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loe J Jul 20. 2024

기적 같은 하루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때로 우리는 한 치 앞을 못 보면서 영원을 계획한다. 가장 흔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게 자녀의 교육이 아닐까 싶다. 자녀의 10년, 20년 뒤를 위해서 사교육 시장에 휘둘리다 보면, 유일하게 존재하는 지금 여기는 아이와 얼굴 붉힐 일뿐이다. 감정이 좋지 못한 하루하루가 쌓여 10년을 만들어간다면 교육이 사실 무슨 소용일까? 게다가 그 사교육이라는 기준은 누가 세운 누구를 위한 계획이란 말인가? 세상은 누군가 만들어놓은 기준과 표준과 기본으로 가득하다. 때로 대세는 불합리하다.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의 기대에 발맞추느라 진짜 중요한 순간과 마음을 놓치고 살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며칠 전 일이었다. 아침의 5분은 어찌나 아쉽고 빨리 가는지, 그날도 거의 뛰어다니다시피 출근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가족들 식사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챙겨줄 것이 있어 방에 들어갔다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카톡에 빠져있는 초등학교 6학년 딸을 마주했다. 평소 과제분리를 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여러 가지의 상황과 스트레스가 순간적인 폭발을 만들었다. 


말로는 아침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교훈인 듯 보였으나 결국은 내 감정조절 실패로 인한 화풀이였고 그렇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출근길 운전이 시작되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게 아니고서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릴 수가 없었다. 와이퍼는 최고속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시야는 여전히 흐렸다. 오른손을 더듬어 운전할 때 쓰는 안경을 찾았다. 없었다. 이미 안경을 끼고도 비로 흐린 앞유리창은 앞차의 실루엣을 짐작하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운전하게 만들었다.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설상가상 반대편에 트럭이라도 지나가면 물폭탄을 맞고 1~2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좀 이른 시간 출발해서 7~80킬로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때 차 한 대가 내 앞으로 들어왔다. 초보운전 프린트를 뒤창에 붙여놓은 그냥 보기에도 불안한 차였다. 


갑자기 큰 트럭이 반대편에서 지나갔고 초보운전자는 아마 본능적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물을 같이 뒤집어쓴 나는 2초 뒤에야 브레이크를 강하게 밟고 있는 앞차를 발견했고 비상등을 켜고 오른발이 앞차 뒷 범퍼에 닿기라도 할 듯 끝까지 밟았다. 빗길에 타이어가 스케이트를 타듯 미끄러지던 순간 눈길에서나 느낄 수 있었던 ABS의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등에서는 땀이 흘렀다. 심장의 난동은 가슴을 뚫고 앞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순간 끊겼던 전기가 들어오듯 현실로 돌아왔고 앞차와 내차의 간격은 아마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책 말미의 문구가 떠올랐다. 

그녀는 하루하루를 하나의 기적처럼 여길 것이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 삶의 매 순간에 예기치 못한 사고들이 느닷없이 들이닥칠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기적이었다.

그 짧은 순간 안 좋은 말로 대화를 마치고 혼나서 울먹이는 딸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나왔던 장면이 떠올랐다. 일상이라는 마치 무한할 듯 반복되는 오늘과 내일, 느낌 때문에 영원을, 그렇게 살 줄 알았다. 출근하면 퇴근할 수 있는 게 당연하지 않고 아침에 헤어진 가족을 저녁에 만날 수 있다는 약속은 누가 해줄 있을까? 베로니카의 죽음의 예고, 당연하지만 무뎌진 진실의 자각이 그곳의 비트리올 중독자들에게 현실인식을 가능하게 해 줬다. 그들 각자가 삶의 중심을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은 수동적인 자신에서 스스로 선택해 소중한 삶을 이끌어나가는 주체로 가져올 수 있었다. 나 또한 5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죽음의 자각으로 출근할 수 있는 내가, 다시 만날 수 있는 딸이, 가슴 벅차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만큼 소중해졌다. 


주차를 하고 카톡을 켜 이 순간의 마음을 담아본다.

"딸, 엄마가 어른스럽지 못했어. 미안해. 우리 저녁 밖에서 먹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