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좀(Rhizome)이란?”
리좀은 땅 속에서 수평적으로 뻗어있는 땅속줄기를 뜻한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저서 『천 개의 고원』에서 철학 용어로 사용하면서 유명해진 개념이다. 리좀은 하나의 중심을 갖는 수목의 체계와는 다르게 중심 뿌리 없이 접속되고 분화되고 단절되며 연결되는 유목적인 체계다. 즉, 리좀은 무엇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의미가 변화하는 가변적인 체계로서 언제나 과정 속에 있다.
리좀은 ‘지도 그리기’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지도’를 한 번 떠올려 보자. 지도는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어 여러 군데에서 접속이 가능하며, 언제든지 변형될 수 있다. 새로운 접속 가능성을 허용하고, 하나의 중심으로 통일되지 않는다는 특성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가 《이것 역시 지도》 (2023. 9. 21. ~ 11. 19.)라는 전시 제목을 붙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비엔날레에 전시된 작품들은 지도에 표시된 영토 밖의 생태계에서 관계맺기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지도학에 따른 지도가 제시하는 합리주의적 명확성에 반기를 들고, 추상적이고 감춰졌거나 모호한 언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세계의 복잡성, 불명확성, 다중성 등을 다룬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전시로 읽힌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2000년 ‘미디어_시티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2000년도의 사회 분위기는 ‘밀레니엄’, ‘IT 강국’, ‘세계화’ 같은 구호들이 등장한 때였다. 미디어 기술이 가져온 정보환경의 변화는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다양한 사업 구상으로 이어졌다. 서울시 또한 새로운 세기를 주도하기 위해 예술, 과학, 산업을 접목한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으로 ‘미디어_시티 서울’을 구상한다.
이후 제2회부터는 국제행사를 표방하면서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라는 이름을 썼고, 제6회부터는 다시 제1회의 명칭으로 돌아갔다. 명칭을 바꾸는 것이 다소 혼란스러운 느낌일 수도 있지만, 사실 ‘미디어’는 계속해서 의미가 변화하는 만큼 확장된 의미를 담고자 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디어(Media)는 ‘중간’이라는 뜻을 가진 미디엄(Medium)에서 파생된 단어로, 중간 또는 전달의 역할을 하는 ‘매개체’를 의미한다. 예전에도 중간자 역할을 하는 매개체는 존재했지만, 텔레비전과 라디오, 영화 같은 매스미디어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미디어로 불리게 되었다. 미디어가 예술을 만나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미디어아트(Media Art)이다.
그런데 어떤 ‘미디어’가 주요 매개로 쓰이느냐에 따라 미디어아트를 부르는 명칭은 계속해서 변화해왔다. 60년대에는 ‘비디오 아트’, 70년대에는 ‘컴퓨터 아트’, 80년대에는 ‘멀티미디어 아트’, 90년대부터 지금까지는 ‘뉴미디어 아트’로 불리는 식이다. 물론 이 또한 고정된 의미나 통일된 명칭은 아니다.
국내 미디어아트는 90년대 들어 크게 성장했다. 그 배경에는 ‘세계화’, ‘정보화’를 강조하는 사회적 흐름이 있었고, 정부 또한 기술 기반의 미디어 전시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었다. 미디어아트는 80년대까지만 해도 ‘실험미술’이라는 용어로 뭉뚱그려지던 경향이 있었는데, 90년대 들어 미술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한다.
이번 비엔날레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을 비롯해 서울 시내 전역의 전시장 곳곳에서 열렸다. 먼저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면 토크와세 다이슨의 신작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나는 그 거리에 소속된다>는 ‘건축적 조각’으로 표현된 것으로, 공간에서 발생하는 감각과 지각에 집중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다이슨은 공간적 자유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탐구해온 작가이다. 그는 착취와 억압의 체계로 읽힌 폭력성을 주로 다루는데, 이러한 주제는 공간적 형태에 결합된 인체 크기의 조각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지울 수 없는 선과 기하학적 형상을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언어로 활용해 인체의 관점에서 형태와 공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러한 작품은 최근 몇 년 간 전 세계 비엔날레가 다루는 공통적인 주제인 ‘탈식민주의’와 연관이 있다. 탈식민주의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문화적 유산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이 출간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를 거쳤기 때문에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과 이론적 실천이 있었고, 특히 90년대 들어 탈식민주의에 대한 사상적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비엔날레가 ‘탈식민주의’를 다루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엔날레는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가야트리 스피박이 말하는 ‘서발턴(Subaltern)’ 개념이 잘 드러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서발턴은 하위주체를 뜻하는 말로, 젠더, 인종, 계급 측면에서 배제되고 지워진 타자들을 의미한다. 비엔날레에서는 서발턴의 목소리를 통해 서구의 인식론적 폭력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주로 등장한다. 토크와세 다이슨의 작품은 권력 구조와 식민주의 역사를 추적한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다.
1층 전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보이는 작품 중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아구스티나 우드게이트의 ‘지도’ 작품이다. 작가는 2012년 작 <세계 지도>를 출발점으로 삼아 지도 그리기와 기술에 관해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주는 <신세계 지도>를 제작했다. 원작은 지도와 색인 페이지를 사포로 문질러 국가, 국경, 정치적 지표, 주요 랜드마크 등의 지도학적 재현을 지운 550쪽 분량의 지도책이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새롭게 구성된 설치에는 지도책을 자동으로 넘겨주는 기계 장치와 책장이 넘겨질 때마다 책을 스캔하는 자동 스캐너가 추가되었다. 이와 같은 시도는 풍경을 상상하고 확산하는 도구이자 매개가 되는 지도와 동시대 기술의 역할을 강조한다.
