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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없는 주먹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17화

by rainon 김승진

박봉술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잠자는 주인 뒤통수를 물어뜯으려 한 개자식. 손 좀 볼 때가 됐다. 오늘 밤에 안명훈이 찜질 좀 하려구. 뒤탈 안 나게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대답 대신 현병규 시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긴 한숨을 중간에 끊으며 박봉술이 말을 이었다. “딱 반만 죽여 놓을 거야. 제대로 밥벌이도 못하는 놈. 거둬들여서 선거 사무장 맡겨 준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놈. 대가는 치러야지.”


“나도 그 새끼한테 눈탱이 맞을 뻔한 거, 아니 눈탱이 맞은 거. 이가 갈리긴 마찬가지야. 헌데 자칫 문제라도 생기면 어쩔 거야?”


호로록, 인삼차를 꿀꺽 한 모금 삼키고 박봉술이 왼손을 치켜들었다. “내 주먹엔 입이 없어. 내 동생들은 말이야... 말을 할 줄 모르지.”


8월 29일 오후 다섯 시. 한산시의회 첫 출근을 사흘 앞둔 속기 9급 공무원 합격생 안이지는 바 <쁘렘>으로 향하는 마지막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다시 또 바텐더로 일할 날이 올까...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한 대신에 좋아하던 일을 그만두는 마음속에선 기쁨보다 아쉬움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법 서늘해진 저녁 공기가 볼을 스치며 머리카락에 뿌리는 늦여름의 잔향이 달콤했다. 1년 중에 몇 안 되는 그런 날이 있다. 이 햇살, 이 빗물, 이 바람, 이 향기가 너무도 아깝고도 기꺼워라. 그리하여 이대로 잠시라도 시간이 멈추어 주었으면... 시간의 멈춤. 마술 같은... 믿어지지 않는 그때 그 일이 내게 다시 혹시 오려나... 발과 함께 걷던 생각은 이내 바 <쁘렘> 문 앞에서 멈추었다.


“에휴... 오늘이 마지막인 거야? 너 또 그만두면 매상 떨어지는 소리가 또 천둥을 치겠구나. 그냥 몰래바이트로 계속하면 안 되겠니? 9급 공무원 초봉은 쥐꼬리 반토막이라던데... 들키지만 않으면 되잖아. 몰래 대리기사 뛰거나 응? 투 잡 하는 공무원들도 있다드만...” 서운함 가득 묻어나는 은옥의 하소연에 이지는 짐짓 쌀쌀맞게 답했다. “좁은 시골 도시 바닥에서... 참 잘도 그게 가능하겠다. 꿈 깨셔. 대신 내가 손님으로 종종 놀러 올게.”


저녁 7시 반. 식사를 마치고서 음식 그릇들이 담긴 배달통을 내놓으려 문 밖을 나서는 이지를 향해 낯익은 얼굴이 반갑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바텐더 님! 오랜만이네요. 지금 영업하시는 거죠?”


선거 직전, 유세 도중 가게를 찾아 칵테일 준 벅(June Bug) 한 잔을 비우고 갔던 시의원 후보, 아니 이제 시의원이 된 기은석이 상쾌한 미소로 이지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런 미소에 기분 좋아지지 않을 사람은 없겠구나... 이지는 다시 만난 기은석이 진심 반가웠다. “아! 지금 영업해요. 어서 들어오세요!”


“시의원 당선되신 것 축하드려요. 또 와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물 한 잔과 메뉴를 건네며 이지가 밝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지난번에 만들어 주셨던... 그 6월 애벌레? 준 벅이었나요? 정말 맛 좋았어요. 다시 부탁드려도 될까요?” 바텐더로 일하는 마지막 날. 안이지 표 마지막 칵테일이 될 것 같구나. 멜론 리큐르, 말리부, 크렘 드 바나나, 파인애플 주스, 사워 믹스를 섞은 칵테일 틴을 흔들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던 이지는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9월 1일부터는 이 사람과 한 건물에서 일하는 거잖아? 새로 근무하게 된 속기사라고 말을 해야 하나... 잠깐 고민의 결론, 굳이 말하지는 않기로 생각하고 있던 그때. 출입문이 열리며 낯은 익지만 썩 반갑지는 않은 손님이 들어섰다. 뻔뻔한 건가? 멍청한 건가? 둘 다인 건가? 3지선다의 답을 고민하는 이지에게 대머리 뚱보가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이름이 뭐더라... 민설희 씨... 맞지? 본명은 아닐 테지만.”


