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를 읽고
타인은 지옥이다.
누군가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원하지 않더라도 '우리' 속에서 태어나고, 그 '우리'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특히나 가족이라는 타인은 가까운 물리적 거리만큼 쉽게 상처를 남긴다. 가깝다는 이유로 배려가 없고, 친근함이라는 이름 아래 잘못되었다는 의식 없이 자주 선을 넘는다. '나'로 태어났지만 가족의 딸로, 형제로, 자매로, 배우자로 자란다.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채식 선언으로부터 시작한다. 영혜의 채식은 단순히 건강을 위한 다이어트가 아니었다. 그것은 억압된 무의식의 발현이자 정신적 고통의 표출이었다. 그녀의 무의식 속 억압된 감정은 가족과의 트라우마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어린 시절, 그녀를 문 개가 아버지로 인해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 가족이라 불리던 개가 오토바이에 묶여 달리다 죽던 날, 그 개의 고기를 모두가 함께 먹었던 순간은 각인된 공포로 영혜에게 깊이 숨었다. 그 순간은 단순한 끔찍함을 넘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족'이라는 틀에서 강요된 폭력이었다. 그 사건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꾹꾹 눌러 가두며 살았지만, 결국 그 억압이 그녀를 파괴적으로 변화시켰다.
영혜는 어느 날, 꿈을 통해 그 억압이 녹아내리는 경험을 한다. 꿈속에서 그녀는 육신이 얼어붙어 있던 냉동실의 고기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육체를 통해 세상과 연결된 그녀는 자신의 몸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채식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다. 영혜에게 이미 주어진 것은 '영혜로서의 삶'이 아닌, '가정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부장적 권위를 통해 다른 생명을 쉽게 잔인하게 다루며 그녀의 자율성을 억압했고, 남편은 그녀가 평범하다는 이유로 결혼했지만 이제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녀를 혐오했다. 남편은 그녀 곁을 떠날 때 어떤 노력도 없이 잔인하게 버렸다. 가족 누구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았고, 그녀의 자율성은 인정되지 않았다.
이 연작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영혜가 아닌 언니의 이야기였다. 이름조차 없는 언니는 영혜와는 다른 방식으로 가족의 억압을 견뎌왔다. 그녀는 '잘 참는 사람'으로 살아왔지만, 이는 그녀에게 더 큰 상처를 남겼다. 영혜의 채식이 자신의 몸을 파괴하는 선택이었다면, 언니는 끝내 스스로의 자아를 포기하며 가족을 위해 견디는 길을 택했다. 그녀는 영혜가 저항하며 선택한 자기 파괴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다. 버텨왔다"라는 그녀의 말은 그저 참고 견디는 그녀 삶이 그녀가 원한 진정한 삶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엄마가 전부인 지우가 있었기에 영원히 자신을 지우고 견딜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는 스스로를 포기하고, 누군가는 파괴적으로 저항한다. 영혜의 이야기는 그저 정신병의 발현이 아니라, 억압적인 가족 체계 속에서 누구도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 체계 속에 영혜는 자신을 파괴하며 자유를 찾고자 했지만 실패했고, 언니는 묵묵히 견디며 삶을 이어가지만 끝내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에 머문다. 이 모든 것이 결국 '가족'이라는 이름의 지옥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나는 가족이라는 억압적인 관계와 그로 인한 자아의 상실을 본다. 영혜와 언니의 선택은 각기 다르지만, 둘 다 그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해와 배려가 없는 친밀함 속에서 누군가는 파괴되고, 누군가는 스스로를 지워가며 살아간다. 가족이라는 관계가 때로는 삶의 지지대가 되기도 하지만, 이 소설 속에서 가족은 타인의 지옥으로 작용한다. 타인의 시선을 벗어나고자 하는 영혜와, 그 시선을 견디며 살아가는 언니의 모습은 가족 관계의 본질을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