지도를 주제로 삼은 또 다른 작품으로는 아나 벨라 가이거의 <기초 지도 1~3번>이 있다. 아나 벨라 가이거는 브라질에서 활동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술가로, 남미의 개념미술과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회화, 프린트, 드로잉, 조각, 사진, 포토몽타주, 영상 등 다양한 매체와 방식을 가로지르는 그의 작품은 신체와 자아의 표현, 브라질 역사, 문화적 정체성, 정치적 투쟁 등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면서 특유의 비판적인 논평과 여성주의적 관점을 표현한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선보이는 <기초 지도> 연작은 상의를 걸치지 않은 작가가 브라질 지도를 그리는 장면을 담아낸 작품이다. 이 비디오 연작은 사회, 정치, 사상, 문화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성찰의 결과물이자, 영토의 의미를 재정의하여 이전 세대가 물려준 세계 질서를 다시 쓰려는 지난한 도전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2층 전시장 입구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오렌지 그리드>입니다. 신발을 벗고 공간 안으로 들어가 작품 사이를 거닐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이 작품은 ‘소나키나토그래피’라는 작가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나키나토그래피’는 ‘소리’와 ‘움직임’이라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작가는 1부터 8까지의 숫자를 자신만의 체계로 해석한 뒤, 각기 다른 색상을 배정하여 시간, 움직임, 소리, 리듬의 주기를 표현했다.
전시 공간의 바닥과 벽을 뒤덮은 격자무늬 안에는 검은색 정육면체가 여러 개 놓여 있고, 관객은 이것을 직접 움직여서 다각형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 고정된 조건을 바꾸기 위해 개입하는 인간의 모습을 은유하면서 작가가 만든 시공간의 조건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2층 전시장 안쪽에서는 <이시비바네>라는 독특한 작품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 작품은 남아공 지질학 전문가와의 오랜 협업을 기반으로 구축된 일종의 ‘암석’ 아카이브 작품이다. 이와 같은 협업은 박물관이 소장한 암석 컬렉션을 복제해서 아카이브에 접근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로 이뤄진 것이다. 3D 프린터로 출력된 오브제가 쌓여 있는 형상은 돌무덤을 재현하지만, 동시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오브제는 그 자체로 진짜 암석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관람객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미술관 3층에 위치한 서점의 한쪽 편에 있는 왕보의 <인테리어 분수>도 독특하다. 이 작품은 싱가포르의 열대 자연과 인간이 만든 기후 규제,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이 머무는 기숙사의 형광등을 엮어 만든 가상의 폭포이다. 작가는 인공 폭포를 통해 1970년대 한국의 산업화를 이끌었던 조명과 실내장식 서사를 반추하며, 현대 도시의 아이러니를 풍자하고 묘사하는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작품의 플라스틱 조화와 형광등은 서울의 남대문 상가와 을지로 조명 거리에서 구입한 재료들이라고 하는데, 왕보는 이러한 재료들을 통해 자본주의와 글로벌리즘의 팽창으로 야기된 동시대 사회 구조를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전시 작품 중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작품은 최윤 작가의 〈마음이 가는 길〉이었다. 미로 같은 형태의 설치 사이에 비디오가 함께 놓인 작품인데, 미래에 관한 암울한 전망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한다. 작품에는 편의점, 지하철 통로, 거리의 식당, 노점 등 한국의 풍경들이 나오며, 사무실의 회색 칸막이,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체리목 무늬 몰딩, 형광등, 꽃무늬 담요 등과 같은 일상적인 모습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러한 소재들을 이용해 초현실주의적이면서 때로는 악몽과도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인류 공동의 미래와 개인적인 욕망을 그리는 독특한 영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3층의 좌측에 위치한 전시실에서는 프랑소와 노체의 <코어 덤프>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코어 덤프>는 전자 폐기물과 비디오로 이루어진 설치 작품이다. 스스로를 ‘폐품 수집가’라고 부르는 작가는 전자 폐기물을 수집하고 재조립하여 폐기된 사물의 이면에 은폐된 주제를 시각화한다. 이 작품은 재료의 생산, 소비, 유통, 그리고 폐기 처리까지 범지구적 정보기술 생태계를 탐구하며, 자본주의의 디지털 가상성을 드러낸다. 또한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비디오 4편은 불확실성과 지속불가능성이 충돌하여 붕괴가 임박한 디지털 신경계를 묘사한다.
작가가 주요 전략으로 삼는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파운드 푸티지는 ‘습득영상’, ‘우연히 찾은 영상’ 또는 ‘발견된 영상’을 뜻하는 말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물질과 개념을 파괴하고, 해체와 파편을 반복하여 콜라주로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시공간의 구축을 도모하는 구성을 의미한다. 파운드 푸티지는 출처를 알 수 없거나 이미지의 시각적 분간이 어렵더라도 단독적인 예술품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된 작품 외에도 이번 비엔날레는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과 여의도에 위치한 SeMA 벙커 등에서도 전시가 진행됐다. 전시된 작품들은 다양한 형식의 지도 그리기를 선보이면서 우리로 하여금 다양한 생각의 연결을 촉진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영토적 경계를 넘어 여러 가지 정체성을 담아내는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소통과 교류를 느껴볼 수 있다.
본 글은 '프럼에이'에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