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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윤상학 Sep 10. 2024

키다리 아저씨

나의 아저씨

 동영상은 사진보다 좀 더 생생하다. 어제 일어난 일도 사진으로 보면 벌써 추억이 되고, 동영상에서 나오는 목소리와 움직이는 모습은 더욱 생생히 어제를 재생시켜 준다.  


 딸애의 어릴 적 사진들을 USB에 저장해야겠다고 생각해 놓고 계속 미뤄오고 있다. 여남은 권 되는 앨범의 사진을 일일이 촬영한다는 것이 일로 여겨져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분량이 훨씬 은 동영상이라도, 비록 컴퓨터와 USB 에도 저장해 놓았지만, 수시로 바뀌는 컴퓨터 관련  업체의 정책이라든가 분실 등을 대비해 클라우드에도 백업해 두려고 모처럼 아이의 어릴 적 동영상들을 보게 되었다.


 아이 사진이나 동영상만 보면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얘는 어디로 갔지.... 30대가 된 딸애와는 연결이 잘 안 된다.


  10여 년 전 어느 사찰에 가서 일주일간 머무르며 불교에 대한 공부를 접해본 적이 있다. 주된 내용은 깨달음에 관한 것이었는데, 크게 깨닫게 된 것이 몇 개 있었다.


 공부는 주로 저녁 공양 후 이루어졌는데, 여남은 명이 빙 둘러앉아서 스님이 꺼내는 화두를 가지고 각자의 생각을 밝히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때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스님께서 한 명 한 명마다 '당신은 누구냐'라고 물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각자는 당연하다는 듯 자기의 이름을 먼저 밝혔다. 그러니까 또 스님은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여 물었고, 대답한 사람은 이제 자기 직업과 사는 거주지 등으로 스님이 원하는 답변일 것이라는 짐작에 좀 더 자세하게 본인을 설명하였다. 그런데 또 스님께선 똑같은 질문을 던졌고, 답변하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가 는 표정으로 스님을 쳐다만 볼 뿐 머뭇거리게 되고.... 내 순서가 왔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반응을 하였다.


 불교 공부가 좀 어렵고, 엉뚱한 화두로 엉뚱한 선문답이 오간다고는 들었지만, 이건 너무 하다 싶은 생각에 빠졌더랬다. 분명히 나는 내가 누구임을 밝혔고, 스님도 질문을 하는 걸 보니 난청은 아니고, 분명 내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똑같은 질문이 되돌아오니 어깃장을 놓나 싶기도 하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했더랬다.

모두가 다 당황한 가운데, 공부를 마칠 날 때쯤 드디어 스님의 생각을 말씀해 주셨고, 내 머리를 탁 치는 깨우침을 하나 얻게 되었다.


 이 세상에 ''란 존재는 본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 만물이 항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고 시시각각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란 존재를 규정할 때는 그것이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어야 그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데, 계속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나란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나란 존재를 규정해 말하는 그 순간에도, 그 순간의 나란 존재는 이미 물리적으로도 화학적으로도 몸을 이루고 있는 여러 요소들이 변했고, 또 변하고 있고, 마음도 마찬가지로 변하고 있어서 나를 어떻게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이  그렇다는 것이다.


 머리를 탁 치게 한 그 생각이 맞다고 새삼 고개 끄덕이게 된다. 

 꼬물꼬물 기어 다니며 열어 놓은 싱크대 하부장 문 안 냄비며, 그릇들 꺼내 입으로 가져가고, 탕탕 두들겨 보고 하던 아기는 어디로 가고 없다. 그땐

그냥 그러했다는 모습의 동영상만 흔적으로 남아 있다.

딸애는 우리가 부르는 이름, 우리 딸이라는 것은 변함없지만, 그 실체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시시각각으로 모습 달리하며 사진으로, 동영상으로 남아있다.


 유치원 농작물 체험장서 감자 캐는 모습, 초등학교 입학식날 긴 머리 위로 얹힌 베레모와 다홍색 재킷  아래 체크무늬 스커트로 한껏 치장하고서, 입학한 기쁨 얼굴 가득한 모습, 질풍노도 유감없이 발휘하던 열다섯 살의 짓궂은 표정의 얼굴, 기름기 많은 부실한 아메리칸 푸드로 이목구비 뭉개져있던 미 고교 기숙사 시절 모습, 가슴께 까지 내려온 긴 머리 치렁치렁하던 스무대여섯 모습, 산뜻한 단발로 워킹 우먼 냄새 풀풀 나는 현재 모습까지....


 커가면서 변해버린,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없는 과거가 된 모습이어서, 지나간 때의 아이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눈물이 나는 걸까. 아이의 작년 사진만 보아도 그렇다..

아무튼 그렇다

아득한 어릴 때일수록 더욱 그렇다.


 사진은 많이 찍어 아이의 어릴 적 모습을 그래도  남겨뒀지만, 동영상은 많지가 않다.


 지금은 손안에 쏙 들어오는 휴대폰으로도 언제 얼마든지 동영상을 촬영할 수 있지만, 딸아이 태어나고 자라던 시기에는 송 장비에나 쓰일 듯한 덩치 큰 캠코더가 동영상 촬영의 주요 장비였었다. 그나마도 가격이 비싸서 일반 가정에서는 쉽게 구매하지 못하여 주로 카메라로 사진으로만 모습을 남기던 때였었다.


 남편 사업으로 힘겹게 지내던 우리 집도 역시 캠코드가 없어서 아이 아기 때나 유년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아기 때와 유년 때의 동영상이 몇 개 있다. 사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또는 잊고 있었던 아이의 모습들을 보면서 한참을 추억에 젖게 된다.


 저 때는 저랬구나, 저렇게 행동했구나, 그래 저런 목소리였었지, 예쁜 짓 하라고 하면 저렇게 했었지, 맞아 저랬었지. 저런 노래를 했구나, 저런 옷을 입었구나, 참 저 신발은 어디로 갔지... 예뻐서 보관한다고 했는데 어느 날 사라져 버린 신발도 보게 되고....


 아이만 있는 게 아니다. 아이와 함께 있었던 어른들도 나온다. 시끌벅적한 돌잔치에 아버님, 어머님, 큰 시누, 둘째 시누, 셋째 시누, 막내 시누, 삼촌, 딸애와 일주일 차로 일찍 태어난 사촌까지.....

포항 어느 여행지 해변에서 차 안에 잠자고 있는 딸아이, 바깥에서 얘기들 나누는 시어른, 시누들, 셋째 시누 남편....


한참을 들어다 본다. 아득한  시절로 돌아가 추억에 젖는다.  좀체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살아가면서 키다리 아저씨 한 명쯤은 있는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있다, 확실히.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나에게 키다리 아저씨는 다 큰 어른 시점에서 만났다.

정작 필요했어야 할 어린 시절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어른이 되어서야 만났다.


 부모로부터도 버림받았고(부모님은 국민학교 3학년 때 시골 할머니께 나를 맡겨놓고, 중학교 졸업 때까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음. 그런 의미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그다지 귀여운 손녀는 아니었던 것 같고, 삼촌, 숙모, 고모들로부터도 따뜻한 손길을 못 느끼고 자랐었다.


