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10코스는 정자항에서 나아해변까지 바닷길을 따라가는 13.7km구간이다. 인간의 시간보다 훨씬 길고 깊은 자연의 시간을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구간으로, 파도에 깎여 작은 돌이 된 몽돌해안과 화산암이 냉각되며 생기는 주상절리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돌과 나무(정자항-강동몽돌해변-신명방파제)
대게 전문점들이 늘어선 정자항을 걷는다. 혼자 대게를 먹기도 그렇고 하루의 일정을 끝내고 머물며 쉬어가기에도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한다. 회센터 앞을 지나 정자항을 벗어나니 강동몽돌해변과 블루마시티의 고층 아파트군이 눈에 들어온다.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 한적한 바닷가 마을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기에 경천동지의 변화가 낯설기만하다. 전국에 저런 아파트가 수도 없이 늘어나는데 왜 집값은 연일 하늘을 뚫고 오르기만 한다. 바람 때문인지 오늘따라 파도의 흰 포말이 더 많이 보인다. 강동해변의 작은 몽돌들을 밟을 때마다 돌이 밀리는 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며 '강동화암 주상절리' 안내판이 서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다들 이곳에 오면 주상절리가어디 있다는 거지 하며 두리번 거리는데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안내판 옆에 서있는 사철나무 한그루다. 사철나무의 아랫가지를 쳐 곧게 만들고 잎이달린 작은 가지를 둥글게 다듬어 우산처럼 만들어 놓았다. 해수욕장 옆이라 사람들의 손을 타 제모습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그 모습을 잃지 않고 잘 버텨주는 것이 기특하다. "잘 지내고 있구나 별일은 없니?" 오랫만에 다시만난 반가움을 안부로 묻는다. 주상절리는 안내판에서 70m 정도 떨어진 해변에 위치하고 있다. 바다를 향해 층을 이루며 누워 있는 주상절리 보면 베게 같기도하고 쌓아놓은 철도 침목이 떠오르기도 한다. 오후의 붉은 햇살이 비추는 주상절리를 뒤로하고 자갈과 모래가 섞인 해변을 걸어 신명방파제까지 간다.
대게로 유명한 정자항 풍경(좌)과 멀리 보이는 블루마시티의 아파트들(우)
강동화암주상절리 입구의 우산처럼 생긴 사철나무(좌)와 베개모양의 누워있는 주상절리(우)
길 없는 길에서(신명방파제-지경방파제-관성솔밭해변-솔밭캠핑장)
신명 방파제에서부터 지경마을 사이에는 바위의 면이 시루떡을 층층이 쌓아 놓은듯 결이 나있는 바위들을 볼 수 있다. 마을 근처 해변의 바위 옆에 불길을 지핀지가 오래되어 보이는 아궁이가 있다. 아마도 바닷가에서 멸치를 삶았던 아궁이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버려졌을까. 이제는 멸치가 잡히지 않아서 사용할 일이 없어진 것일까? 아니면 멸치를 잡던 사람이나 배가 없는 것일까? 작은 목선들을 바다에서 끌어 올리거나 끌어 내던 나무 받침목들도 언제 사용했는지 반은 모래 속에 묻히고 반쯤은 썩어 있다. 사람이 사용하던 것들은 손길이 닿지 않을 때 빠르게 망가진다. 사랑할 대상이 없어지거나 사랑을 줄 주체가 없어지는것,어느 것이든 쓸쓸한 뒷모습을 남긴다. 서서히 어두워져 가는 해안길을 따라가다 보니 지경방파제를 지나쳐 파도로 끊긴 막다른 곳에 서고 말았다. 지경방파제에 도착하기 전에 도로 쪽으로 올라가야 했다. 어두워지는 바닷가로 밀려오는 파도는 나그네의 정신을 홀릴만큼 매력적이었다. 설마 길이 끊겨도 옆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겠지 싶었는데 길이 없다. 군부대의 해안초소가 있는 바위 절벽 아래로는 거친 파도가 치는 바위로 지나갈 공간이 없고 주변도 아찔한 절벽이었다. 날은 어두워져 가고 배는 고프고, 절벽을 보니 바위를 잘 타면 올라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시작된 바위타기. 바위의 중간쯤 올라갔는데 힘은 빠지고 더 이상 손을 내밀어 잡을 곳도 보이지 않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났다. 그때 나에게는 고소공포증이 있다는게 떠올랐다. 다시 내려가려 해도 바위를 타고 내려가다 사고가 날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다 떨어지더라도 한번 가보자 하고 손을 내밀어 바위를 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긴장한 때문인지 손이 덜덜 떨려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지만 겨우 올라갈 수 있었다. 풀섶을 헤치고 도로로 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걸으며 사소한 일에 사고가 날 상황을 자초하다니. 어리석었다. 길을 걷다가 잃었을 때 앞쪽으로 갈 길이 없으면 되돌아 나와야 한다.
