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나 Jun 15. 2023

가출한 제정신 찾아요.

진심, 미쳤나 봐 나.

공고

가출한 제정신 찾아요.
어디서 가출한 건지 몰라요.
언제 가출한 건지도 몰라요.

아주 가끔 소리소문 없이 돌아오는데
 금세 뒤돌아 보면 없어요.

이제는 방황 그만하고
돌아올 때가 됐는데
돌아와야 되는데
돌아오지 않아 너무 걱정되네요.

제정신 보시면 꼭 연락 주세요.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서태지의 Come Back Home을 듣고 가출한 청소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나무 위키) 나의 정신에게도 Come Back Home을 들려줘야 하나? 도무지 나의 정신은 집에 들어올 생각을 안 한다.




여느 때와 같은 하루. 회사에서 일을 하던 중 남편이 사진을 보내왔다.


이게 왠 날벼락, 아니 날계란이다.


'뭐라고?'


이 글을 쓰는 나도 어이없는데, 읽고 있는 당신은 얼마나 어이없을까?


아침 드라마에 김치 싸대기가 있다면, 나의 기막힌 이야기 실제상황에는 날계란이 있다.




사건의 전개는 이러했다.


나의 남편의 최애 간식은 삶은 계란이다. 정확이 말하면 사무실에서 먹는 삶은 계란 두 개. 그의 말로는 사무실에서 껍질이 한 번에 말끔하게 벗겨지는, 잘 삶아진 계란을 한입에 가득 넣어 먹는 것이 그의 삶의 낙 중 하나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가능한 매일 그에게 계란을 싸주고 있었다.


6월 중순, 나는 일과 아카데미를 병행하기 위해 테니스 레슨 시간을 9시 15분에서 7시 25분으로 바꿨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만일 평소때와 같았다면, 나는 6시? 6시 반 사이에 일어나 계란을 삶고 아이와 아침 식사를 하다가 남편이 일어날 때쯤 레슨을 받으러 가는... 뭐 그런? 조금 바쁘지만 나름 평탄한 아침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 어느 때보다 순탄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날, 예견치 못한 일들이 일어난다.


전 날 저녁, 나는 당연히 아이가 나를 깨울 거라 예상하고 7시에 테니스 알람을 맞춰놓고 잠에 들었다. 알람을 맞춰놓은 이유도 내일 아침 일어나면 혹여나 테니스 가는 것을 까먹을 것 같아서였다.


다음날 아침, 웬 진동소리에 잠이 깼다. 진동소리에 눈을 뜨면서도 등골이 싸했다.


7시 알람이었다. 하지만 이 알람은 나에게 테니스 스케줄이 있다고 알려줘야 하는 알람이지, 나를 깨우는 알람이 되면 안 되는 알람이었다. 심지어 아이는 알람소리는 듣지도 못한 채 내 옆에서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아이를 깨울까 고민하다, 조금 더 재우기로 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찬물 한 모금으로 잠을 깨우며, 남편이 간식으로 가져갈 계란 2개를 찜기에 넣고 타이머를 15분 돌려놓았다. 타이머가 "짹깍짹깍" 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의문점이다.


내가 헛소리를 들은 것일까? 아니면 째깍되고 있었는데 코드를 꼽지 않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째깍되고 있었는데 전기를 켜지 않은 것인가? 그것도 또 아니면 째깍 되고 있었는데, 내가 기계에 물을 너무 조금 채워놓았던 것인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고 생각해도 도무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모르겠다.


이날 아이는 7시 15분까지 일어나지 않았고 (아이가 7시 이상 자는 건, 아플 때 빼고 손꼽아 1년에 1번-2번 있을 정도의 일이다) 나는 반쯤 일어난 남편에게 아이 아침식사 관련된 몇 가지 지침들을 내리고, 발에 불이 나도록 테니스코트로 달려갔다. 레슨이 끝나고 8시쯤 돌아오니, 아이와 남편이 밥을 먹고 있었다.


이런, 망했다. 왜냐고? 8시에도 아이가 밥을 먹고 있으면 무조건 지각 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쟁 같은 아침을 보내고 가까스로 늦지 않게 아이를 등원시키고 회사에 출근해 일을 하는 도중, 아래 메시지가 도착했다.


1번도 아닌 2번, 계란의 상태를 나에게 제차 확인시켜 주는 남편


나의 건망증을 오롯이 육아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육아를 하기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이러한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사건사고들이 부쩍 늘어난 건 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날짜도 모르겠고. 요일도 모르겠고. 핸드폰도 그리고 이어폰도 그리고 내 정신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계란은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혹여나 계란을 담아 갔던 통 뚜껑이 열러 남편 가방 안에서 계란이 터졌다면? 터져서 남편 회사 노트북과 마우스, 중요한 서류들이 무사하지 못했다면?


오늘 저녁 9시, 부부싸움 GO


이런 시나리오 아니었을까?


나도 안다. 이 모든 것은 잠이 부족해서라는 걸. 잠을 더 자야 된다는 것을. 이렇게 나의 몸을 혹사에서 글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시간은 항상 촉박하게 느껴지고, 나의 하루 일과 중 나에게는 잠이 제일 만만하다.


날 계란을 챙겨준 내가 너무 어이없기도 하고 그럼에도 기약 없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늦게 잠을 이룰 것 같아, 오늘도 반쯤 감 긴 눈으로 글을 쓰며 하염없이 가출한 나의 정신을 기다려 본다.

작가의 이전글 1년차_0526 내가 들고 있는게 펜인가 딸랑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