 특히 고모를 생각하면 못내 아쉽고 서운하다.

고모가 시집을 가서 첫아이를 낳고 친정 나들이로 할머니 댁에 왔을 때, 고모 지갑에 손을 대었다.

할머니 댁은 과수 농사를 하지 않아서 밥 외에는 거의 먹을 게 없었다. 그리고 용돈이라는 걸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과자 같은 사 먹고 싶어도 사 먹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어린 마음에 돈이 탐났던 모양이었다.


 고모는 그 일로 난리를 피웠다. 할아버지, 할머니, 목이 삼촌, 국이 삼촌에게도 일일이 돈 가져갔느냐고 물으면서 집안을 칵 뒤집어 놓았다.

모두 들로 일 나가고 집에는 고모와 아기, 나 이렇게 셋만 있었기 때문에 내가 가져갔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랬다. 호랑이 같은 목이 삼촌은 가뜩이나 큰 눈을 부라리며 나에게 다그쳤다. 나는 끝내 안 가져갔다고 도리질하였다.


 고모는 그런 고모였다. 부모 없이 촌에 와있는 조카가 얼마나 맛있는 과자도 사 먹고 싶었을까라는 가여운 생각 정도를 했더라면, 모른 척 슬쩍 넘어갔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마음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였다.


 할머니댁은 남에게 손 벌릴 정도는 아닌 그냥 밥 먹는 정도의 살림살이였다. 그리고 촌의 정서가 용돈을 주는 분위기는 아니었던지, 어쨌든 할머니나 할아버지로부터 일정한 용돈을 받아 본 기억이 없다.  


 삼촌들도 목이 삼촌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할아버지 농사짓는 걸 함께 도와주는 상황이었고, 국이 삼촌은 고등학생으로, 둘 다 내게 용돈을 줄 상황이 못되었다.


 시골에서 돈 마련은 쌀, 보리쌀 같은 곡물류를 팔거나 큰 일을 닥쳤을 때 소를 팔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쉽지가 않은 시절이었다.


  그래서 연중 용돈을 구경할 수 있는 것은 명절 때 정도였다. 주로 설에 받았던 것 같은데, 세뱃돈 개념으로 할머니로부터 좀 받은 것 같고, 명절맞이로 다녀가는 숙모들이 한두 푼 쥐어주는 것이 전부였었다.


 명절이나 오랜만에 고향 방문할 때도 둘째 삼촌은 한 번도 용돈을 준 적이 없었고, 그렇게 받은 용돈이 전부였으므로 늘 용돈이 궁했다.


 고모는 경주시에서 꽤나 부유한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잘 사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친정인 할머니댁에도 잘 오지 않았지만, 어쩌다 한번 방문하여도 한 번도 용돈을 준 적이 없다.


 지루하고 일만 잔뜩 하는 노동에 짓눌린 어린 나는 고모집이 그렇게 가고 싶었다. 고모가 시집가기 전만 하여도 고모를 엄마 닭 따르는 병아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고모를 무척 따랐으므로 고모에게 각별한 정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 없이 지내는 마음에 12살 나이 많은 고모를 어쩌면 엄마처럼 여기지 않았나 싶기 조차 하다,


 그래서 시집간 고모집을 방학 때 두 번 정도 놀러 간 적이 있는데, 예쁘게 단장한 화단이 있는 넓은 마당과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위화감을 느끼며 단박에 부유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밥상에 올라오는 반찬 때깔부터가 다른, 그렇게 으리으리한 고모집 갔을 때조차도 고모는 용돈 한번 준 적이 없다.


 그리고 떠나올 때는 '또 놀러 온나' 라는 아쉬운 작별 따위의, 혈육 간에 오갈 수 있는 흔한 인사조차도 없어서, 용돈 한 푼 못 받은 빈손으로 나오는 내 마음은 서운함으로 가득 찼었다.


 혹시나 고모가 잊고  못 챙겨 준 건 아닌가 하여,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몹시 기다렸으나, 끝내는 쓸쓸히 터벅터벅 걸어 나왔던 기억이 지금도 그 감정 그대로 살아난다.


 그래놓고도 기어코 나는 방학 때 한번 더 갔던 것 같다.

부유한 그 기와집 분위기에 한번 더 발을 담그고 싶었고, 지난번엔 고모가 실수했을 거라는, 그래서 이번에는 줄 것이란 기대감을 안고 방문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고모는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별로 반기지 않는 시큰둥한 표정 보며 내심 울적한 마음을 억누르며, 고종 사촌 동생들과 놀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때의 떫떠름하던 고모 표정은 5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뚜렷하다. 물론 나는 고모에게서 용돈을 받지 못하였고, 쓸쓸히 집을 나서야 했다.

 그 못마땅해하는 표정에 나는 더 이상 가고픈 마음을 못내, 다시는 고모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고모의 목적이 그것이었다면 성공했던 것이었다.


 때로는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었으면 한다. 상처받은  기억들이 너무 많아 기억 떠오를 때마다 마음 아프기 때문이다. 더 이상 아프기 싫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엉뚱하게도 치매가 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고모는 그런 사람이었다.


 경주서 옷가게 하는 숙모는 사촌 임신 중 작은 아버지가 회사에서 사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신 경주시내 시장 안에 있는 옷가게를 운영하며 홀로 사촌 동생을 키우며 살고 계셨다.


 사촌 동생은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무렵에 태어났는데,

방학 때면 숙모 집에 가서 아기 우유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아기를 돌봐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린 아기를 11살짜리 꼬맹이에게 맡기고 일 나간 숙모도 대단하고, 또 그것을 겁 없이 떠맡았던 나도 대단하게 여겨진다.

 간혹 TV에서 기아나 빈곤으로 허덕이는  아프리카 같은 빈한한 지역을 보여주며 구호 동참을  바라는 구호 단체들의 광고를 보노라면, 돌봄을 받아야 할 꼬맹이가 자기보다 더 어린 자기 혈육을 돌봐주는 기막힌 장면에서, 사촌 동생을 홀로 돌봐주었던 그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아기만 돌  것이 아니었다.  청소와 기저귀를 비롯한 빨래, 저녁밥도 짓고 찬도 하였다.


 그때 자주 해 먹었던 찬 중에 지금도 선명히 기억에 남는 반찬이 있다. 미역에 뜨거운 물을 어 바락바락 치대어 씻은 후, 그 푸르고 싱싱한 것을 손가락 마디 길이로 잘라서 가지런히 그릇에 담아내고, 그것을 쌈장에 찍어 먹는 것이다.


 맛의 관건은 쌈장에 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어떻게 맛 똑 떨어지게 했는지 바다 내음 풍기는 미역을 너무 맛있어서 먹고 또 먹었었다. 숙모는 맛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지금도 겨울철에 싱싱한 미역이 나오면 얼른 산다. 그 맛이 보고 싶어서. 그래서 그때 만든 방식대로, 된장에 진간장 약간, 다진 마늘, 설탕, 물 약간 섞어서 걸쭉하게 만든 쌈장을 그대로 재현해  만들어 먹어 보는데, 그때만큼의 맛은 안 난다.

