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기차 여행 셋째 날
뜬금없는 고백을 하자면, 나는 잡지(정기간행물)를 좋아한다. 용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점프>, <밍크>를 사모았고, 그림엽서를 보내기도 했다. 내 그림이 소개되어 만화책을 상품으로 받은 적도 여러 번 있다. <핫 뮤직>으로 좋아하는 밴드의 새 앨범 소식을 듣고, 어떤 멤버의 사생활 이야기를 엿들었다. <엘르>, <보그>를 읽고 싶어서 미용실 예약 시간보다 일찍 갔고, 펑크 패션에 빠져 있을 때는 <KERA>라는 일본 잡지도 매달 챙겨 읽었다. 농구랑 배구에 빠져서 <루키>랑 <더 스파이크>도 구독한 적도 있다. 잡지는 관심 분야의 최신 정보를 가장 빠르고 깊게, 정확하게 알려주는 매체였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읽는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암호 같은 매개였다.
작년에 구독하던 <굿모닝팝스>에게는 해지 통보를 받았다. 1988년, 내가 태어나던 해에 시작한 라디오 방송은 2024년, 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었다. 방송이 종료하면서 교재 발간도 중단되었고, 남은 기간에 해당하는 금액을 환불해 주겠다는 문자를 받았다. 마지막 방송을 들으며 '이별의 슬픔'에 잠겼다. 이별해서 슬픈 마음,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현재 정기적으로 읽고 있는 간행물은 격월로 배송되는 국가철도공단의 <철길로 미래로>, 한국철도공사에서 발간하는 <KTX 매거진>이다. <KTX 매거진>은 KTX 열차를 타서 읽을 수 있다. 아름다운 사진을 곁들인 국내 여행지 소개글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중 '울산'에 관한 글을 읽고, 방문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간다!
부전역을 떠난 ITX-마음 1253호 열차는 약 한 시간 뒤 태화강역에 도착했다. 현재 태화강역은 2010년까지 '울산역'이었다. 이후 KTX 전용역의 이름이 '울산역'으로 정해짐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넘겨주고 '태화강역'이 되었다. 태화강 역사에서 장생포고래문화특구까지 어떻게 가야 할까? 안내가 잘 되어 있어서 금방 버스 노선을 확인했다. 장생포까지 가는 길은 완연한 공업 지대의 모습이었다. 평소에 보기 힘든 복잡하게 얽힌 파이프라인과 커다락 굴뚝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보이는 것들이 전부 크고 웅장해 마치 '거인국'에 놀러 온 것 같았다.
장생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모노레일이다. 생각보다 높고 길다. 1.3km의 레일이 장생포 일대를 잇는다. 여행지를 찬찬히 돌아다니기 전 마치 '구글 어스'로 거시적인 조망을 하듯, 모노레일을 타고 장생포 일대를 훑어봤다. 곳곳에 숨어 있는 고래 모형과 장식, 진짜 고래가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은 푸른 바다를 만났다.
조선 시대, 동해는 고래를 흔히 볼 수 있는 바다였다. '고래 바다'라 부르고 한문으로 경해(鯨海)라고 표기했다. 장생포 고래박물관에 들어가 제일 먼저 '울산 반구천 일대 암각화'를 관람했다. 신석기시대에도 이 일대 바다에 얼마나 많은 고래들이 살았는지, 얼마나 다양하나 종들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걱정 없이 바다를 유영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관람을 마쳤다.
장생포 모노레일 탑승구와 같은 건물에 있는 롯데리아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들은 햄버거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아예 안 먹었다. 얼마 전, 생애 첫 한 입을 먹긴 했다. 하지만 두 입, 세입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햄버거도 먹을 줄 알아야 한다며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여 유혹했다. 하. 내가 어렸을 적에 햄버거는 패스트푸드의 대표 주자! 만악의 근원이라며 질타를 받고, 자주 먹으면 눈치 보이는 그런 음식이었다. 햄버거를 먹어보라며 압박하는 나는 나쁜 엄마인가, 아니면 세상이 달라진 건가.
장생포에서 태화강역으로 돌아올 때는 택시를 탔다. 이번 여행에서 택시는 가급적 안 타려고 했는데, 버스 배차 간격이 꽤 길어 어쩔 수 없었다. 누리로 1776호가 플랫폼에 들어와 우리를 태우기 전 정비의 시간을 갖는다. 좌석의 방향이 달라지고, 열차에 오른다.
누리로는 정말 귀엽다. 4량 1편성으로 길이마저 귀엽다. 좌석 수는 263개이고, 이 구간, 이 시간에 누리로가 만석일리가 없다고 판단했고, 패스를 이용해 입석으로 예약했다. 내일로 패스로는 하루에 좌석 지정을 2회까지 할 수 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짝 두근거렸지만, 역시나 좌석은 많이 남아 있었고, 아들과 나란히 앉아 경주로 이동했다.
ITX-마음 1255호를 타면 태화강역부터 강릉역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태화강역에서 경주역, 경주역에서 포항역, 포항역에서 강릉까지 열차를 세 번이나 갈아타서 간다. 직통 열차는 매진이었기 때문이다. 2025년 1월 1일 동해선이 완전 개통되어 미디어는 연일 떠들썩했고, 좌석은 금방 매진되었다. 내일로 패스는 출발 일주일 전부터 구입 및 좌석 지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차피 나에게 기회는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경주역, 포항역 스탬프도 찍을 수 있으니 좋지 뭐!
경주역은 역 자체가 문화재 같았다. 지붕은 웅장하고 아름다웠으며 내부 층고가 높아 신전 같은 느낌도 들었다. 30분 남짓 역과 근처를 둘러본 뒤 포항으로 이동했다. 식당이 잘 구비되어 있어 이른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포항에서도 30분 정도 머무르고 강릉역으로 떠난다. 드디어 새로 개통한 동해선 구간을 달린다.
바다를 만끽하고 싶어 오른쪽 좌석을 골랐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바다가 가깝게 보이는 구간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겨울 해는 왜 이렇게 짧은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문은 바깥 풍경 대신 열차 안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7시 21분. 강릉역에 도착했다. 정동진역을 지나며 아들에게 일출 나들이를 제안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낭만파인 아들은 흔쾌히 수락했고, 다음 날 일출 시각을 검색했다. 6시 50분 출발하는 열차를 타면 딱이다. 가능? 가능!
양손 가득 편의점 음식을 들고 게스트 하우스에 체크인했다. 오늘 밤 야식과, 내일 아침 비상식량. 오랜만에 TV를 틀어놓고 이것저것 먹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훌쩍 넘었다. 과연 무사히 일어나 일출행 열차에 오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