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을 읽고
회색 지역에 회색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이름도 없고, 하늘에 밝은 연파랑만이 인정되듯 그들은 이름조차 검열받았다. 그들은 이름 대신 보통 명사의 껍데기만 쓰며, 회색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는 순간, 주변의 눈과 귀가 그들을 주시한다. 심지어 가정조차 안전지대가 되지 못했다. 과거의 살구색이었던 엄마와 초록색이었던 아빠는 결국 회색으로 변했고, 그들은 온전한 자아를 숨긴 채 회색의 모습을 하고 만나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며 살아간다.
그런 회색 사회에서 주인공은 태어났다. 16살 생일을 맞이하던 날, 엄마는 그녀에게 회색 가정을 이루고 안전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잔소리를 시작한다. 엄마에게 결혼은 행복을 위한 선택이 아닌 신의 명령이었고, 공동체의 의무이자 책무였다. 그것은 나이에 걸맞은 행동이었고, 종교에 맞는 아이를 낳고 그와 함께 의무와 한계를 받아들이는 숙명이었다.
주인공은 이제 18살, 소녀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선다. 그녀는 자신의 색깔을 버리고 회색이 되어야 했다. 그녀만의 색깔을 만들어주는 책을 읽으며 걷기, 조깅하기, 프랑스어 배우기, 남자친구 만나기는 모두 버려야 했다. 그 색깔을 유지하려 한다면 눈에 띄게 될 것이고, 회색 공동체에서 낙인 찍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아를 버리고 회색이 되었다. 그들은 집단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표준이 되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는 이 시기를 지나며 자신의 색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낙인 찍히고 말았다. 주인공의 부모조차 그녀를 비난하며, 회색이 되어야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요했다.
회색의 시작은 공동체의 정치적 이념에서 비롯되었다. 이 사회의 이념은 처음에는 해방과 저항을 목표로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권력과 통제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율성을 갖지 못했고, 색깔을 지닌 개성은 사회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이념의 변질은 사회적 억압을 강화시켰고, 밀크맨과 같은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밀크맨은 주인공을 통제하고 굴복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 러닝할 필요 없어. 나는 너를 통제하고 고립시켜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거야." 밀크맨의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개인적 억압을 넘어, 사회적 통제 메커니즘의 상징이었다.
주인공은 프랑스 선생님을 통해 저녁노을의 다채로움을 본 후, 하늘이 항상 파란색이 아니어도 되듯 자신의 색깔도 버리길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그 사회에 자신의 색을 지켜내다 낙인 찍힌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지켜내려 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의도치 않게 드러난 색깔 때문에 사회에서 배제되었다. 사람은 계속 변하지만, 이 사회에서는 낙인이 흉터처럼 남았다. 주인공은 '중간딸', '가운데 언니'로 살아가다가 낙인이 찍힌 후에야 비로소 '걸어다니는 소녀'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들의 사회는 우리의 사회와 다르다. 그래서 그들을 이상하게 보는 것일 수 있다. 내가 보는 내 공동체는 이상적이지는 않더라도 상식적이다. 어쩔수없는 부조리들은 어디나 있으니 이정도면 된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와 다른 배경에 다른 역사를 가진 누군가 이 사회를 들여다본다면, 이 속에서도 부당한 배제를 당하는 누군가가 있지는 않을까? 나는 이 사회에서 행복 비슷한 것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런 사실 자체가, 내가 어느 정도 내 색깔을 잃고 회색이 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가 완벽히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님을 직감할 수 있기에, 나의 말과 행동에 들어 있는 무의식적인 배제를 더 세심히 살피며 살아가야 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