50여 년 세월 동안 미역을 키운 바다도, 된장 재료인 콩을 키운 땅도 바람도 달라졌을 테니 똑같은 맛이 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내 입도 달라졌고.


 춥고 좁은 부엌에서 연탄불 위에 물 끓여 미역 다듬고, 톡톡 마늘 다지고, 저녁밥 짓던 모습, 추운 날씨에 얼어붙어 안 나오는 펌프에 뜨거운 물 부어 펌프질 하는 모습, 손 호호 불어가며 아기 똥 털어내며 기저귀와 옷가지들 빨래하던  모습, 방 청소 하는 모습,..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어른 손만 하겠는가. 한 번은 귀가한 숙모가 화장대의 화장품 용기를 들더니, 용기들 사이사이에 끼인 먼지가 덜 닦였다고 지적하였는데, 많이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수고했다는 칭찬 한마디 없이 지적하는 것에 속상했던 것이었다.

물론 칭찬한 적은 있었겠지만 속상함이 더 커서 기억이 안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돌아보면 그 당시에 좀 내로라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집에 들이던 식모 같이 일했 같아, 짠하게 여겨진다.


 래도 숙모집은  할머니, 할아버지, 호랑이 같은 삼촌, 나의 존재 따위에 관심이 없는 막내 삼촌이 있는, 그리고 경주 시가지이니 볼거리도 많고, 좀 더 활력이 있어서, 지루하고 답답한 시골 할머니댁 보다 나았던 것 같다. 그래서 방학 때마다 기꺼이 달려가서 사촌 동생을 돌봐주고 식모처럼 살았던 것 같다. 어쩌면 어른이 부르니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그 당시 사회의 유교적 풍토와 그런 풍토가 더 견고하게 남아 있었던 시골서 자라서 싫고 좋고를 생각할 여지없이 갔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게 사촌 동생 돌봐주기 명목하의 여러 일들은 사촌 동생이 유치원 다닐 때까지 방학 때마다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할머니 댁에서 지내던 6년여의 기간 동안 매 방학 때마다 그렇게 숙모집서 보내었던 것이다.


 간혹은 숙모가 일이 있어서 가게를 비울 때는 옷가게도 봐주었다. 대구 서문 시장에서 물건 떼와 가득 부려놓은 날엔 일거리가 많았다.

  옷을 남자, 여자 성별로, 위, 아래 상하별로, 아이 어른 연령별로, 속옥, 바깥 옷 등으로 구분하여 그 구역대에 맞춰 옷을 진열해야 했는데, 어떤 것은 옷걸이에 걸어 하나하나씩 긴 막대 끝 갈고리에 끼워 천정까지 닿는 위치에 설치된 쇠줄에 걸었고, 속옷이나 가벼운 옷은 진열대 위에 가지런히 눕혀서 진열했었다. 숙모가 외부에 일이 있어서 가게를 비워야 했을 때는 옷 파는 일도 더러 하였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진학으로 대구에 사는 부모님 집으로 합가 한 후에는 더 이상 큰 숙모집으로는 가지 않게 되었, 대학 진학 후에는 둘째 숙모의 요청으로, 학 때마다 둘째 숙모 집으로 가서 사촌 동생을 봐주었고, 대학 졸업 후 취업이 될 때까지 6개월가량을  사촌 동생을 돌보아 주었다.


 옷가게를 하던 큰 숙모는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같은 시장에서 옷 가게를 하며 친하게 지냈던, 자기와 같은 처지의 유복자 아들 둘을 키우고 있었던 아줌마와 동업으로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 해변에 식당을 개업하였다.


 여름이 되어 바쁠 때 도와 달라는 부름이 있어서 가서 일을 도운 적이 있는데, 잔뜩 물 머금은 바닷바람에 들숨날숨 허겁지겁 숨 쉬며 새벽같이 일어나 찬거리 다듬어 씻고, 홀 서빙에 청소까지 하였었다. 식당 하는 사람들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매일 힘겹게 해내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도 숨이 헐떡여진다.

그러나 숙모는 식당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지 빚만 잔뜩 안은채 다시 경주 옷가게로 돌아왔다.


 큰 숙모와는 이러한 도움을 주로 주면서 함께한 시간들이 있어서 인지, 가장 신뢰 가는 든든한 존재로 느꼈던 것 같다.  


 어쨌거나 나의 생각은 이러했지만, 숙모는 나와는 생각이 좀 달랐던지, 결혼 때 밥솥 하나 달랑 쥐어 주는 것으로 축하 선물은 끝을 냈다. 그래서 나의 실망은 대단하였다.

 그렇게 식모처럼 나를 부리는 동안에도 용돈을 받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명절에 한두 번 정도 용돈을 주고, 팔고 있는 옷 두어 번 받은 것 외에는 기억에 남는 감동을 준 적이 거의 없다.

 무더워 헐떡거리며 식당일 도와줬던 그때에도 제대로 된 용돈을 받은 기억이 없다. 용돈을 주었더라면, 식당 옆 모퉁이에서 할머니가 파는 막 부쳐낸 감자전을 어린 사촌 동생이 양념장에 콕 찍어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침을 꼴깍 삼켜야만 했던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숙모 본인도 홀로 유복자 키우며 살아내느라 힘들어서 주변 돌아볼 여유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옷가게 있는 시장통 드나들면서 지나치는 과자 가게의 맛난 과자 먹고 싶었던 어린 꼬맹이에게 숙모는 참 야박하게 느껴졌었다.

 어쩌면 나의 기억 왜곡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용돈을 종종 받았을 수도 있고, 그래서 숙모 기억으로는 넉넉히 많이 주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나의 기억은 그렇다. 늘 돈에 궁했고 과자를 제대로 맛본 기억이 없다.


 둘째 숙모는 공무원으로 직장 생활하는 맞벌이 부부여서 경제적 여유도 좀 있는 데다, 직장 생활을 통해 터득한 인간관계의 매너를 알고 있어서인지 큰 숙모에 비해 용돈은 좀 챙겨 준 것 같다.


 어쨌든 유년의 아이였던 사촌 동생을 꽤나 잘 보살폈던 것 같고, 큰 숙모 집처럼 반찬이며 청소며 세탁이며 모든 집안 살림도 살아주었다. 이제는 성인이 된 나이였으므로 둘째 숙모에게는 꽤나 괜찮은 아이 돌보미였고, 가정부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숙모집은 삼촌도 얌전한 양반인 데다 숙모도 정숙한 여성이어서 아침 댓바람부터 빚쟁이가 찾아와 돈 달라며 소리 질러대는 집에서 벗어나서 모처럼 평화롭고 경제적으로 곤궁하지 않은 가운데서 지냈던 것 같다.


 그러나 숙모는 본인 스스로도 한 번씩 내뱉었듯이, 자기가 견디기 어려운 상황들은 곧바로 말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자기 친정 식구들로부터 못됐다는 소리 많이 들었다고, 종종 얘기했더랬는데, 내게도 그런 성격을 내보인 섭섭한 일이 몇 개 있다. 그래서 지금도 숙모에게는 연락을 잘 안 한다. 


