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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Apr 08. 2024

찬찬히 되짚어 들여다보는 것

굴과 돌도끼, 응시와 관조

  “세상에서 굴을 처음 먹어본 사람은 무척 용감했을 것이다.”라는 말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맛도 영양도 아직 미지(未知)였을 당시, 어느 바닷가 개펄에서 굴을 처음 먹었던 인간은 입에 넣기 전에 한참을 망설이며 유심(有心) 히 그것을 관찰했을 터. 그 맛에 감탄한 태초의 그는 그리고는, 어쩌면 움집으로 돌아가서 돌덩이를 깨고 다듬었을지도 모른다. 굴을 먹어도 되는지가 애매하던 시절이라면 아마도 돌도끼가 유일한 도구였지 않을지. 진땀을 흘리며 돌덩이를 갈고 깨는 그의 시선은, 역시나 찬찬히 유심(有心) 히 돌조각을 향했으리라. 온 신경을 집중해서, 온 마음을 모아서, 유심(有心) 히... 안 그러면, 돌 대신 손이 깨질 테니까.

     

  손 안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 가끔 감탄에 젖을 때가 있다. 돌도끼를 들고 사냥감을 쫓던 구석기시대에서 지금에 이르도록, 문명과 이기(利器)가 더할 나위가 있을까 싶을 지경으로 진화한 걸 보면 인류는 참 대단한 종족임이 틀림없다. 돌도끼에서 반도체로의 진화는 경이로운 일이고, 구석기시대에 태어나지 않아 참 다행이라는 고마움도 느낀다.     


  하지만, 얻은 것이 있으면 잃은 것도 있을 수밖에. 이 스마트한 시대의 미친 스피드 속에서, 인간은 응시(凝視)와 관조(觀照)의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됐다. 더 이상은 굴도 돌조각도 뚫어져라 고요히 관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편리함을 얻음이요, 유심(有心)을 잃음인 것. 불과 1분 전 스마트폰 화면으로 휙휙 넘겼던 뉴스 기사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모아 응시하고 관조하지 않았던 탓이다.     


  창피하지만 운전에 서툰 것을 때론 감사하게 여긴다. (어찌 땄는지가 그저 놀라운) 1종 보통 면허는 있지만 핸들 잡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거의 잡지도 않는 것은, 치명적인 ‘공간지각 능력의 부족’이 그 이유다. 도로 주행은 그럭저럭 하지만 좁은 골목에서 주차하거나 차를 움직이는 것은 개인적으로 느끼기엔 묘기에 가깝다. 차폭과 주변 공간에 대한 가늠이 서투른 이 타고난 길치는 덤으로 방향감각도 없어서, 수십 번 가본 곳도 헤맬 때가 많다. 하지만 이 멍청한 눈썰미에 대한 방어책으로 ‘되풀이해 살펴보는’ 습관을 기른 것을 나름 보상으로 여긴다.     


  처음 만난 이의 낯이 익기까지 몇 차례의 만남이 더 필요하기에, 바로 알아보지 못함이 무시나 무례로 읽히는 오해를 받을 때도 많다. 같은 이유로 영화도 절대 한 번에 이해하지를 못한다. 등장인물들의 얼굴조차 바로 파악하지 못하니, 줄거리를 간신히 알아채는 데만도 두세 번의 반복이 필요할 때가 잦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영화 한 편을 네댓 번 이상 반복해서 볼 수밖에 없었고, 그런데 그러한 반복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은 ‘응시와 관조’였다.     


  첫 번에는 아예 마음을 비우고 본다. 어차피 한 번에 이해 못 할 테니 부담도 없다. 대략 줄거리 흐름과 주·조연들의 안면 윤곽이 잡히는 것은 두 번째 관람 때. 집중과 관찰의 묘미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세 번째부터는 디테일을 살핀다. 반복이 거듭되면서는 장면 하나하나의 구석구석까지 읽을 수 있게 된다. 어느 한 신(scene)에서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대사의 내용이 익숙해지면, 그 다음번부터는 그 멘트를 치는 인물의 눈썹이 떨리는 경중과 입꼬리가 치솟는 방향의 미세함이 눈에 들어온다. 한 번을 더 볼 때는 한 화면 속에 동시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을 각각 헤아리는 즐거움. 되풀이가 쌓이면 커튼의 주름 모양과 색깔, 탁자 위 술잔에 새겨진 그림이 또 다른 감흥이 되고, 조명감독의 감각에 감탄하면서 왜 이 영화가 미술상도 받았는지가 비로소 느껴지게 된다. 그렇게, 많게는 영화관에서 스무 번을 봤던 영화 한 편은 기억 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고스란히 갈무리된다.     


  유심(有心) 히 보면 자세히 보이고, 자세히 보이는 것은 마음에 남는다(有心). 잠시라도 발길과 눈길을 머물러 ‘찬찬히 되짚어 들여다보는 것’은 스마트와 스피드가 점령한 정신없는 하룻길에 의미 있는 쉼표나 이정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진(前進)과 선착(先着)이 미덕인 시대에, 오히려 그 쉼표와 이정표는 효율과 경쟁에도 이롭지 않을까. 휴게소와 교통 표지판 없는 고속도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굴을 살펴보고 돌도끼를 갈며 고뇌하던 구석기인의 응시와 관조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조금은 요긴하지 않을지 생각해 본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응시와 관조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다리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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