아궁이가 있는 바위(좌)와 배를 끄는 받침목과 작은 목선(우)
관성해변에 도착했을 때 소나무숲은 어둠에 잠기고 우주선을 이고 있는 듯한 등들이 모래밭을 비추고 있다. 아무도 없는 모래밭을 걷는데 찬바람이 자꾸 고개를 숙이게 한다. 푹푹 발이 빠지는 모래는 무겁게 발을 잡는다. 그래도 도로로 나가 걷고 싶지는 않다. 관성솔밭이 끝나는 즈음에 수렴천하구가 바다와 만난다. 수렴천은 하구의 끝이 열린 하구여서 시냇물 정도의 폭으로 물이 흐른다. 평소에 잘 건넜던 곳이라 폴짝 뛰었는데 그만 발이 흐르는 물의 한복판에 떨어지고 말았다. 걷는 것이 지쳐서 그럴까? 판단력이 흐려서인지 오늘 여러 가지 실수를 한다. 물에 젖은 신발로 길을 걷는데 발가락이 시리며 감각이 무뎌온다. 겨울은 겨울이다. 수렴리의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하서해안공원 입구의 모텔로 들어갔다. 신발은 여름에 비를 맞으면 젖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수도 있다. 샤워를 하고 양말을 빨았다. 겨울철의 숙소는 건조하기 때문에 양말을 꼭 짜 불이 들어오는 바닥에 놓으면 아침이면 바짝 마른다. 여름에는 습기 때문에 마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젖은 신발은 비닐봉지 안에 넣은 후 입구를 오므리고 헤어드라이어로 바람을 넣어주면 빨리 마른다. 단 주의해야 할 것은 헤어드라이어의 소리가 시끄러우므로 늦은 밤에 하면 민폐를 끼치게 된다. 몸이 많이 긴장했던 하루, 가끔씩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차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한다.
등이 비춰주는 관성솔밭해변(좌)과 수렴천하구의 바다로 들어가는 물길(중), 어둠속의 안내판만 보이는 곳은 수렴리의 수호신인 할매바우가 있는 곳이다(우).
돌들의 길에서(솔밭캠핑장-하서항-양남주상절리-읍천항-나아해변)
해뜨기 전에 일어났는데 구름이 끼어서 인지 해를 볼 수가 없었다. 푹 쉬고 신발도 잘 말렸겠다 빨리 걸어야겠다는 생각에 7시에 숙소를 나왔다. 하서해안공원이 있는 하서리는 그리 크지 않은 곳이지만 장터가 큰 곳이다. 4일, 9일에 양남시장을 중심으로 오일장이 선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골목을 지나 문을 연 이모국수집에 들어가서 떡국을 시켜 먹었다. 아침을 먹고 나니 골목마다 장에 나온 마을 어른분들이 많아졌다. 지붕을 해 놓은 양남 물빛사랑시장 안으로 들어가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깔끔하고 잘 정돈된 시장이었다. 할머니들은 탁자 위에 집에서 가져온 대파, 시금치, 무 같은 채소를 올려놓고 파신다. 혼자 걸으면 사람들을 보기가 힘든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시장을 나와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춥기는 하지만 아침 공기는 산뜻하다. 하서항을 지나며 다시 누워있는 주상절리를 만났다. 눕고, 솟고 하는 양남 일대의 주상절리들은 기존의 서 있는 주상절리들과는 다른 형태여서 희귀함을 인정받는다.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면 기존의 관례라는 벽에 부딪쳐 포기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어디서고 홀로 독특한 형태를 유지하거나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해 내는 대상을 만나면 저절로 존경의 뜻을 표현하게 된다. 그 독특함의 뒤편에 있는 수많은 반대와 비난을 극복하는 과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 주상절리에 '미역'이라고 글을 써놓았다. 미역을 딸 수 있는 곳이라는 표시인지, 양식하는 곳이라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도 참 튀긴 한다. 저 글을 써 놓은 사람은 분명 주상절리의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하서항에서 주상절리 조망타워까지는 부채꼴, 누워 있는, 위로 솟은, 기울어진 형태의 다양한 주상절리를 만날 수 있다. 특히 보기 어려운 부채꼴주상절리가 있는 곳에는 전망대를 만들어 좀 더 높은 곳에서 이 희귀한 자연의 작품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전망대 가는 길 중간에 자갈과 흙이 섞여 있는 퇴적층을 볼 수 있다. 한 때는 바닷속에서 서서히 퇴적되었던 것이 융기되어 높이 올라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현재의 삶이 가라앉는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언젠가는 잘 다져진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나 그 가치를 발휘할테니 말이다. 읍천항을 지나 나아해변까지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나아해변에 다가가니 멀리 월성원전이 함께 눈에 들어온다. 저 나아해변의 안쪽의 소나무숲에 석탈해 탄강비가 있다. 신라의 기록들이 하나둘 가까워지는 경주이다.
아침식사를 떡국으로 해결했다. 추운 겨울에 걸을 때에는 따뜻한 국물이나 탕을 먹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양남시장의 장날 시장을 찾은 할머니들. 이른 아침이지만 반가운 벗이라도 만난 듯 할 이야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