 사촌 동생을 돌봐 주고 있을 때, 하루는 친구가 집을 방문하였었다. 그 친구는 여고 시절 친구로 절친이었고, 나처럼 취업이 안되어서 내가 불러서, 대구에서 내려와 경주 시내 서점에서 일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서점은 숙모가 알고 지내던 곳으로, 숙모의 소개로 친구는 그곳에 취업하여 있게 되었던 것이다.


 친구와 얘기 나누고 있는데, 출근한 숙모가 아파서 조퇴를 해서 일찍 왔다. 친구는 인사를 했고, 조금 더 놀다가 친구는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가 돌아간 후에 숙모가 앞으로는 친구를 집으로 부르지 말라고 정색을 하여 말하였는데,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른다. 지금까지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혼자 생각으론 자기 허락 없이 불렀다고 그러는 것이 아닌가로 짐작할 뿐이다. 낮에 잠깐 들러 놀다가는 친구도 일일이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면서, 이해가 안 가는 구석이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내 결혼과 관련한 일이다.

결혼할 무렵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나서 함진아비 대동한 예비 신랑 맞이할 만한 집이 마뜩치가 않았다.

그래서 숙모에게 부탁하여 숙모집에서 함진아비를 맞이하게 되었고, 행사는 무사히 잘 치렀다.

행사가 끝난 다음 날, 숙모는 우리 집에서 하는 것은 너로 끝내야지 동생들은 더 이상 안된다고 똑 부러지게 못을 박듯이 말하였다. 동생들까지 숙모 집 신세 질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여 많이 당황스러웠고, 숙모가 마땅찮은 일을 마지못하게 치르게 한 것 같아 몸 둘 바를 몰랐다.

 자기 집서 육아 도우미에다 가정부처럼 일까지 해주었는데, 겨우 하루 함진아비 받는 그 일 정도를 못해주나 싶어 많이 아쉬웠고, 야멸차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결혼해서 남편 사업이 힘들었을 때, 한번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숙모는 삼촌에게로 바통을 넘기며 회피했고, 삼촌은 또 숙모에게로 넘겼다. 결국 도움은 못 받았고, 엄동설한에 임신 10개월의 불룩한 배를 뒤뚱이며 정신없이 이 집 저 집 돈 구걸하러 다닐 때였었다.


 어느 날 숙모는 기술 국장으로 승진했다며, 농진청 역사상 첫 번째 여성 국장 탄생이라고, 사무실도 독립된 공간에 국장실이 따로 있으니 놀러 오라고 몹시나 들뜬 목소리로 소식을 알려왔었다. 자화자찬을 잘하는 성격으로 그렇게 알려왔으며, 축하한다고 축하란을 사무실로 보내었었다.


그리고 시간이 아득히 지난 어느 날 숙모는  국장급이면 옛날로 치면 큰 벼슬인데라며, 사무실 방문 한번 하지 않은 것을 두고 서운해했다.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남편 사업으로 사무실에 요구르트 넣고 있는 아주머니께도 손 벌리며 돈 빌려야헸던 곤궁했던 사정에 정신없었노라고 변명하기 싫었다. 대화 상대 안 되는 사람에겐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큰 숙모도 둘째 숙모도 자기들이 필요할 때는 도와 달라고 손 벌려놓고선, 막상 육아 도우미에다 가정부처럼 열심히 일해 준 나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왠지 숙모에게 눌러사는 듯한 작은 아버지(둘째 작은 아버지)얌전하고 착한 양반으로 할머니가 늘 ' 우리 탁이' 라며 자랑하셨던 분이다. 그러나 그런 삼촌께도 나는 별로 안 좋은 기억이 있다.

 위에서 한번 언급했듯이 어쩌다 한번 고향집에 와도, 집에  있는 조카인 나에게 한 번도 용돈이라는 것을 준 적이 없다. 무려 6년여의 세월을 있는 동안이다. 거기에서 실망이 큰 데다 잊을 수 없는 이해 안 되는 사건이 하나 있다.


 국민학교 5, 6학년 정도였을 때였는데, 그때 삼촌은 무슨 일로 할머니 집에 와 있었고, 어느 날 아침 학교를 갈려는데, 삼촌이 편지 봉투를 주며 부치라고 하였다.

우체국은 집에서 1km 정도 떨어진 학교가 있는 동네에 있었는데, 그 우체국에 가서 부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학교 끝나고 부친다는 것을 고선, 그냥 집으로 왔다.

우편물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고서 부엌에서 아궁이에 을 때고 있는 데, 삼촌이 부엌으로 들어와 편지를 쳤느냐고 물었고, 그제서야 생각이 나서 잊었다며 내일 꼭 치겠다고 말하는 찰나에, 촌이 손으로 내 따귀를 있는 힘껏 후려쳤다.

 아직도 내 볼이 얼얼한 기분이다. 그 이후론 할머니가 삼촌을 아무리 추켜 세우고 자랑하여도 내겐 심드렁한 존재에 불과했다. 


 지금 그 삼촌은 우리 친정 남자 중엔 가장 나이 많은 어른이 되어있다. 집안 대소사를 주관하는 어른이지만 연락 안 하고 지낸다.

 대학생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이다하여 김영삼 대통령 추종하며 산악회에다 뭐다 열심히 활동하신 분. 집 거실 가장 잘 보이는 벽면 중앙에 대통령 휘호 '견리사의(見利思義)'를 자랑스럽게 걸어두신 분. 그러나 조카에게는 어린 사람 때린 너무나 못난 사람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버지를 무척 싫어했지만 정치적 행보에서는 비록 고졸 출신이었어도 김대중 대통령 추종하며 열렬히 당원 활동 하셨던 아버지의 판단이 삼촌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삼촌은  10여 년 전 어느 날, 전화로 재산 몇십억 된다며 자랑을 해왔었다. 삼촌 내외가 맞벌이하며 알뜰하게 생활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축하한다 해주었으나, 참 철없는 삼촌이라고 생각하였었다.


 한 번씩 작은 아버지나 숙모가 안부 전화해 오는데, 인사만 잠깐 건네고 끝낸다. 별 감흥 없는 존재들이다.

어리고 힘들 때 크게 위안이 못되었고, 그저 나를 이용하기만 했다는 생각만 들뿐이다.


 셋째 삼촌인 목이 삼촌은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대체로 굳고 화난  표정이었었는데, 가만히 있어도 큰 눈이 무서운데, 걸핏하면 눈을 부라리면서 큰 소리로 윽박질러서 공포에 부들부들 떠는 날들이 많았었다.

친구들과 동네에서 놀다가도 목이 삼촌 모습이 보일라 치면 재빨리 숨어 버렸다. 삼촌을 무서워하는 걸 알고 난 후에 친구들은 삼촌이 나타나면 먼저 알려 줄 정도였다.

 어느 날 이웃 동네 청년을 때려 그 길로 삼촌은 자취를 감추고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나는 공포에서 풀려나게 되어 해방되는 기분이었다.


 삼촌은 결혼한 숙모에게도 마찬가지로 그 불같고 우락부락한 성격을 못 참았던지 부부간 늘 떨끄럭 소리를 내고 있었다.


