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를 읽고
방랑자들이라는 책을 읽었다. 책은 책을 다 덮고서야 생각을 만들어줬지만 만들어진 생각이 맞는지는 알 수가 없다.
비정상적이고 괴상한 이야기,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세상의 모든 잘 알 수 없는 적어도 나는 별 관심 없는 이야기를 모아놨다. 그 속을 헤매었다. 뭐라도 적으려니 찾아야 해서 뒤적거렸다.
'지금 나온 이 이야기는 끝이난 이야기일까?'
'지금 읽고 있는 스토리는 앞쪽 어딘가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하고… 궁금하다만 어디서였더라?'
세상에 완전한 마무리란 없으나 저자가 나열해 놓은 이런 생각의 조각들은 내 머릿속에 So what? 그래서 뭐?라는 유쾌하지 않은 기분만 남기고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즈음으로 가버렸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요량으로 마인드맵을 그리고 글을 쓰는 나로서는 괴로움 자체였다. 올가 토카르추크 작가가 열어준 이 책에서는 마침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정리를 할 수 없었다. 아니 정리해야 할 생각 조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게 뭐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지?’ 하다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버렸다. 큰일 났다. 뭐라도 적어야 하는데 120개가 넘는 이야기 중에 골라서 하나의 스토리로 소설을 이어 써야 하나?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고작 생각나는 것은 비행기 멀미용 봉투 이야기와 가끔 자세를 고쳐않게 만들었던 야화 같은 이야기뿐이었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이렇게 헤맨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던가 싶다.
나만 모르는 거대한 비밀이 이 속에 있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가 아닌가!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왔다. ‘나는 서너 살이다...’ 재독을 시작하고 100페이지를 넘길 즈음 처음 읽었을 때와 그리 달라지지 않은 이 책에 대한 이해도를 느끼는 순간! 페이지 표시도 없이 책을 확 덮어버렸다.
"어쩌라는 거야? 이렇게 헤매게 해 놓고!! 결론이 없어!!"
"..."
"아?! 방랑!!" 정말 저자는 내가 이 책 속에서 헤매길, 방랑하길 바랐던 걸까?
내 삶은 한순간도 방랑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 의도는 그랬다. 어딘가를 떠날 때는 여행의 목적이 있었고 이사를 다니긴 하지만 한 곳에 자리를 잡고 한 직장에서 장기근속으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정말 정착한 존재일까? 영원, 불멸, 완전과 같은 말을 이 세계에 사용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나 또한 불완전하게 방랑하는 존재일 뿐이지는 않을까? 완전한 줄 알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이고, 정착해 온전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잠시 그곳을 방랑할 뿐이다. 내가 접한 것들을 다 아는 채 하지만 진짜 아는 건 사실 없다. 잘 모르면서도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익숙한 것만 아는 채하며 살아간다.
방랑은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낯선 문화 그 모든 것들과의 대면이다. 모든 게 있었고 내가 나타났다. 내가 있고 날 중심으로 맞춰간 게 아니다. 방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나 세상을 알아가면서 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의 게으름은 작은 성을 만들고 왕노릇을 하고 싶다. 적어도 날 구성하는 것들은 잘 안다고 생각하고 착각하며 살았다.
의도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내 몸을 나는 잘 알고 있을까? 내 몸이 아니라 유체이탈을 한 적이 없으니 나는 내 얼굴도 본 적이 없다. 비치는 무엇에 추측하고, 타인으로 하여금 나를 확인받을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얼굴도 그런데 내 몸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저자는 세상을 방랑하듯 인체를 탐험한다. 보존 용액에 담긴 장기와 신체조직에 대한 이야기 인체전시를 통해서였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진짜 내 몸을 알 수 있을까?
해부를 직접 해볼 수 없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대한 진실에 근접할 방법이 인체 해부등의 전시를 보는 것이다. 나도 어릴 적 책이나 전시 같은 걸 보면서 인간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 있는 낯섦을 해부를 하며 경험했다. 책이나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너무 정교하고 말끔했다. 어쩌면 뭘 만날지 모르는 방랑보다는 각 잡힌 계획의 여행처럼… 내 경험도 보잘것 없다. 외과의사가 되지 않은 이상 사람의 몸을 직접 칼을 들고 열어볼 기회는 해부학 수업 딱 그때뿐이다. 벌써 15년 전 이야기다. 그동안 해부학 책을 통해서 공부했던 조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수업이었다. 4달 동안 이어진 수업시간 동안 여행이었던 환상은 방랑이 되었다. 인체 전시처럼 정리된 책에서는 봤던 빨간 동맥, 파란 정맥, 노란 신경은 실제 사람의 몸에서는 모두 경계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는 회백색 탄력 없는 흡사 끈이었다. 치킨 먹을 때 별생각 없이 같이 먹는 허연 혈관과 다를 바 없었다. 또 잘 빗어 묶은 머리처럼 가지런한 근육은 진짜엔 없었다. 덕지덕지 붙은 지방을 걷어내 가다 잘못하면 같이 벗겨져버리는 구분 안 되는 혼돈, 그것으로 우리는 이뤄져 있다.
모두 서로가 서로를 알지 못하는 방랑하는 인간이다. 진짜 알고 있는 사실은 이곳에서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간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서로를 알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내가 사는 세상을 알 것 같지만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방랑뿐이다. 방랑을 함께해 주는 타인이 위안을 준다. 그들에게 친절해야 할 이유가 된다.
방랑은 인간의 숙명이고 방랑함은 나와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깊어진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좋게 해석하면 내 의식의 흐름은 지금 방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