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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J Jul 03. 2024

어떻게 죽을 것인가 - 아툴 가완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죽음

죽음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모두가 죽는다는, 날 때부터 꼬리표로 달고 다니는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산다. 죽음을 생각할 기회가 없다. 나는 이런 죽음에 대한 책을 읽지 않는다면 아마 망각할지도 모른다. 더 젊었던 시절의 죽음은 유니콘과 비슷한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는 개념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기억이 존재하는 삶 안에서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다.


주중 병원으로 출근하는 내가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다?

죽음은 늘 곁에 있었지만 병원에만 있었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30분 동안 심폐소생술을 하고, 사망선고를 하고, 다음날 아침 빈 병실침대를 보고, 수술실에서 심장이 죽어가는 것을 봤다. 하루에 한 번 이상 만나는 무감각 해져 버린 단어가 죽음이었던 적도 있다. 새벽에 간호사의 전화를 받아 가족들과 함께 임종을 기다릴 때가 이었다. 그때는 마치 내가 저승사자인 듯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순간조차도 병원 입구를 나오면 죽음이라는 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죽음은 죄인처럼 병원이라는 감옥에 갇혀있다.


죽음을 대상화해 병원에 가둬두고 했던 수많은 성취는 시대의 믿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고작해야 떼어내는 수술이었고 항생제의 발견이었다. 그나마 이런 발전도 대량학살의 전쟁을 통해 이룩되었다. 단적으로 본다면 현대 의료의 특기는 치료도 못할 병을 조기에 진단해 심리적 고통을 가중시키는 데 있다.

희망은 계획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계획은 희망밖에 없다.

생존율이라는 긴 꼬리에 거는 도박, 그 희망밖에 할 수 없는 현대의료는 죽음을 사람들로부터 분리시켰다. 죽음을 단죄하기 위해 사람들을 몰아넣고 단지 생명유지에 몰두했다. 생명이라고 할 것도 없다. 심폐기능이 멈추지 않는데만 관심이 있었다.


환자도 삶도 가족들도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아주 소량의 그라목손을 먹고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본 적이 있다. 아마도 환자는 진짜 죽을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겁박하려고 농약을 입에 넣었다가 뱉어냈고 위험하다는 의식 없이 입에 남아있는 농약을 자신도 모르게 삼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폐는 굳어가고 중환자실까지 오게 되었다. 어쨌든 자살시도, 의료보험도 안 되는 상황에 인공호흡기를 달고 하루 몇백만 원의 입원비를 덮어쓰며 결국은 죽음으로 향 할 몰락을 맞았다. 가족들의 눈물의 호소에 자신의 일이 아닌 듯 사회사업부로 연결시켜 주는 게 고작, 무표정으로 환자의 심폐에 약을 쏟아 넣는 것, 이게 병원의 현실이다.


이렇듯 죽음에 무감각했던 자신과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은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무너짐의 순간 책에서 봤던 자유와 자율성을 놓치지 않는 삶을 내가 가질 수 있을까? 그리 먼 미래가 아닐 부모님의 무너짐에 품위 있는 삶을 지켜드릴 수 있을까? 당연시되는 K장녀 내 일상의 희생도, 브레이크포인트 대화를 부모님이 받아들여줄지도 두렵다. 아직은 두렵다고 피하고만 싶다. 긴 기간을 두고 두 번째 이 책을 읽었지만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삶과 죽음은 이어져있다. 삶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죽음으로 가는 중이다. 죽음으로 가는 과정마다 삶인 동시에 죽음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아침에 출근하는 내 모습에는 저녁에 가족이 함께 저녁 먹을 수 있다는 당위성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죽음에도 삶이 있다. 죽음에 다가가도 결국 마지막 끊어짐의 순간이 오기까지 사는 중에 있다. 죽기 전까지 좋은 삶이 목적이라야 하는 이유다.


내 무너짐의 순간을 생각해 본다. 우선 의식은 온전했으면 한다. 독립된 공간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오디오북을 들을 수 있어도 괜찮다. 가끔 누군가와 다정한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의 나에게는 언제나 할 수 있는 지극히 사소한 바람이지만 마지막을 향하는 누군가의 삶에서는 큰 소망이 된다. 오늘따라 아침에 일어나 책을 읽고 일과 시작부터 살짝 피곤한 내 일상이 감사할 일들로 가득함을 느낀다.


삶! 그 모든 시작에 누군가의 돌봄이 있었고, 허물어감을 혼자 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없다. 마음이 무겁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의 삶을 응원하고 지지한다. 내가 마지막까지 원하는 삶을 그들도 누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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