 1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무렵에는 별거하여 살고 계셨다. 아버지 장례식장에 소식 듣고 달려온 삼촌을 붙잡고 목놓아 하염없이 울었었다. 정작 아버지를 향해서는 무덤덤히 있다가 삼촌을 부여잡고 목놓어 울었다. 제발 그렇게 살지 마라, 아버지처럼 되고 싶냐며 늘그막에 홀로,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는 자식들을 그리워하면서, 시골에서 외로이 살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회한을 그렇게 토했던 것 같다.

장례식 후 돌아가는 삼촌 손에 용돈을 챙겨드렸다. 세월이 약이었다. 공포스러웠던 삼촌에 대한 기억을 잊고 지내었던 것이었다.


 집안에 보통 골치 썩이는 자식들이 한 명쯤 있는 것 같은데, 할머니에겐 두 명이나 있었다. 아버지와 셋째 삼촌이 그랬다. 두 분 다 그 성격으로 혈육도 본인도 괴롭게, 힘들게 하시고 사셨고, 사시는 것 같다.


 사람은 참 안 변하는 것 같다. 본성은 버리기가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막내 삼촌이었던 국이 삼촌은 나보다 5살 위로 할머니댁에 있을 때 삼촌은 중학생, 고등학생이었다.


할아버지 성정을 닮아 얌전하고 착하였는데, 삼촌도 아직 어린 나이여서인지, 내게 조카라고 크게 예뻐해 주는 것은 없었고, 그저 한 식구로 생각하는 정도였다. 공포스러운 존재였던 목이 삼촌에 비하면 아무런 마음에 부담 주지 않는, 할머니, 할아버지 같이 편안한 존재여서 그 자체로 다행이었다.

 할머니가 막내 삼촌을 '우리 국이', '우리 국떼이' 라며 엉덩이 토닥이며 무척 예뻐하셨는데, 그 모습을 보며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막내아들을 향한 사랑 때문인지, 할머니는  손녀인 나를 다재다능하여 자랑은 많이 하였지만, 크게 귀여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얌전하고 새색시 같은 삼촌은 정겹고 살가운 숙모를 만나 딸, 아들 낳고 다복하게 살고 계신다. 두 분 사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혈육, 친척, 친구 주변 둘러보아도 가장 이상적인 내외이다. 모두 이렇게 만 살았으면 싶다.


 군인이셨던 삼촌은 퇴역하여 돌아가신 장인께서 사두신 시골 땅에 장모와 나란히 두 채의 집을 지어  살고 계신다. 직장 생활도 잘하였던지 군 생활 중 알고 지냈던 분의 사무실로 출퇴근하며, 골프를 취미로 제 2의 인생을 즐겁게 편안하게 보내고 계신다.


 작년엔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고 있는, 내게는 사촌 동생인 딸이 다니던 H공기업에 휴직계를 내고, P공기업 다니는 사위의 연수를 따라 캐나다 가 있는 딸애의 초청으로 캐나다 다녀온 사진을 숙모가 카톡에 하루가 멀다시피 올려 즐거운 소식을 전했었다.


 막내 삼촌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본성 그대로 결 고운 사람 만나 사는 것이 참 큰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엉뚱한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 고생하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그리고 지금도 얌전한 삼촌을 보면 본성은 참 안 변한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무덤덤한 분들로 부모에게서 떨어져 사는 손녀인 나를 가여워하거나, 특별히 예뻐해 주시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두 분께서는 나를 살림꾼이나 일꾼으로 생각하셨던 다. 모든 집안 살림서부터 농사짓기까지 다하였다.

 밥 짓기, 청소, 빨래 등 집안일부터 밭매기, 고추 따기, 콩 뽑기, 감자 캐기, 보리 베기, 논에 모심기, 벼 베기, 벼, 보리 탈곡기에 탈곡하기, 콩 타작하기, 소풀베기, 소 먹이러 소 몰고 산에 가기, 소여물죽 쑤기, 소 외양갓 청소하기, 겨울에 산으로 나무하러 가기, 봄, 가을에 누에 먹일 뽕잎 따기, 누에 뽕잎 먹이기, 누에 똥 갈아주기 등등....


 촌에 살면 걸음 익숙해지는 대여섯 살부터 자잘한 농사 거들기로 시작하여 이미 농부가 된다. 그러니 두 분께 10살짜리인 나는 대단한 일꾼인 셈이었다.

 울산이라는 신흥 도시에서 살다 들어간 나로서는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하루아침에 농사꾼이 되어 고된 농사일을 하게 되었으니, 나날이 고역이었고 부모를 원망하는 날들이었다. 


 부모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 중에 하나는 내 또래 여자애들은 논, 밭 들에 나와서 일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친구들은 집안일 정도 돕는 것 같았다. 친구 선이는 외동딸이어서인지 설거지도 안 하는 눈치였다. 삼촌들과 일하러 들로 나가는 길에 친구들 집 기색을 보면, 친구들은 평상에 앉아 뭘 먹고 있거나  놀고 있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 너무 부러웠고, 특히나 아무 일도 안 하는 공주 같이 지내는 선이는 무척 부러웠었다.


 특히 한여름 햇볕 작열하는 땡볕 아래 콩 밭에 앉아 밭을 매거나, 소 풀 먹이러 동네 남자애들 속에 끼여 산으로 갈 때는, 첨벙 거리며 개울에서 물놀이하는 친구들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런 친구들처럼 엄마, 아버지랑 같이 산다면 힘들게 일 안 하고 같이 놀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그렇지 못한 신세를 한탄하며 부모님 원망을 많이 하였었다.


 리고 겨울철 빨래할 때도 마찬가지로 부모님을 많이 원망하였었다.


 끔찍한 겨울철 빨래....

삼촌들도 같이 지낼 때, 4~5명 식구의 옷가지를 광주리에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동네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그랑(하천보다 작고, 개울보다는 큼)에 가서 빨래를 하였다.

 그랑 물이 두껍게 언 날은 최악이었다. 빨래 방망이로 두들겨 얼음을 깨고, 그것으로도 안될 때는 다란 돌을 찾아서 깨어 빨래를 하였다. 고무장갑이 없던  때여서 서너 번 그랑옷을 담가 씻어 내고 하면, 손은 어느새 빨갛게 얼게 된다.


 의류 대부분이 요즘처럼 소재 좋은 얇은 면이 아닌 두꺼운 광목류인 데다, 비누 성능도 좋지 않아서 광목에 낀 때를 씻어 내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하얗거나 누런 광목 의류에 묻은 농작물 물이나 수풀 헤집고 다니며 묻은 퍼런 풀물이나, 묻었다 떨어졌다 반복하여 아예 염색처럼 굳어버린 흙물 따위를 비누를 묻혀 치대고 씻고 치대고 씻고여러 번 반복해야 겨우 옷 하나 세탁이 완료된다.

 그런 일을 바람 쌩쌩 는 들판 가운데에 있는 그랑에 앉아 끝없을 것 같은 시간을 빨래를 해야 했었다. 다 빤 빨래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짜내어도 물기를 많이 머금고 있는 상태여서,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면 고개가 휘청할 정도가 되었는데, 그걸 머리에 고, 꽁꽁 얼어 감각이 마비된 두 손으로 광주리를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와 마당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이미 얼어 있는 옷들을 펴가며 가지런히 널었다.


