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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雪夏), 눈 내리는 여름

[소설] 6월의 애벌레 – 제28화

by rainon 김승진

“안녕히 가십시오. 의원님.” 유태연이 고개 숙여 장세연에게 인사하는 동안, 안이지는 멀뚱히 세연을 쳐다만 보았다. 그런 이지와 다시 눈싸움을 하려다 세연은 그냥 피식 웃고는 자신의 쥐색 SUV에 올랐다. 그리고, 의회 청사 중앙현관 회전문을 막 빠져나온 기은석 의원이 그 세 고교 동창생들 사이 묘한 분위기를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었다.


30분 후 세연의 SUV는 한정식 식당 주차장에 멈췄다. <설하(雪夏)>. 눈 내리는 여름... 이 집 간판을 볼 때마다, 세연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모순 어법이 주는 운치나 멋보다는,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의 조합이 주는 불편함이 강하게 다가왔다. 만날 수도 없고, 만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더 좋을 어떤 두 가지. 이질감과 적대감은 어느 한 편의 굴복을 예정할 수밖에 없다. 눈이 이기거나 여름이 이기거나. 세상은 그런 것이다. 쨍쨍 맑은 여름 햇살을 반짝 받으면서 곱게 내리는 눈이라는 것은 없다. 지독하게 쏟아져서 여름의 대지를 덮어 얼리던지, 뙤약볕에 녹아 대지를 만나기도 전에 연기처럼 사라지던지. 죽던지, 죽이던지. 공존은 없다. 이지로부터 태연을 빼앗아 그 알몸을 알몸으로 안았던 6년 전 밤이 다시 생각났다. 나눠가질 수는 없었으니까. 이지와 세연. 어느 쪽이 눈이고 어느 쪽이 여름일까. 어쨌든 공유는 없다. 공존은 없다. 그런데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다. 박봉술. 단 1초도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늙은 구렁이지만, 나는 오늘 이 뱀과 저녁을 먹어야 한다. 그것도 웃으면서... 시동을 끈 세연은 양쪽 귀 아래 뒷목에 향수를 뿌리고 차에서 내렸다.


한산시 지역 정가를 쥐고 흔드는 막후 실력자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어머. 국장님. 늦어서 죄송해요. 먼저 오셔서 기다리시게 해서...” “에이. 시간 많은 늙은이가 미리 오는 거지. 내일모레 정례회 준비하느라 많이 바쁘실 텐데, 이렇게 귀한 시간 내줘서 내가 정말 고마워요... 근데... 강혁찬이도 온다고?” “네. 감사담당관님이랑 국장님 두 분 친하시다고 들었어요. 함께 식사하시면 좋을 것 같아서.” “흠... 뭐. 혁찬이. 내가 아끼는 동생이지. 근데 우린 평소에도 자주 보거든. 다음에는 오붓하게 장 의원이랑 둘이 데이트하고 싶어요. 난.”


대답 대신 세연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뱀 같은 놈아. 이마빡에 ‘나 변태요!’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네 놈이랑 내가 단 둘이 술을 먹을 거 같니? 음욕과 아쉬움이 반반 섞인 박봉술의 눈깔에서 슬쩍 시선을 돌리려는데, 방문이 열렸다.


“아이고. 제가 제일 늦었네요. 형님. 저 왔습니다. 장 의원도 와 계셨네?” “좀 일찍 일찍 와야지. 셋 중에서 네놈이 서열 막내야! 그거 몰라? 시의원은 4급 서기관 대우야. 어디 5급 사무관 나부랭이가 제일 늦게 나타나?” “에이. 참, 형님도... 저 오늘 술 좀 마셔야겠습니다. 웬 발칙한 꼬마 계집애한테서, 저 오늘 눈탱이 제대로 맞았어요.” “무슨 일인데? 일단 한 잔 받아! 자. 첫 잔은 원 샷!”


슬쩍 장세연 의원을 잠시 의식하던 강혁찬은 소주잔을 비우고 박봉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왜... 그 6월 선거 직전에, 저랑 갔던 그 바 기억나십니까? 그날 술 꽤 많이 마시고 2차로 갔던...” “기억하지... 그날... 그 또라이 같은 술집 여자애 둘 때문에... 경찰서 갔던 그거 말하는 거지?” “네. 근데. 그때, 그 맹랑한 바텐더 여자애 말입니다. 저한테 술 뿌렸던 그 여자. 오늘 날짜로 의회 속기직 신규로 들어왔다는 것 아닙니까. 제가 그 여자애 면접도 담당했었는데... 최종 합격해서 오늘부터 출근했어요.”


