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걸작

쇼를 망친 돌고래 ep.1

by 민정

1993년 2월 7일, 대구의 한 산부인과에서 한 가정의 첫아들이 태어났다. 뽀얀 피부에 쌍꺼풀 없이 긴 눈매, 통통하면서도 살짝 쳐진 입매는 사랑받기 충분했다. 아이는 유난히 울음이 적었다. 어찌나 순했는지, 그의 어미는 '아들이 이렇게 착한데 딸은 얼마나 예쁠까?' 싶어 큰 고민 없이 둘째를 가졌단다. 유감스럽게도 첫 아이와는 영 다른 자식이 나왔지만.


그는 똑똑했다.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영재라는 소리를 자주 들을 만큼. 아들의 가능성을 엿본 엄마는 위장전입까지 해가며 당시 손꼽히는 학군지로 자식들을 전학시켰다. 치맛바람이 상당하던 동네에서도 그는 뒤처지지 않았고, 명문고 트랙을 군말 없이 돌았다. 싫은 소리 한 번 할 줄 모르는 결함 없는 인형. 내가 기억하는 한 사춘기마저 고요하게 지나온 외계 생명체였다. 엄마의 기대가 꺾일 틈이 없었다.


고집 없이 똘똘한 그는 하필 집안의 첫 손주이자 손자였다. 숨 막히게 보수적인 가문에서 장손이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우연찮게 가장 먼저 태어난 아들이라는 이유로 온 가족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됐다. 집안에 공부로 성공할 자식은 한 명이면 족했다. 그리고 그들의 한 명은 언제나 예외 없이 장손이었다. 제삿날이면 며느리와 손녀들은 절 한 번 올리지 못한 채 부엌데기가 되고, 남자와 여자 밥상이 계급장처럼 나뉘던 풍경, 그 속에서 내가 느꼈을 갈증을 말해 무엇할까. 조부모 댁 창고 방은 장손에게만 허락된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바로 다음 주자로 태어난 나는 쓸데없이 눈치가 파삭했다. 가자미 같은 눈을 요리조리 굴리다, 기어이 은밀한 용돈 수여식을 알아채곤 했다. 아,씨. 또 오빠야만 몰래 돈 줬나? 툴툴거리는 나를 보며, 그는 제 몫의 일부를 떼어주거나 맛있는 배달 음식을 시켜주며 내 입을 막았다. 받은 사람이 임자지. 나라면 절대 나누지 않았을 텐데. 멍청한 그는 저밖에 모르는 동생을 은근히 챙겼다.


성적이 떨어지면 매질이 시작됐다. 썩 괜찮은 석차였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도려내고 홀로 선 어미의 결핍을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엄마는 불안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 불안은 자식의 목을 조르는 것으로 해소되었다. 어느 날은 아들의 성적이 고꾸라졌다는 이유로 그의 책들을 아파트 소각장에 처박았다. 그 모습을 보고도 제 살길만 찾던 나와 달리, 그는 내가 맞을 때마다 한사코 막아주려 애쓰곤 했다.


내 오빠는 그런 인간이었다. 가부장제의 추악한 단물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그 갑갑한 축복이 제 동생에게만은 닿지 않기를 바랐던, 그리도 바보 같은 인간이었다.




그동안 이곳에서 함께 호흡 해주신 독자분들 덕분에 해당 브런치 북이 『쇼를 망친 돌고래』라는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출간 및 콘텐츠 보호를 위해 기존 연재분은 1화 외 모두 삭제되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온라인의 글을 다듬고 보강하여, 손에 잡히는 온기 속에 더 밀도 높은 진심을 담았습니다.

곧 펀딩 페이지에서, 그리고 서점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 2026.3.12 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