 그렇게 빨래일을 모두 마무리한 후엔, 우리 집 뒤에 있는 백여 평 정도 되는 밭을 지나, 세 채의 가옥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 집 가운데  집인 '도우 띠기'('도우댁'이란 택호로, 시골에선 그렇게 불렀다. 참고로 우리 할머니는 경주시 '새마을' 이라는데서 시집을 왔는데, 그래서 우리 할머니집 택호는 '신리댁'이었다. '새마을'을 한자로 '신리'라고 부른 것 같다.) 집으로 달려간다.


 '도우 띠기'는 혼자 사는 노인네였는데, 할머니보다 조금 더 연세가 높으신 분으로, 당시에 할머니 또래 노인네들이 삼삼오오 그 집에 자주 모여 화투치기를 하면서 놀았는데, 일종의 할머니들 노인정 같은 곳이었다.


 할머니는 십중팔구 그 집에서 하하 호호 웃으며 화투치기 놀이를 하고 있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 집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밖서 ' 할매, 빨래 다했다'라고 신고식처럼 말하면, 할머니는 재밌는 얘기 중이었는지, 얼굴 가득 웃음기 띄운 얼굴로 문을 열며 '오냐, 그래.  알았다'라고 말하였다. 온기 가득한 화색도는 할머니 얼굴을 보면서, 추운 날에 빨래시켜 놓고 따뜻한 방 안에서 놀고 있는 할머니가 무척 얄미웠다. 추운데 고생했다고, 잘했다고 칭찬받은 적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엔 거의 없다. 오로지 얄미웠고, 이렇게 꽁꽁 손 얼도록 빨래하고 있게 만든 부모님을 많이 원망하였다


 돌이켜보면 할머니, 할아버지의 당시 상황은 가늠하기 조차 힘든 슬픈 세월을 견디고 계셨던 것 같다. 특히 할머니께서는..


그즈음 할머니는 자식을 잃었었다. 째 작은 아버지, 즉 할머니께는 둘째 자식이시다. 장가보낸 자식이 1년도 채 안되어 죽었으니 그 마음 오죽하겠는가. 세상 살기 싫었을 마음 아니었겠는가.


 직은 아버지는 기억에 남는 것으로는 두 번 정도 던 것 같다. 아마 20대 후반쯤 이시지 않은가 한다.

열 살, 열 한살 정도 된 내 눈에 작은 아버지는 너무나 눈이 부셨다. 그 후로도 큰 숙모 집 화장대에 놓여진  액자 속 흑백 사진으로 남아있는 전통 혼례복 차림의 작은 아버지는 실물과 똑같이 여전히 환하게 빛나고 계셨다.


 인물 잘생겼다고 작은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잘 생긴 할머니 유전자를 이어받은 것도 있겠지만, 유전자를 훨씬 뛰어넘는 인물의 작은 아버지.

 최고의 미남이라 생각해 한때는 쏙 마음 뺏겼던 알랭드롱 만큼이나 잘 생긴 미남이셨다. 짙고 가지런한 눈썹, 깊고 그윽하며 빛나던 커다란 눈매, 우뚝한 콧날, 선 뚜렷한 입술, 또렷한 인중, 알랑드롱 같은 얼굴형..


 사촌 동생이 작은 아버지 닮아 인물이 훤칠하다. 그래서 사촌 동생이 유치원 다니던 시절엔 손을 꼭 잡고 자랑하듯 다녔던 기억이 난다.

 신혼 때 군대에서 휴가 나온 사촌 동생이 시댁에 있는 나에게 다녀간 적이 있는데, 그때 마침 집에 놀러 와 있던 시누들이 사촌 동생을 감탄하며 칭찬하였더랬다.  

 

 작은 아버지는 외모 못지않게 그렇게 효자였다고 한다. 클 때도 사고만 터뜨리고 결혼해서도 제 식구 제대로 건사 못하는 큰아들에 실망한 할머니가 얼마나 작은 아버지께 의존했을지는 종종 할머니께서 혼잣말처럼 하시던 작은 아버지를 던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런 자식을 잃었으니 세상 등지고 싶은 마음을 할머니는 홀로 아프게 다스리고 지내셨을 것이었다.


 어쨌든 할머니, 할아버지는 여남은 살 먹은 손녀를  귀여워하거나 예뻐해주기는 커녕, 가정부나 무슨 큰  일꾼처럼 생각하여 마구 일을 부렸다.


 부모와 함께 살았던 시절의 부모님도, 할머니 댁에서 보낸 6년여의 세월, 그리고 그 이후 가끔씩 도움 주러 갔던 기간 동안의 고모, 숙모, 삼촌, 할머니, 할아버지 어느 누구로부터도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부모와 떨어져 살고 있는 어린 꼬맹이를 어느 누구도 가엾이 여기거나 온정을 베풀지 않았다.


 다 큰 성인이었을 때는 물론, 여남은 살의 꼬맹이었을 때조차도, 그저 나란 존재는 아기 돌보는 육아 도우미였고, 밥, 청소, 빨래하는 가정부였고, 억척같이 농사 일해야 하는 일꾼에 불과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드는 나의 성격 중 하나인, 비뚤어진 부정적인 마음 형성에는 이러한 애정 결핍이 많이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무튼 내 피붙이들은 그랬다. 인정 없고 야박했다.


 이제 즈음 돌이켜 지난날 집안 어른들의 행태를 생각해 보면, 한편으로 이해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부모님이 집안의 장남이고 맏며느리임에도 불구하고, 역할은 커녕 오히려 제 자식도 건사 못하고 떠맡겨놓고 얼굴 한번 안 비치니, 그 자식이 예쁠리가 있겠나. 천덕꾸러기 취급이나 안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해야 할까..

부모가 지은 죄 자식에게로, 그 자식은 받은 죄 또 준 자들에게로. 인생사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의 무한 반복.


 지금 혈육과는 거의 연락 않고 지낸다.

한 번도 서운한 속내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그래도 집안의 손(할아버지의 첫 번째 손주 의미임)으로 꽤나 여러 방면으로 뛰어나서 촉망받았고, 또 각자의 살림에 도움도 줬던 터라 각별한 정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은 영 아니올시다로 외면하고 있다.

 정작 손길 필요하고 온정 필요할 때는 외면하더니, 다 커서 잘 살고 있는데, 왜  안부를 궁금해 하나 싶기 조차하다. 때로는 안부 전화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하기도 한다.

지난 시절 내가 느낀 서운했던 감정들 목까지 차오르지만 참는다. 자업자득입니다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이렇게 자라왔다. 내 인생에 키다리 아저씨는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내게도 키다리 아저씨가 생겼다. 


 꼬물고물 기어가 싱크대 속 그릇들 꺼내어 입에도 갖다 대보고, 탕탕 두들겨도 보는 모습, 이름 부르며 '예쁜 짓 '하면 눈 번쩍 뜨고, 입 동그랗게 오므리는 귀여운 모습,

이리저리 거실 바닥을 신나게 기어 다니는 모습, 아장아장 걸음 지나 걷기에 맛 들인 걸음걸이로 예쁜 원피스 입고 아파트 단지를 걷는 모습,

13살 많은 사촌 언니와 마주 앉아 쪼르륵 라면 먹는 모습, 유원지에서 유아용 말타기에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하는 모습...