박봉술의 눈이 커졌다. “아니 근데 그 새까맣게 어린애가 글쎄... 흠... 저한테 보내는 메신저를 글쎄... 제 보기엔 분명 일부러 그런 것 같아요... 전 직원들한테 보냈지 뭡니까? 아주 제가 개망신을...” “좀 자세히 얘기해 봐!” “그게, 그러니까... 그건... 형님, 나중에 얘기하시죠. 오늘 장 의원님이 마련한 자린데... 다 같이 나눌 수 있는 대화를...” 더 얘기를 이어가다가는 6월 그날 밤, 자기들이 저지른 추태를 늘어놓게 될까 봐, 강혁찬은 얼버무리며 화제를 바꾸려 했다.


장세연의 귀도 커졌다. 안이지. 뭔가 일이 있었구나. 겁 없이 행동하는 네 성격, 내 잘 알지. 대충 그림이 그려지면서 무척 궁금하기는 했지만 세연은 관심 없는 척했다. “세상에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아니 오늘 첫 출근한 9급 말단 직원이 우리 감사담당관님께 무례하게 굴다니... 그것도 우리 의회 속기사가...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그 직원 제가 잘 관리하겠습니다.” “아냐. 아냐. 내가 괜한 얘기를 꺼내서 우리 장 의원님 신경 쓰이게 했네. 자자. 이렇게 반갑게 만났으니, 오늘 즐겁게 마셔 봅시다!”


빈 소주병 여섯 개가 쌓일 무렵, 이미 거나하게 취한 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남자들끼리 잠깐 물 좀 버리고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외로워도 조금만 참아. 우리 예쁜 세연씨.” 알코올에 푹 젖은 진상들이 잠시 나가자 세연은 잔에 든 소주를 테이블 아래에 둔 물 컵에 버렸다. 두 늑대 새끼 앞에서 취하면 절대 안 된다. 요령껏 술을 자주 버리기는 했지만, 세연도 살짝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핸드백에서 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친 세연은 핸드폰을 열었다. 카카오톡. 유태연. 프로필 사진. 나는 이렇게 너를 보고 있는데... 너는... 네가 나를 보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아. 내가 너를 보고 있다는 것만이라도 네가 알았으면... 그런데, 그건 기적일까? 마치 여름에 눈이 내리는 것 같은 기적일까? 설하(雪夏)... 어느 노래 가사처럼, 그런 기적이 생긴다면, 그때는 태연 너도 나를 바라봐 줄까?


한결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두 늑대가 다시 들어왔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일찌감치 정당에 들어가 이 꼴 저 꼴 다 보며 정치판의 밑바닥을 경험한 세연은 잘 알고 있었다. 술쟁이 남정네들이란, 취했다가도 소변을 배출하고 니코틴을 흡수하면 술자리 전투력이 회복된다는 것을. 두 진상 늑대 앞에서 이제 더 취하면 안 된다. 세연은 정신을 바짝 차리려 애썼다.


시시껄렁한 지역사회 가십들이 계속 오갔다. 장세연이 들으라는 듯이, 간간히 박봉술과 강혁찬은 아슬아슬한 음담패설을 섞어가며 뭐 대단치도 않은 사건들을 무용담으로 포장해 자랑했다. 키득키득 기고만장 허세꾼 둘의 우습지도 않은 개소리 참 길기도 하다. 그런 속마음과는 정 반대로, 세연은, 진심을 다해 진지한 얼굴로 다정한 미소로, 너무도 흥미진진해 견딜 수가 없다는 눈빛으로, 적당한 맞장구와 추임새를 담아, 그 개소리를 경청했다. 그런 세연의 태도가 무척 흡족했던지, 술자리 막판, 박봉술이 마지막 건배 제의를 외쳤다.


“이제 우리 한산시도 젊고 유능한 리더가 필요해! 병규 자식 3선 다 채우고 집으로 꺼지면, 그때는 우리 한 번 30대 최연소, 최초 여성 한산시장 만들어 보자구! 자! 우리 미래의 한산시장 장세연을 위하여!!!” “위하여!!!”


한정식 식당 <설하(雪夏)>의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밤 8시 반. 태연은 복싱 체육관에 들어섰다. 옷을 갈아입고 샌드백을 툭툭 치며 몸을 풀고 있는데 누군가 태연의 어깨를 쳤다. 태연이 고개를 돌렸다. 시의원 기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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