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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시작

쇼를 망친 돌고래 ep.3

by 민정

엄마의 불행이 온 집안에 물 흐르듯 번져갔다. 꼬여가는 혓바닥만큼 자식들의 장래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날 선 눈동자로 성적표를 더듬거리다, 성에 차지 않는 숫자를 마주하면 폭언을 일삼았다. 어떤 날은 술에 취해 내 중학교 담임에게 전화해 “이래 가지고 민정이 인문계 고등학교 갈 수나 있겠냐.” 따져 물었고, 어떤 날은 성적표를 갈기갈기 찢으며 다니던 학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했으며, 또 어떤 날은 책상에 쌓인 우리의 문제집을 소각장에 버렸다. 정말 답이 없는 석차였다면 억울하지나 않지. 우리 남매는 학업에 꽤 소질이 있었다. 이럴 거면 다 때려치우라는 그녀의 말에 “진짜 때려치운다는 게 뭔지 보여주겠다.”라며 완전히 연필을 내려놓기까지는.


공부만큼은 빚을 내서라도 시켜주겠다던 엄마는 학업과 관련 없는 모든 활동들을 제한시켰다. 빡빡한 통금 시간을 정해놓고, 지켜지지 않을 때마다 회초리를 들었다. 당시에는 교내 체벌이 허용됐는데, 같은 반 학우들이 선생님께 맞을까 초조해할 때 나는 “그냥 한대 맞고 치우지 뭐.”라며 여유 부릴 만큼 체벌에 익숙했다. 하교 후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다가도, 카페에서 수다를 떨다가도, 밖에서 뭐 하냐며 당장 집에 들어오라는 불호령이 떨어지면 주변인들의 동정 어린 눈빛을 뒤로한 채 귀가했었다. 어쩌다 한 번 친구 집에서 자고 오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니, 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보수적이고 강압적인 지붕 아래, 우리 집 희망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오빠의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거뜬히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던 학교와 조금씩 멀어지더니 기어이 수능을 망치고 말았다. 갈만한 대학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영 탐탁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재수를 결심했다.


나중에서야 들었지만 오빠는 재수를 하겠다고 선언한 지 한 달 만에 그 말을 뱉은 걸 후회했단다. 여느 평범한 남매가 그렇듯, 나는 그 이유를 캐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가끔은 우리가 그때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눴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상상해 보지만 엎질러진 비극을 주워 담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흘렀다. 재수를 시작한 오빠는 우리가 살던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손의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가 오래전 남이 되어버린 며느리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제 집이 학원과 거리가 가까우니, 편히 공부하기 위해 오빠를 그곳에서 지내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좋은 대학에 보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준비가 되어있던 그녀는 학업에 열중해야 하는 아들을 위해, 흔쾌히 동의했다. 며칠 후 그의 짐은 모조리 할아버지 집으로 옮겨졌다.


뒷바라지가 덜어지며, 엄마 역시 전보다 편한 일상을 보냈을 거다. 그렇게 하루, 이틀, 몇 달이 흘렀을까.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부쩍 말수가 줄어든 후 가족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법이 없던 아들의 통곡 섞인 전화.


"엄마.. 제발 내 좀 집으로 다시 데려가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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