 피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오류리 일대에 집이 꽤 있고 주변 산자락에 다락밭이 많이 있긴 한데 습지가 넓게 형성될 곳은 아니다. 연못이 있었다면 지금의 마을의 집들이 있는 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제시대에는 이 마을에 염전이 있어서 염동(鹽洞)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콘크리트로 포장된 마당에 향나무가 자라는 오류펜션 앞에 복개한 다리를 건너면 포항시 장기면 두원리이다. 길을 걸으며 시의 경계를 아는 건 도로표지판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마을길을 걸을 때는 보통 지도를 통해서 전날 미리 공부를 해두었을 때에 인식하게 된다. 길에서는 안내표지판만 보기로 했지만 사전에 지도를 통해 머릿속에 노선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 걸으면서 길을 잃을 수 있어 방파제나, 항구, 하천의 이름, 큰 건물 등을 어느 정도 파악해 둔다. '그래도 길에서 길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다." 두원리의 골목길을 보고 싶어 잠깐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사용하지 않는 마을 우물을 만났다. 한때는 마을 주민들이 모여 물도 긷고, 빨래도 하며 지난밤 일어난 일들을 수다처럼 나누던 장소였을 텐데 지금은 폐목재가 우물 주변에 지저분하게 놓여 있다. 미리 습득한 정보에 의하면 옆동네인 유류리에 네 개의 우물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 이 곳에서 다른 우물을 마주하게 되었다. 우물은 마을의 생명을 유지해주던 공간이다. 우물을 메워버리지 않고 보존하려 한다면, 우물의 기능을 유지시켜 주어야 한다. 우물도 깨끗이 청소를 해주고 주기적으로 물을 길어 새물이 차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누가 하지?" 우물의 이야기를 찾고, 기록하고, 가치를 평가해 보존해야 하는 일은 개인이 하기는 어렵다. 마을 주민들이 한다면 가장 좋을 일이고 그것이 어려울 때에는 공공의 힘을 빌려야 한다.

오류고아라해변에 조성한 곰솔숲과 해변의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몽돌들
두원리의 마을우물(좌)(중)과 방파제 인근 언덕에 군락을 이루는 부채선인장(우)


바닷가에 늘어나는 건 펜션과 커피집뿐인데 이 마을에도 규모가 있는 펜션들이 계속 세워지고 있다. 두원리의 방파제 인근에도 새 펜션이 들어서고 있다. 방파제 근처 언덕엔 부채선인장이 무리 지어 자라고 있는데, 제주도에서 보던 선인장을 이곳에서 보니 새롭다. 부채선인장은 누군가 심은 것인데 남쪽이라 그런지 겨울인데도 잘 살고 있다.

해파랑길 12코스의 후반부는 바닷가로 갔다 길이 막혀 돌아 나와 걷다 다시 바다 쪽으로 가는 게 반복된다. 이럴 때 나는 "그냥 도로를 따라 쭉- 걸어간다." 계원리를 지나면서 인도가 없는 도로를 걸어야 한다. 특히 이곳은 산길인 데다 굽어져 있어서 도로의 갓길을 걷는 게 정말 위험한 일이다. 3년 전에 걸을 때는 해가 완전히 진 어두운 길을 걸어야 했는데 그럴 때의 위험은 몇 배 증가한다. 차들이 올 때마다 조심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길이다. 수성천 위에 놓인 양포교를 건너면 양포항이다. 오늘은 포항시내의 숙소를 예약해 두어 항까지 걷지 않고 양포삼거리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신라의 왕자가 경치에 취해 거닐었다는 계원리 해안의 소봉대와 바다낚시를 하는 사람들


keyword
이전 12화혼자 걷는 해파랑길, 살다보면 역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