살짝 기가 막힌 표정의 은옥이 박봉술 편집국장 앞에 물 잔을 내려놓았다.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그날 일은 다 화해했잖아? 다음에 또 오라면서? 뒤끝 없다면서?” “아. 그럼요. 뭘로 드릴까요?” “잭 다니엘 잔술도 되나? 스트레이트 더블로 한 잔!” 주문을 하며 박봉술이 힐끗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기은석 의원님 아니신가?”


“아. 네. 안녕하세요. 기은석입니다. 한산타임즈 박봉술 편집국장님이시죠? 오다가다 몇 번 뵈었는데... 이렇게 인사드리네요.” “아이고. 이 늙은이를 다 알아봐 주시고. 영광입니다. 의원님. 괜찮으시다면 같이 한 잔 하실까요?” 기은석 의원의 답을 듣기도 전에 박봉술이 그 옆 자리로 옮겨 냉큼 앉았다. “잭 다니엘, 스트레이트 더블입니다.” 박봉술 앞에 술 한 잔을 내려놓고 이지는 바 건너 두 사람 앞에 마주 앉았다.


“어째. 의정활동은 할 만하시고? 이제 초선 임기 시작한 지 두 달 됐나?” 슬쩍 말꼬리를 반토막 내면서 던지는 박봉술의 말에는 은근하게 깔보는 비웃음이 묻어 있었다. “생각보다 배울 게 많더라구요.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 학교는 어디 나오셨나? 고등학교 말이야. 한산고는 아닌 거 같고...” “아... 저는 원래부터 여기 연고가 있던 건 아니고...” “고향이 어딘데?” “서울입니다.” “서울?” 살짝 못마땅한 기색을 눈치챈 기은석이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5년 넘게 살아보니 한산시는 매력적인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제2의 고향으로 삼을 거구요.” “그래... 뭐... 바람직한 자세 구만. 음... 여긴 지역사회야. 이곳 고유의 정서와 전통이라는 게 있거든. 한산시에 왔으니 이제 한산시 법을 따라야지. 음. 나이는?” 이제는 대놓고 말이 짧아진 박봉술은 꼬치꼬치 기은석 의원의 신상을 캐묻기 시작했다. 세상사는 이렇게 역설적이기도 하다. 이 대머리 뚱보한테 감사할 일은 절대 없을 것만 같았는데... 기은석에 대해 궁금한 것들이 많았던 이지는 대신 물어봐 주는 대머리 뚱보 사이비 기자가 고마웠다.


32세. 서울 명문대를 졸업한 정치학 박사. 한산시는 돌아가신 어머니 고향. 나름의 소신과 패기가 분명한 정치신인. 취미는 책과 음악, 영화. 아직 미혼... 마치 예비 장인이라도 된 듯 이모저모를 뜯어보는 박봉술의 무례함에도 기은석은 미소를 잃지 않고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때 이지의 휴대전화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딸! 최종 합격했다면서? 정말 축하한다! 시간 좀 내줘. 아빠가 저녁이라도 한 번 사주고 싶어서 그래.” 읽자마자 메시지를 지우고 전화기를 내려놓자 이번에는 박봉술의 스마트폰이 노래를 시작했다. “아~아~아~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 “응. 말해...... 알았어. 시작해. 조심하고.”


밤 9시가 조금 안 된 시각. 가벼운 몸살 기운을 느낀 태연은 평소보다 운동을 일찍 마치고 복싱 체육관을 나섰다. 낡은 계단을 내려와 체육관 건물 뒤편에 세워둔 차로 다가가던 태연의 눈에 10여 미터 앞 몇 명의 사내들이 누군가를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주차장 끝을 지나 버려진 폐건물로 향한 모퉁이 길목에는 가로등이 없었다. 못 본 척 그냥 갈까... 3초 동안 망설이던 태연은 전화기 자판의 112를 누르면서 조용히 뒤를 밟았다. 조심스럽게 모퉁이를 돌자 폐건물 앞마당이 컴컴하게 펼쳐졌고...


세 명의 건장한 어깨들이 땅바닥에 쓰러져서 웅크린 한 남자를 각목으로 후려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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