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해파랑길, 살다보면 역사가 된다

11코스 : 나아해변 - 감포항. 17.1km

by 물냉이

해파랑길 11코스는 1,500년 전 신라의 역사를 따라가 볼 수 있는 길이다. 바닷길에서 만나는 유적은 잠시나마 우리를 과거 역사의 현장과 마주하게 한다. 이 길을 걸으며 신화를 생각하고, 기록으로 남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한다. 보통사람은 이름이 잊혀지고, 유명한 사람은 일상이 지워진다.


만파식적의 바다(나아 해변- 문무왕릉-이견대)

어쩔 수 없는 이라는 말이 반가울 때도 있다. 장거리 걷기에서 어쩔 수 없이 차로 이동해야 한다면 이것처럼 감사한 것도 없다. 걸으러 왔으면서 걷지 않는 걸 좋아하다니. 이런 걸 요령 피운다고 해야 하나, 그것도 적절한 말은 아닌데. 나아해변에서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간다. 근처에 있는 석탈해 탄강비로 가서 석탈해의 흔적을 확인하는 것도 좋은데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장거리 길을 걸을 때면 될 수 있는 한 최단거리를 따라 걷는다.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고, 이번에는 앱이나 트렉을 사용하지 않고 걷는데도 종종 안내판마저 무시하고 걸을 때도 있다. 몇 분 절약한다는 핑계로 무모한 길을 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럴 경우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절대 권하지 않는다. 안전이 제일이다. 버스정류장에 서있는데 친구로 보이는 두 사람이 와서 버스를 기다린다. 차림으로 보아 해파랑족이다. 버스를 타고 터널을 지나 봉길해수욕장까지 가는 내내 이 두 사람에게서 "띨롱"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앱을 이용해 걷고 있는 것 같은데 코스를 벗어나는 게 걱정되었는지 소리를 켜놓아서 주변 사람들까지 버스 안에서도 함께 걷는 느낌이었다. 사실 터널 옆으로 걸을 수 있는 터널이 하나 있다. 그런데 터널까지 가는 길이 위험하고, 간다 해도 터널을 닫아 놓았으면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이 터널의 용도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용 가능성을 이야기할 단계는 아니다.

친구로 보이는 두 사람이 문무대왕릉까지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문무왕릉을 설핏 보고 길을 걷는다. 대왕암의 가치나 의의를 생각하면 한참을 지켜봐야 하는데 그저 바닷가에서 멀뚱 쳐다만 보는 것이 전부여서 그 앞에 오랜 시간 머물게 되지 않는다. 3년 전 이곳을 걸을 때 해변에 가득 굿하는 분들이 차있어서 당황스러웠었는데, 그 뒤로는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는 바닷가까지 잘 가지 않게 된다. 봉길리 북쪽으로 대종천이 흐르는데 대종천 하구에 놓인 대종교를 건너 대본 삼거리 전에 감은사지로 빠져 제방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곳이 차량들도 많이 다니는데 횡단보도가 없어 무척 위험하다. 내 앞을 걷던 두 사람은 대본삼거리에서 길을 횡단해 인도가 없는 찻길을 위험하게 걷는다. 대종천 하구는 은어와 황어, 연어가 찾아오는 하구이다. 은어철이면 은어낚시를 하는 사람들로 하구가 북적거린다. 이 하구 안에 비용이 좀 들어도 경관을 해치지 않고 생태계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 규모의 섶다리를 만들어 걷기여행객들을 감은사지로 유도하면 안전과 길의 멋을 함께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복잡한 삼거리에 서서 망설이다 발길을 이견대 쪽으로 돌렸다. 이번엔 감은사지를 거치지 않고 이견대에 들르기로 한다. 문무대왕릉, 감은사지, 이견대 등은 모두 문무대왕과 그의 아들인 신문왕의 이야기를 지닌 곳이다. 이견대에서 앞바다에 떠내려 왔다는 섬을 상상해본다. 이 섬에서 잘라낸 대나무로 만파식적을 만들어 나라를 지키는 데 사용하였다. 강동원이 주연한 영화 '전우치'가 떠올랐다. 이 영화의 주된 소재가 만파식적이다. 이견대에 앉아서 만파식적을 불어볼까 하는데, 내가 악기치라는걸 깜박했다.

문무대왕릉(좌.2017년)과 대종천에서 은어낚시 하고 있는 사람들(중), 그리고 감은사지 석탑과 배경의 대나무숲(우.2017년)
감은사지에서 이견대로 넘어가는 뜸북재에서 바라본 대종천(좌.2017년)과 이견대에서 바라본 동해바다와 문무대왕릉(우)

이제 그만 쉬려무나(이견대-가곡항)

이견대를 떠나 바다와 마주한 대본리 골목길을 걷는다. 시골의 뒷골목이지만 아스팔트로 다 포장되어 있고 동해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어 걷기 편하다. 이대가 우거진 담장 벽에 붙여놓은 해파랑길 안내표식이 햇빛에 바래 알아보기가 어렵다. 그래도 이게 해파랑길 안내표식이라는 건 금방 알아본다. 소금기 든 바람과 강한 햇살에 시달리면서 열심히 길안내를 하다가 이제는 퇴역의 순간을 앞두고 있다. "얘야 수고했다." 바다가 보이는 데크길에서 가지를 아래로 향한 멋진 수형의 소나무 한그루가 말라죽어 있다. 나무에 표시된 것으로 보아서는 병에 걸렸는데 치료를 하다 죽은 것 같다. "너도 수고 많았다. 이제는 좀 편히 쉬렴." 대본2리의 버스정류장에서 잠시 쉬려 간이 의자에 앉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것, 누구를 기다리는 것, 기다리는 행위는 대가보다는 희망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빨리 돌아갔으면, 무사히 왔으면, 그다음의 일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다음도 없기 때문이다. 버스정류장에 누군가 편안한 소파를 갔다 놓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잠깐이라 해도 편히 앉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조금만 늦춰보면 여유 있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쉽지는 않겠지. 가곡항이 보이는 해변에서 낚시를 하는 할아버지는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 듯 풍경처럼 앉아 있다.

