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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정 Jul 16. 2024

장손 사표

지극히 완벽한 몰락

눈물 젖은 그의 목소리에 다급해진 엄마는 곧장 나를 태워 할아버지네로 향했다. 차로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 거칠게 밟아댄 엑셀만큼이나 격앙된 손길로 초인종을 눌렀다. 현관문이 열렸고, 더듬거린 시선 끝에는 퉁퉁 불어 터진 엄마의 아들이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오빠, 나. 다섯 명이 동그랗게 바닥에 둘러앉았다. 어색한 적막을 깬 건 엄마였다. 그녀는 아들을 도로 데려가겠다 선언했다. 고귀하고 잘나신 장손을 쉽게 내어줄 리 없지.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오빠의 성실치 못한 학업 태도를 지적하기 시작했다. 그는 울부짖었다. 책상 앞에 앉은 제 등짝을 밤새도록 뚫어져라 응시하는 조부 탓에 정신병이 올 것 같단다. 늘어난 주름만큼이나 고집스럽던 내 할아비는 자신이 손주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음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차례의 언쟁이 오갔고, 누군가 자리를 박차며 소리쳤다.


"씨발!!! 무슨 말이 통해야 대화를 하지."


오빠였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지거리를 기어코 내뱉더니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남겨진 자들의 동공이 소리 없이 확장됐다. 자라는 내내, 어른들 앞에서는 더욱이 싫은 소리를 못하던 그의 입에서 상스러운 말이 쏟아졌으니 적잖이 놀랐을 테지. 곧이어 차키를 집어든 엄마가 오빠의 뒤를 쫓았고, 나는 짐을 챙기기 위해 그가 머물던 방에 들어섰다. 실오라기 하나 남기고 가지 않겠다는 듯 꽁꽁 싸인 가방들. 그 묵직함을 가득 실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제 아들이 괴롭힘을 당하자 영웅처럼 등장했던 엄마는 그를 못살게 구는 또 하나의 악당이 되었다. 늘 그랬듯 술을 마셨고, 밤새 주정을 부렸다. 아, 레퍼토리가 늘었다. '내가 니 재수시키겠다고 얼마나 뼈 빠지게 일하고 있는데'라는 멘트와 함께. 내 새끼는 나만 쥐고 흔들 수 있다는 심보인가? 순한 양이 맹수로 변하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그녀는 위기감을 느낄 줄 몰랐다.


어른들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이 그는 더 망가져갔다. 재수 학원에서 꼭 저 같은 것들이랑 어울리더니 펜이 들려 있어야 할 손에 술잔을 쥐고 있는 날들이 많아졌다. 취기를 이기지 못해 인사불성이 된 어미를 그토록 원망하며 살아 놓고 똑같은 인간이 되어버린 거다. 당연히 수능도 망쳤다. 내 기억에 의하면 현역 때보다 더 꼬꾸라진 상황. 결국 안중에도 없던 집 근처 대학에 입학했고, 그마저 첫 학기에 학사 경고를 받았으며, 그대로 자퇴생이 되었다.


집안의 미래, 존재 자체로 추앙받던 장손이 몰락했다. 영민하던 두뇌도 장난기 많던 미소도 산산이 부서졌다. 방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무언가를 부시고 죽이는 소리로 가득 찬 헤드셋으로 두 귀를 틀어막고, 한 손에는 타들어가는 담배를, 한 손에는 마우스를 쥔 채 가상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생 패배자. 히키코모리만 남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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