 직장 생활로 아이 육아 맡겨놓은 날들에 아이한테서 있었던, 미처 몰랐던 아이의 유아기 시절 모습을 생생히 동영상으로 보고 있다. 하염없이 넋을 잃고 보고 있다. 귀여워 웃었다가, 추억에 젖다가, 30대가 된 현재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왔다 갔다 하는 감정 속에 이런 소중한 자료를 남겨 주신 분에 대한 감사 마음 그득하여 기어이 글로 표현하고 싶어졌다.


 내게 키다리 아저씨는 셋째 시누 남편이시다.


 사랑하는 딸아이 어릴 적 모습을 동영상으로 살뜰하게 촬영하여 기록으로 남겨주신 분..

 캠코드를 장만 후 첫 촬영으로 우리 딸애를 제일 먼저 촬영해 주신 내용도 그대로 흔적으로 담겨있다.

집에서도 놀이터에서도 여행지에서도 돌잔치에서도 교회단합체육대회에서도 우리 아이의 아기 때 모습을

꼼꼼히 기록해 두신 덕분에 사진으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직장 생활로 육아 어려운 때, 딸애를 먼저 키워주시겠다고 손 내미신 셋째 시누, 너무 고마우신 분으로 항상 감사히 여기고 있다. 그리고 시누 못지않게 고맙게 여기는 분이 시누 남편이다. 아무리 시누가 키우고자 하여도 함께 사는 시누 남편 허락 없이 가능하겠는가...


 시누의 아이 양육을 허락해 주시고, 아기 때 여러 모습을 캠코드로 촬영해 주시고, 아이가 지금도 버리지 못하게 하는 말 인형(아마 4~5살 무렵에 사주신 것일 것임), 4살 경 사주신 바바리코트, 글 모르는 아기 때부터 크리스마스마다 예쁜 입체형의 카드에 ' 예쁜 아기 공주'라며 선물과 카드도 주시고... 넘치게 주신 사랑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아주버니께서 딸애에게 선물로 사주신 말인형




 아이는 그리고 나는 수시로 말한다. 고모부는 정말 대단하시다고..

 아이는 고모부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며 들려주는 이 있다.


 시누 내외분은 딸아이를 침대 가운데에 두고 주무셨던가 보다. 잠을 못 자고 뒤척이는 딸애에게 딸애 고모부는 양 한 마리, 두 마리... 를 세며 잠재워 주셨단다.

'고모는  먼저 잠들었는데, 내가 잠을 잘 못 자면, 고모부께서 퇴근하시고 피곤하셨을 텐데도 양 한 마리, 두 마리... 이렇게 세면 잠 온다고 보고 세어보라고 시면서 함께 세어주셨는데, 내가 고모부 잠이 안 와요를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른다. 아마 고모부는 100까지를 열 번도 넘게 세셨을 거다'라고 고마워한다.

그리고 예수님 탄생 관련 얘기, 노래 등으로 잠 못 드는 아이를 재우기 위해 애를 쓰셨다며, 고모부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얘기한다.

 직장 생활의 고단함을 잘 알기에 퇴근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의 그런 잠투정을 받아주기가 어디 쉬운가. 너무도 잘 알게 된 딸아이가 고모부의 사랑을 새삼 느끼게 되는 부분일 수밖에.


 살아가면서 키다리 아저씨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결혼하여 채 한 달도 안 된 어느 날, 한마디 말없이 몰래 직장 나온 남편이 사업 벌이더니, 손대는 일마다 안되어 경제적 곤란으로 힘들 때, 그 힘든 와중에도 희망이 되등대 같으신 분들계셨으니, 셋째 시누 내외이셨다.

 셋째 시누의 딸아이 사랑도 지극하였지만, 특히  피 한 방울 안 섞인 우리 딸애를 자식처럼 여기시고 돌봐주신 아주버님에 대한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멀리 지방에서 근무하다 시댁과 합가 하여 시댁에서 직장을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 나에게 타시던 차 물려주신 분도 아주버님이시고, 20만 킬로 넘는 차 타고 다니는 나에게 또 타시던  근사한 차량 물려주시던 분도 아주버님이시다. 중고로 넘기면 기백만 원은 족히 받을 수 있는 차량인데 그렇게 주셨다.


 시누 남편은 키는 자그마하시다. 그러나 내겐  거인으로 보인다. 진정한 거인이시다. 그리고 시댁의 모든 여성들, 시누 셋, 나와 동서 이렇게 여성들이 모두 시누 남편을 추종하다시피 한다. 그래, 적당한 말이 있다. 우리 시댁 여성들은 시누 남편의 '팬'이다.

부부간에는 작은 다툼도 있고 못마땅한 일들이 시누도 남편에게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쩌다 시누가 남편 흉을 볼라치면, 위의 언니 둘이 재빨리 손을 내젓는다.

대번에 나오는 말이 ' 가 잘못했네' 며 셋째 시누를 타박하고 나무란다. 그러면 셋째 시누는 '맨날 내보고만 뭐라 칸다. 내 말 들어주는 사람은 하낱도 없다' 며 뽀루퉁 해서는 입을 꼭 닫아 버린다. 그런 시누도 다시 태어나 결혼한다면 그때도 영이 아빠라고 한다. 남편이 아내로부터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아니겠는가.


 따뜻하고 넓은 품은 직장에서도 같으셨던 모양이다. 사 년 전 코로나 19 발발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던 당시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는데, 퇴직하신 지 꽤나 되는데도 서울서 직장 후배 여러분께서 조문해오셨다. 특히 당시 대구는 코로나 19국내에서는 처음 발생했던 곳으로, 전 국민이 발 들여놓기를 꺼려했던, 금기시되던 지역이었는데도, 먼 길 마다하지 않고 그렇게 다녀가시는 걸 보며, 아주버님의 넉넉하신 인품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괜찮은 사람을 주변에서 보기 힘들다. 그러나 셋째 시누 남편이 그런 사람이다. 괜찮은 사람이다, 그것으론 부족하다. 참 괜찮은 사람이다. 참 괜찮은 이시다.

그래서 나에게 키다리 아저씨 같은 역할도 잘해주셨던 그런 분이시다.


 지금도 딸애를 딸처럼 생각하고 계신다. 작년엔가 딸애에게 ' 너는 우리 딸이다'라고 하시더란다. 나도 늘 딸애에게 말한다. 뭐든지 고모, 고모부 먼저 챙겨라, 첫 월급 받을 때도, 어버이날에도, 새해가 되어도, 늘 고모부 내외 먼저 챙겨라이다. 

 딸애는 시누댁과 같은 수도권에 살고 있어서 시누 가족의 여러 행사에 가족처럼 기꺼이 참석하고 즐거워하고 있다. 행사마다 촬영해 전송해 주는 사진들을 보면 흐뭇하다. 시누 내외, 시누 딸 내외, 시누 딸 아들 내미, 그리고 우리 딸, 이렇게 활짝 웃으며 함께 있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다. 키운 정이 참 무섭고 질기다는 생각을 한다. 평생을 가는구나...


