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운 좋게 얻은 웨이터 일이 자랑스럽다. 나름 말쑥하게 차려입고, 영어로 손님들과 대화하는 번듯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서빙 아르바이트와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장소가 호주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호주에서 웨이터 일을 할 정도로 인정받는 영어 실력을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웨이터 일이 전반적으로 쉽긴 하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바로 영어다. 그는 자신의 영어가 능숙하다 생각했지만, 그가 할 줄 아는 영어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가 구사하는 영어는, 그동안 일하면서 배운 영어가 대부분이다. 그의 영어는 간단한 일을 하는 상황에 최적화되었을 뿐, 일상 회화를 물 흐르듯 진행할 수 있는 수준에서 한참 뒤처진다. 문제는, 웨이터 일을 하다 보면 일상 회화 정도로 영어를 구사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는 점이다.
가격이 비싼 고급 음식점, 말쑥하게 입은 겉모습 때문에, 손님들은 그가 영어를 잘 구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의 영어 밑천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대놓고 답답해하는 손님은 없다. 친절하게 천천히 말해주는 손님이 대다수다. 하지만 고용주들은 그에게 조심하라고 말한다. 아주 간혹 가다가, 호주까지 와서 생활하면서 왜 영어를 못하느냐고 불만을 제기하는 손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웨이터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영어 실력도 향상될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웨이터 일을 하면서 배운 영어는, 그가 이전에 배웠던 영어에 추가로 패턴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에 불과하다. 주방 보조 영어, 공장 노동자 영어, 건설현장 영어, 청소 영어, 여기에 웨이터 영어 패턴이 하나 추가된 것 뿐이다. 웨이터 일을 하면서도, 쓰는 말만 계속해서 쓴다. 그가 주로 쓰는 말은
주문을 받을 때 : May I take your order? / Can I take your order? / Ready to order?
주류를 물을 때 : What about drink? / How about drink?
손님이 부를 때 : Yes? / Can I help you? / How can I help you?
위의 세 경우만 외우면, 이외에는 그저 손님들이 식사하는 동안 뒤에 서 있으면 된다. 말을 그리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가끔씩 정해진 패턴에서 벗어나는 상황이 생기면, 그는 자신의 영어로 상황을 타개하지 못해 당황한다. '무엇을 시키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이걸 시키겠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데, '이건 무엇이죠? 이건 뭐가 들었죠? 뭐가 어떻죠?' 등의 돌발 질문이 난무한다. 이럴 때는 주변의 웨이트리스들이 눈치 빠르게 다가와 도와준다. 대표적인 돌발 상황은 메뉴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거나, 알레르기 식재의 여부를 물어보거나, 그를 향해 무언가 농담 등을 던졌을 때 발생한다.
이는 그가 영화에서 봤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 영어 수업 시간에 가장 처음 배우는 패턴이
How are you - I'm fine, Thank you and you? - Fine, too 패턴이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동막골에 불시착한 미군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있다. 유일하게 영어가 가능한 동막골의 의사가, 영어 교과서를 가져와서 How are you를 묻는다. 미군은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하던 차에, 영어를 듣고는 반가워서 여러 말을 한다. 의사는 미군의 영어에 당황한다. How are you라고 물으면 Fine Thank you and you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결국 대화를 포기한다.
그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가 주문받으러 다가가면 손님은 메뉴를 시키고, 음료를 물어보면 술을 시키고, 더 필요한 것이 있냐고 마지막으로 묻고 난 뒤, 웃으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는 것이 웨이터 영어의 패턴이자 메뉴얼이다. 이 패턴과 메뉴얼에서 벗어나면, 그는 당황한다. 어떤 돌발 상황이 반복되면, 그는 해당 돌발 상황 자체를 또 하나의 패턴으로 인식해 외운다. 하지만 하나를 외우기가 무섭게 새로운 돌발 상황이 생긴다.
돌발 상황의 주된 요인은 알레르기다. 한국인들에 비해, 서양인들은 알레르기가 있는 식재가 정말 많다. 견과류, 갑각류는 기본에, 각종 어류, 고기, 밀가루에도 알레르기가 있다. 알레르기뿐 아니라, 입맛도 약간 까다롭다. 그가 웨이터 일을 하면서 본 결과, 새송이 버섯을 먹지 않는 손님의 비율이 과장을 보태서 절반 정도다.
견과류, 갑각류, 어류, 고기는 빼면 된다. 밀가루의 경우는 글루텐 프리라고 해서 전채요리부터 소스까지 따로 준비해서 갖다 준다. 레스토랑의 된장 소스에는 밀알이 포함되어있는지, 글루텐 프리 된장 소스가 따로 있다.
이것은 빼고, 뺀 대신 저것을 더 넣고, 절반은 일반 식사고 절반은 채식주의자니 조리 도구를 다르게 써야하는 등 주문이 많다. 여기에 아기들을 위한 높은 의자, 젓가락을 쓰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눈치 빠르게 미리 포크와 나이프를 갖다주는 등 서빙에서도 자잘하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
그는 속으로, 그냥 주는 대로 먹지 너무 까탈스러운 것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브리즈번의 주말 시장에서도 겪었듯, 호주인들은 자기주장에 거리낌이 없고 메뉴 구성을 입맛대로 바꾸곤 한다. 주말 시장에서도 그럴진대, 가격이 비싼 고급 음식점에서 본인들의 취향에 맞게 메뉴를 변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