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loe J Nov 06. 2024

비정상인가요?

출근! 연말이 다가와 검진센터는 전쟁터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도피처를 차에서 내리며 손에 들었다. '무슨 이야기까지 읽었더라?' 생각하며 표시해둔 페이지를 편다. 눈으로는 읽던 위치를 찾으며 차문을 닫는다. 생각의 1%쯤을 떼어 차문 잠금 버튼을 손으로 찾아 누른다. 한순간도 눈을 뗀 적 없지만, 내 메인 눈은 책을 쫓고 다른 눈은 주변을 감지한다. 자동적으로 엘리베이터의 방향을 감지하고 다리가 움직인다. 철제 배수구가 살짝 튀어나와 있지만 문제 될 것 없다. 어제도, 그제도 그랬던 것처럼 발을 살짝 들어 가뿐히 넘어서며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다. 밖으로 나와 골목길을 건널 때 처음으로 고개를 든다. 계단, 샛길, 턱, 버튼을 눌러야 하는 문, 출근 지문 인식기를 거쳐 미닫이 문을 열어 책상에 짐을 내려놓기까지 나는 여전히 소설 속에 있다.


원래 가능했던,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심장이 잘 뛰고 있을 때 그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고유 감각이 몸에 달린 눈이라는 비유는 우리가 얼마나 복잡한 신경과 감각을 유지하고 살아가는지를 잘 말해준다. 지나침과 모자람 또한 가장 적절한 진화의 단계를 통해 만들어진 이 정교하고 적당히 인간적인 사람이 바로 '나'다. 이런 감각뿐 아니라 나라는 정체성은 연속성이 있을 때 온전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뇌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원래 가능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사고를 제외하더라도, 우리가 소멸해가는 과정에서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은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된다. 자연스럽게 손을 뻗고 발을 옮기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내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상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 걸까?


'비정상'이라는 말이 가진 무게에 비해 우리는 너무 쉽게 '정상'을 규정한다. 먼 과거에는 죄악으로 여겨졌던 비정상적인 것들이 이제는 치료의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해받지 못하고 배제되었다. 그들의 삶을 무시한 채 교정만이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차이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고통을 주지 않음에도 말이다. '정상'이라는 다수의 권력으로 인해 때때로 그들의 삶이 파괴된다.


쌍둥이 형제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사회에 불이익을 준 적이 없음에도, 다수의 표준이라는 성급하고 이기적인 결정에 따라 사회화되었다. 분리되고, 정상인처럼 행동하길 강요받았다. 그들의 신비한 능력은 사소하게 희생되었고, 그들만의 의미가 있던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과 같은 이곳, 사회로 끌려나왔다. 의미도 느끼지 못하는 정상인의 흉내를 내며 살아가도록 강요받았고, 이를 '치료'라고 불렀다. [모자를 아내로 착각한 남자]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볼 수 있다. 그 책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후천적인 질병으로 인해 치료가 필요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의미에 근접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단순히 '정상'이라는 사회적 기준에 맞추기 위한 교정은 그들에게 반드시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적 없다고 안심할 일만은 아니다. 우리 모두의 편의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강요된 정상인의 사회에서 나 자신을, 혹은 자녀를 정상인의 사이클로 밀어 넣는다. 혹시 벗어날까 봐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자신이 가했던 비정상의 배제를 자신도 받게 될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상담을 하다 보면 사람들은 좁은 범위의 정상의 틀을 세워두고, 조금만 벗어나면 비정상을 걱정하곤 한다. 몇 달에 한 번씩 옆구리가 쑤시는 일과적인 증상도 병으로 걱정하다 오히려 병을 만들 지경이다. 하물며 머리가 아프고, 생리적인 작용도 그러한데, 인지와 신경에서는 더 넓은 범위를 적용해야하지 않을까? 혹은 그 범위 자체를 지워야 하지 않을까?


이 기준을 만든 사람은 누구였을까? 사회의 기준일 뿐이고, 때로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정의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얼마나 불확실하고 불명확한지를 인지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어려움의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한다고 해서 당장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쉽게 낙인을 찍고, 존재 가치를 줄여버리는 잘못을 줄이는 기회는 된다.


그들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상이라는 권력을 잡고 휘두르려는 집단적 히스테리가 아닐까? 인간과 인간다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