 육아 맡길 때는 많이 감사하면서도 미안함이 컸다면 지금은 너무 감사하다. 외동이어서 쓸쓸할 수 있는 딸애에게 커다란 가족이 하나 더 있는 셈이니까.

딸애가 태어났을 때 10대이었던 시누 딸내미는 이제 40대의 장년이 되어 10대 아들내미를 키우고 있다.

10대 아들내미 태어났을 때, 딸애는 귀여워 어쩔 줄 몰라하며, 번 돈 모두 조카에게 줄 거라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라며 난리였었더랬다.

 시누 딸내미도 외동딸인 데다 딸애도 혼자이다 보니 서로가 친 자매 같이 지낸다. 시누 내외의 성정을 닮아서인지 조카는 천사표에다 유능한 워킹 우먼이다. 그래서 좀 예민한 딸애가 많이 의존하고 따르니, 나중에 눈 감을 때 걱정을 좀 덜 것 같다.


 사람 보는 눈이 왜 그렇게 없었을까 하다가도 아니야 이것만은 제대로 본 것 같아라고 하는 게 있다.

눈이 없다는 건 남편얘기이고, 눈이 있다는 것은 시댁이야기이다.


 남편은 엄마의 지인 중에 중매 쟁이로도 활동했던 분의 소개를 통하여 맞선으로 만나게 되었다. 직장도 출신대학도 마뜩 찮았으나 엄마 지인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맞선 보는 날 남편은 무려 2시간여를 늦게 나왔었다. 기다리다 집으로 전화하니 지인 분의 더 기다려 보라는 말을 전해 듣고 계속 기다렸던 것 같다.

그래도 2시간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것으로 이미 사람 됨됨이를 알았어야 하는데, 기다린 나도, 기다려 보라던 엄마도 모두 린 거였다. 그대로 일어나 나왔어야 하였는 건데..


  본 후 돌아온 나에게 엄마는 어떻더냐고 물어왔고, 나는 없던 일로 하자고 단호하게 답변하였었다.


 사람의 굳은 습관은 제 아무리 꾸며도 온몸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가 보다. 2시간 여를 늦게 나온 남편이 또 하나 내게 실수를 하였었다. 늦게 나온 죄 때문이었는지 저녁을 사주었고, 식사 후 귀가하는 내게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주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남편이 나를 아래위로 쓰윽 훑으며 ' 물 찬 제비 같네요'라고 하였다. 순간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32년간 살아오면서 몸과 마음에 기록된 것이 한순간에 그렇게 나왔으리라. 본인은 전혀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코 내던진 말에 너무나 생소하여 얼어붙었던 나.


 지인이 연락 와서 남편 쪽에서 한번 더 보고 싶어 한다는 엄마의 말에 오염 뒤집어쓴 듯했던 일은 말하지 않고, 그저 키도 작고, 얼굴이 너무 커서 가분수 같다고 운운하며 신경질적으로 단호하게 안 본다고 하였었다. 그러나 지인이 또 연락해 오며 처음 선자리 말할 때부터 나왔던 국민평수 아파트를 사줄 수 있을 것이란 말을 확신에 찬 어조로 재차 강조하였었다. 거기에 흔들렸었다. 아파트에..

 이전에도 두 차례나 다른 자리를 소개해줬던 분이라 더  매몰차게 하지 못하고 두 번째 만남 자리로 나갔다. 자리에 갔더니 남편은 모친 느낌이 확 나는 분과 함께 앉아 있었다.

 순간 많이 불쾌했었다. 이건 사기다. 불공정하다. 모친 대동하기로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닌데 왜 혼자 모셔 나왔나. 불쾌한 마음 억누르며 인사 나누었다. 얘기를 나누는데 저기 서너 칸 너머 한 좌석이 신경이 쓰였다. 대머리인 노인 한분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순간 직감하였다. 남편의 아버지인 것으로.

 어라... 이 무슨 상황인가. 부모 두 분을 다 대동하여 나를 심사하러 나왔다 말인가.. 혼자서 셋을 감당하고 있는 어이없는 상황에 자리 박차고 나오고 싶었으나 어쩌지 못하고 꾹 참고 있었다.

 이다지도 제 멋대로인가.... 그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갔어야 했고, 거기서 인연을 끝냈어야 했다.


 힘들게 앉아 있는데, 대화 중 남편이 수시로 모친과도 얘기를 나누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다정해 보였다.

나의 가장 결핍된 부분을 보란 듯이 보여주고 있었다.

다정한 모자라니.... 엄마와 대화하면서 그런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저 정도면 가정은 화목하겠구나. 그리고 모친의 인품이 너무 부드럽고 자애로워 보였다.

남편의 2시간 여의 지각도, 오물 뒤집어 씌운 듯한 그 도, 작은 키도, 어쭙잖은 직장과 대학도 모두 뛰어넘었다.

내게 가장 결핍되어 가장 소망하는 화목한 가정..

거기에다 국민 평수 아파트까지...


 남편 쪽에선 2달 도 채 안 되는 시점으로 날짜 지정하여 예식 올리자고 하였고, 여자는 준비할 것이 많지 않으냐며 미루고 미룬 것이 맞선 본 지 3개월도 채 안 되는 시점으로 예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지옥문으로 이끄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때는.


 그렇게 서둘러 예식을 올리고 싶어 한 이유를 왜 생각 못했을까. 하자 많은 사고뭉치를 떠 넘기려 했던, 그  깊은 내막 왜 꿰뚫어 보지 못했을까..

 사람 볼 줄 모르는 내 안목을 탓하는 이유이다.

러나 시댁은 남편 빼고는 생각대로 화목했고, 정이 많았다. 셋째 시누가 먼저 나서서 딸애를 키워주셨던 것을 포함하여 사람을 잘 보는 안목도 있었던 것도 그래서 맞다.


사람 보는 내 안목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인연.... 그렇게 맺어진 인연..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큰 세상을 여는가 싶다.

시누 내외의 사랑이, 특히 기대하지 못했던 아주버님의 따뜻한 사랑이 없었더라면 딸애가 이 만큼이나 되었을까. 부족한 부모 역할을 채워 주신 덕분에 마음 편히 직장 생활할 수 있었고, 덕분에 그나마 어려운 가운데 여러 일들 헤쳐 올 수 있었고, 딸애도 이 만큼이나마 오게 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주버님은 나의 '키다리 아저씨'이고, 박혜영 작가 버전으로 말하면 '나의 아저씨, 박동훈'이다.


 키다리 아저씨 닮고 싶어 구호 단체에 작으나마 후원을 하고 있다.

 우연히 TV에서 목도한 장면 하나...

부모없이 함께 사는 할아버지 간병에 학교 등교 전후 시간 쪼개 새벽같이, 밤늦도록 헐레벌떡이는 아이의 모습..

 너무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있는 것 같아, 어깨 위 얹혀진 작은 돌 하나 덜어내주고 싶었다. 후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언젠가 그 아이도 나처럼 지나온 삶 돌아보며 키다리 아저씨들에 대해 감사히 생각하는 날 있으리라.


 힘들게 살아가는 인생에 키다리 아저씨 한 명쯤은 있기를 기원한다.



              후원단체가 카톡으로 보내온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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