길가의 닳은 안내 표식과 죽은 소나무는 제 몫을 단단히 했다(좌.중). 버스정류장의 소파는 아직 자신의 할일이 남은듯 여유롭다.

나는 기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기를 잘하는 성격이어서 나를 붙잡아줄 든든한 무언가가 필요할 때가 많다. 가곡항에서 이런 망에다 해변의 몽돌을 넣어 만든 누름돌을 보았다. '그래, 주변에 있는 어느 것이든 잘 이용만 하면 때에 맞게 쓸 수 있을 텐데' 몽돌을 묶어 사용하는 것처럼 일상을 꾸밀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가곡제당에 서있는 소나무를 감상하다 그 옆에 앉아계신 김영순 할머니를 만났다. 올해 100살 이시라는 할머니는 웃으시며 당제 지내던 이야기를 해주신다. 나무건 사람이건 한 세기의 시간을 품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귀한 보물이 되는 것 같다.

몽돌을 넣어 만든 누름돌과 올해 100살 되신 김영순할머니와 마을제당

바다가 육지라면(가곡항-나정해변-전촌항-감포항)

가곡항에서 나정항에 이르는 구간은 자갈밭으로 된 해변이 길게 이어지지만 폭이 좁아 해변을 따라 걷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다니는 사람이 적고 경치가 아름다워 걷는 맛이 쏠쏠하다. 자갈을 밟을 때마다 '자그락'거리며 나는 소리는 걸을수록 반복되며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묘미가 있다. 그러나 막힌 길과 마주하는 불편함도 종종 생긴다.

나정항에 쓰러질 듯 페인트가 벗겨지는 낡은 조립식 건물이 눈길을 끈다. 낡은 것들은 그것에 익숙한 사람 외에는 대부분 불편하다. 하지만 낡은 것은 틈이 있다. 그 틈은 무언가 들어와 자리를 틀고 새로운 생명으로 발전한다. 낡음이 주는 여유이기도 하다. 낡은 담장 아래서 시작했다 콘크리트 포장에 갇혀버린 개쑥갓을 보며 세상의 한 면을 노크 없이 열어 본다. 나정해변의 모래는 밀가루보다 더 곱게 흘러내린다. 해변 주차장의 화단에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노래비가 있다. 경주가 고향인 정귀문선생이 노랫말을 쓴 이 가요는 조미미가 불러 전 국민의 애창곡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바다가 육지라면'은 어떻게 끓여야 하는 걸까? 공연한 아재 개그 한다고 하겠지만 자료를 찾아보니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독립영화가 있다. 상영시간이 41분인 이 영화는 7명의 인물이 출현해 라면과 얽힌 자신의 이야기와 라면 끓이는 법을 소개한다고 한다. 이 노래 안에 '철새라면'도 나오는데 그건 또 어쩌지.

자갈이 많은 해안(좌)과 가끔씩 통로가 막혀 있는 바닷가의 길. 이길의 경우 우회로가 있다.(우)
낡은 것의 아름다움이 느껴질 때가 있다(좌). 시멘트 틈에서도 살아가는 식물과(중), 국민에게 사랑 받는 노래비(우)

전촌항에서 감포로 가는 길은 바닷길이 어려워 산을 넘어야 한다. 곰솔이 숲을 이루고 벼랑의 경사면에 억새와 도깨비고비, 솜나물이 자라는 숲길은 파도소리가 속삭이듯 끝없이 벼랑을 타고 오르는 곳이다. 산길을 내려오는데에서 이대가 만든 터널길과 억새가 어깨 위로 자란 길을 지나간다. 길에서 만나는 식물들이 나를 포근히 감싸주거나 경호하듯 옆으로 서는 때가 있는데 바로 지금 같은 경우다. 사실 이것도 사람이 숲에 길을 낸 것이어서 식물들은 피해자의 입장이다. 내가 좋다고 할 때 또 다른 누구는 힘들어 할 수 있는 게 세상이다 보니 내딛는 한걸음도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지만 쉽진 않다.

감포항이 다가오면서 생선을 말리는 곳이 점점 많아진다. 생선들 틈에서 과메기도 잠깐씩 보인다. 벌써 포항에 가까워지고 있나 보다. 마을 식당에서 추어탕을 점심으로 먹고 힘을 내 감포항에 도착하니 길가에 걸어 놓은 양미리떼가 나를 반긴다.

해안가의 이대가 만든 터널길과 억새숲길
감포항으로 갈수록 생선을 말리는 곳이 늘어난다. 한 곳에서 제철을 준비하는 과메기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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