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오른발은 어디로 가니 - 강석희 외
사람이 몸이 힘들거나 머릿속이 복잡하면 중요한 걸 잊을 수 있다는 걸 요즘 몸소 경험하고 있다.
공방 휴대폰 알림 내역에 뜬 '+1'이 붙은 연재 권고 안내를 보고 나서야 연재를 까먹었다는 것을 알았다.
많이 놀랐다.
휴재 예고한 후 사고가 터지고, 개인적인 일로 경찰서에 가 고소장을 접수하면서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어느 정도 수습이 되어 글을 써본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청소년소설 작가들의 앤솔러지 작품집인 [너의 오른발은 어디로 가니]라는 책이다.
동화작가와 소설가가 쓴 청소년 돌봄에 관한 단편소설집으로 실린 모든 소설들이 흥미로웠다.
'돌봄'은 나이가 많은 이가 적은 이를 돌본다고만 생각했다. 아직 나는 아이를 돌봄 중이지만 이 아이들이 자라나면 나를 돌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에피소드는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돌봄이 담겨 있다. 이런 이들까지 돌봐야 하나 싶을 정도의 돌봄도 있다.
소설책을 펼치면 강석희 작가의 소설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순서는 어떻게 정했을까? 작품이 좋은 순서였을까? 생각을 했는데 여기에 모든 실린 작품들이 다 좋아 이 책을 편집한 이의 의도대로 'ㄱㄴㄷ' 순이 맞아 보였다. �
<녹색 광선 - 강석희>
� 재밌었다. 이모의 바닥을 보는 게. 도대체 뭘까, 나라는 것은. 왜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일까. 어째서 나는 나로 살 수밖에 없는 걸까. p21
장애를 가진 이모가 나를 돌보았다. 제한적인 신체를 가진 이모를 내가 돌보기도 한다. 나는 이모에게 모진 말을 해 상처를 주기도 한다.
더 이상 밖의 세상을 탐하지 않는 이모를 보니 마음도 아프다. 흑돌을 가지게 된 나는 이모에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 책에 실린 소설 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낙원 - 김다노>
�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이 도시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 어디인지 내다봤다. 빽빽한 아파트들에 막혀 하늘조차 조각나 있었다. p56
멀리 달아나고픈 나. 엄마도 나보단 같이 사는 악어를 걱정한다. 처음엔 반려동물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읽자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방 문 앞에서 '아빠'를 부르는 나를 보며 그 짐작이 맞다고 생각했다. 멀리 달아나지 못하는 모녀가 안쓰러웠고 이 돌봄은 악어가 죽어야 끝날 것 같다.
가정폭력에 관한 내용이다 보니 만화 '여중생'이 생각났다.
<샤인 머스캣의 시절 - 백온유>
� 차라리 화를 내지. 그렇게 연기하듯 속에도 없는 말 하지 말고. 정말 화를 냈으면 그것대로 섭섭해했을 거면서 나는 차라리 지우가 나를 나무랐으면 낫지 않았을까 상상했다. p89
아나필락시스 쇼크가 그렇게 위험한 줄 몰랐다. 복숭아를 못 먹는 지우를 위해 조심했지만 복숭아를 먹은 손을 잡은 지우는 쓰러진다. 복숭아 향을 맡고도 쓰러진다. 이 커플이 괜찮은 관계로 계속 지낼 수 있을까 걱정도 됐다. 하지만 훨씬 더 어른스러운 면모를 보인다.
백온유작가는 돌봄에 관한 소설을 자주 내는 듯하다. [유원], [경우 없는 세계], [페퍼민트]등 돌봄이 필요한 이들의 이야기, 돌봄을 해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잘 풀어낸다.
� 내가 만나 본 사람 중에서 네가 제일 섬세해. 조금 더 느슨해지면 어떨까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억지로 느긋해지려 노력하지 않아도 돼. 이대로도 좋아. p102
서사가 탄탄하니 문장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바코드 데이 - 위해준>
�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이 됐다. 씹어도 씹어도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던 퍼펙트바가 조금은 고소하게 느껴졌다.
이 작품은 소재가 참 신선했다. 바코드를 찍으면 연인여부를 알 수 있다는 설정이 참 재미있었다. 부작용? 당연히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관계를 되짚어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사춘기 아이들에게 관계선택에 있어 외모가 중요한 요인을 차지하는 것은 아직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깊숙이 들어와 있다.
<너의 오른발은 어디로 가니 - 전앤>
� 마음을 다해 무언가를 좋아하는 일이 이제 두려워.
건조하게 말하는 얼굴이 더 슬퍼 보여서 섣불리 위로를 건넬 수 없었다. p161
표제작인 이 소설은 축구를 소재로 삼아서 재미있게 읽었다. 영상을 공유하며 구독수에 집착하는 나는 오른발이 점점 작아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때는 오른발 덕분에 유명세를 얻었지만 지금은 오른발 때문에 걷는 것도 힘들다. 항상 곁에 있었던 친구들을 다시 보게 되고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될 때 그 당황스러운 느낌은 느끼고 싶지 않다. 그 느낌 아니까.
<귀여워지기로 했다 -최영희 >
� 말에는 힘이 있거든. 그래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다 보면 스스로 설득이 돼. p177
� 녀석은 19년 전, 단 한 명의 어린이에게 받았던 호의를 되새기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p195
� 므두셀라에게 인사 전해 줘요. 석양에 내 몸이 반짝거릴 때 사진 몇 장만 찍어 달라고도 전해주고요. p203
놀이터에 머리띠를 하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춤을 추는 로봇이 나타난다면 어떨까? 제프는 아이들 앞에서 노래도 들려준다. 어른이 보는 시선과 아이들이 보는 시선이 전혀 다르다. 제프와 므두셀라를 모두 곁에 둘 수 있게 되어서 행복했다.
최영희 작가 특유의 유머가 숨어있는 작품이다. 최근 동화보다는 SF소설을 많이 펴내고 있는 작가의 신작은 늘 새롭고 흥미롭다.
<가방처럼 - 황보나>
� 인터넷 속의 사람들은 수현이가 굉장히 별나고 또 두려워해 마땅할 아이인 것처럼 말을 얹었고, 사실과 다른 글자들을 읽다 보면 지독하게 피곤해지곤 했다. p218
이 소설에는 할머니가 등장한다. 위생적이지 않는 할머니의 행동을 이렇게 잘 묘사하는 작품이 있을까 싶다. 읽는 동안 내내 입모양이 'ㅅ'이었다.
이 소설은 굉장히 따뜻했다. 발이 시리지 않도록 운동화를 데워준 할머니가 떠난 후 알게 되는 장면이 남는다.
너도 가방 해.
내가 진짜 가방이고 너도 진짜 가방이라면 너 나중에 힘들 때 가방 안에 숨어. p229
굉장히 따뜻했던 소설집.
'돌봄'이라는 주제라 자칫 무겁기만 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읽는 내내 미소가 떠올랐던 책이다.
어쩌면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돌봄'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