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머리를 잘랐다. 허리까지 닿던 긴머리를 싹둑, 목선이 훤히 드러나도록.
미용실 문을 열기 전까지 나는 이번에도 한참을 망설였다. '짧은 머리가 어울리긴 할까? 긴머리만큼은 아니겠지?' 내가 원하는 모습과 사람들이 좋아할 모습 사이를 오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그러다 겨우 내 쪽으로 추를 기울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줄곧 긴머리였다. 짧게 자르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 때면 아빠는 어김없이 말했다. "아깝게 왜 잘라. 긴머리가 제일 잘 어울리는데. 짧은 머리는 언제든 할 수 있지만 기르려면 한참 걸리잖니." 귀에 굳은살이 박일 만큼 들은 말이었다. 용기를 내어 짧게 자르고 돌아온 날이면 "지금도 어울리긴 하지만 긴머리가 더 예쁘다"는 말이 어김없이 뒤따랐다. 그 말이 쌓이고 또 쌓이며, 나는 언제부터인가 긴머리야말로 가장 예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모습이라는 생각을 사실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깊은 곳에서 작은 목소리가 삐죽 하고 나왔다. 내 안의 자아가 이대로 괜찮겠냐며 쿡쿡 찔러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며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개인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 속에서, 오랫동안 눌러두었던 자아가 기지개를 켰다. 해보고 싶었던 머리 스타일을 하나씩 시도하며 해방감을 맛봤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산다는 것이 이토록 당연한 일인데, 그러지 못했다는 사실이 새삼 억울했다. 그러면서도 아빠에게서 수없이 들어온 그 말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해방감과 잔상이 뒤섞인 채 일본에서의 시간이 흘렀다.
귀국 후,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의 생각들이 다시 조용히 스며들었다. 어느새 나는 또 긴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한국 사회의 시선과 아빠의 기대를 거스르지 않는 편이 마음 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본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찾아 헤맸던 내가 다시금 물속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한 발짝 물러서서 그 긴 머리에 대한 집착을 응시해 보니 비로소 보였다. 아빠가 긴머리를 끊임없이 권했던 건, 그저 그것이 그의 취향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눈에 예뻐 보이는 모습을 딸에게 투영하고 싶었던 마음, 그뿐이었다. 아무리 반복되는 다정한 조언일지라도 그것이 정답은 아님을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그것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가벼운 '한 사람의 의견'으로 흘려보냈어야 했다.
그 깨달음을 지나, 나는 다시 미용실로 향했다. 미용사가 물었다. "엄청 많이 자르시는 건데, 아깝지 않으세요?" 나는 웃으며 답했다. "머리는 잘라도 어차피 다시 자라는걸요.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지속적으로 주입된 이야기에 길들여진 사람은 때로 스스로 판단할 힘을 잃고 무력해지곤 한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머리카락을 자르는 사소한 일이, 나에게는 거대한 관성을 거슬러야 하는 치열한 투쟁이자 망설임의 시간이 되기도 하는 이유다.
거울 속의 나는 한결 산뜻해졌다. 내가 원하던 모습으로 서 있는 지금, ‘진작 자를 걸‘이라는 후련함이 밀려온다. 분하게도 무의식 한편엔 여전히 '긴 머리의 나를 사람들은 더 좋아하겠지'라는 잔재가 남아있지만,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준 덕분에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다. 이제 나는 머리 스타일을 넘어, 타인에 의해 주입된 선입견과 강박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살피는 중이다. 비로소 나와 더 가까워진, 참 애틋한 순간이다. 가벼워진 머리카락만큼이나, 내 삶의 무게중심도 이제야 오롯이 나에게로 옮겨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