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처 세대의 딸

세상 떠난 친정 엄마가 더 보고 싶은 날

by 오로라


3주 전에 친정어머니와 사별한 L에 전화를 걸었다.

"요즘 어떠신가 해서 안부차 걸었어요."

"목이 잠겼네요."

자다 일어나서 받은 것처럼 저음이었다.


그녀는 친정어머니와 한집에서 생활해 왔다. 그래서 혼자 있는 낮이면 더 힘들다고 했다.

"그러실 거예요. 저도 다음 주면 3주기인데 더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L은 엄마가 묻혀 계신 공원으로 자꾸만 달려가고 싶다고 했다.


"가슴 한 곳이 텅 빈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촉촉하게 전해졌다.

"보고 싶으면 가세요. 운전에 지장만 없다면."

L의 엄마는 치매 진단을 받고 주야간보호센터를 다니던 중이었다. 친인척에게도 친정엄마를 예쁜 치매 환자라고 말할 정도로 잘 모시고 있었다. 치매 진행을 늦추기 위해 나름 애를 쓰고 있었다.

얼마 전, 그녀는

전래 동화 전집을 구매해 읽어주고 어린아이처럼 엄마에게 공책에 필사하도록 시켰다.


"엄마 오늘은 그만 써도 돼."


그래도 계속 쓰겠다고 고집하는 날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녀는 무남독녀였다. 아버지는 어릴 때 돌아가셨다. 모녀 사이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종종 엄마를 아이처럼 대하는 느낌을 받았던 이유가 있었다.

젊은 시절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가장 노릇을 한 그녀는 친정엄마의 집도 사주었다. 가정의 모든 경제적인 문제를 도맡아 해결했다. 그렇게 애쓰며 살았지만 몇 년 전엔 힘든 일을 겪었다. 매스컴에서도 떠들썩했던 전세피해자 중 한 사람이 친정엄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다.



지난주 차 한잔을 마시자며 L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


"혼자 집에 있는 게 힘들어서."

"이해해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수척해 보이는 그녀는 화장끼 전혀 없는 모습으로 아파트 입구로 나왔다. 사망 신고 이후 처리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분주하게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집 문제 때문이었다.

경매 처리가 되면 혹시라도 남는 금액이 생길 경우 우선 갚아 준다는 내용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어머니 앞으로 있는 재산은 집 한 채 뿐이었는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 딸이 모르는 보험 하나가 있었는데 사망 보험 적용이 되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상해로 인한 사망이 아니라서 보험금을 받을 수 없다고.


두 딸이 있으나 학업과 취업으로 모두 독립해서 L 곁에 없었다.


“이것 좀 볼래요. 엄마 짐 정리하다가 발견한 거예요.”


L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우리 수진(L의 딸)이가 보내줬어요.”


그녀는 빠르게 휴대전화기를 열었다. 갤러리 속 사진 한 장을 확대해서 내밀었다.

꾹꾹 눌러 쓴 듯한 고인의 필적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그 동안 고생 많았지?’


공책 마지막엔 전래동화 주몽의 내용을 필사하다 만 상태로 멈췄다. 소천하기 직전까지 읽고 썼던 글귀가 그거였다고. 이전엔 느낌표와 물음표는 따라 쓰지 않았는데 이번엔 첫 문장을 그대로 옮겼다며 '복선'같았다고 했다.


주몽1.jpg 전래동화 '주몽' 내용 중


L의 어머니가 딸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간 것처럼 느껴졌다.

“어쩜 이럴 수가 있는지. 이거 보고 펑펑 울었잖아요.”

“어머, 그랬겠네요.”


L은 엄두가 나지 않아 친정엄마의 짐을 건드리지도 못했는데 큰 딸이 떠나기 전 급한 것만 따로 정리해 주다 발견한 모양이다.


치매 환자였지만 딸의 지극정성 돌봄을 받으셨다. 진단 후 주야간보호센터에 갈 때도 언제나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으로 신경을 써 주었다. 귀가하면 거실에서 걷는 운동을 규칙적으로 시켰다. 내가 방문한 날도 그랬다. 트로트가 나오는 휴대전화기를 손에 쥐고 딸이 한 바퀴, 두 바퀴 하면서 '한 번 더'라고 하면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엄마, 한 바퀴만 더 돌아요. 그래야 잠도 잘 오지."


그러면 또 한 바퀴를 돌고 딸이 말을 더 시킬까봐 소파에 앉는 모습이 귀여울 정도였다.


엄마를 위해 서로 다른 동화책 전집 3종류를 일부러 사들였다는 L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엄마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엔 슬픔이 가득 묻어났다.



서둘러 유품을 정리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 주었다. 먼저 한 경험을 나누었다.

울고 싶으면 실컷 울라고도 했다.


“저도 한동안은 많이 울었어요. 울려고 하는 게 아니가 그냥 생각나면 눈물이 저절로 나오는 거예요. 지금도 그리울 땐 앨범을 봐요.”


아버지 없이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으니 나보다 더하리라 여겼다.

딸과 엄마와 서로에게 얼마나 친밀한 존재였을지 이해할 수 있었다.



L가 나는 마처 세대의 딸이다.


'마지막으로 부모를 부양하고, 처음으로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세대'가 딱 맞는 것 같다. 조금은 서글펐다.


“앞으로 더 생각날 텐데….”




아직은 나도 친정 아버지를 애도 중이다.

5월 초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의 환한 미소를 하루에도 여러 번 바라본다. 휴대전화기 배경 화면에 그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 함께 카페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렇게 좋은 곳이 다 있냐?"


난생처럼 가 보신 대형 쇼핑몰에서 하신 말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이런 곳에 많이 와요."

"오래 사니까 별 곳을 다 와보네."


아버지가 좋아하는 메뉴로 식사를 하고 카페에 들려 시원한 냉커피와 스무디를 시켜 드렸더니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시며 환화게 웃으셨다.



'더 일찍 자주 모시고 올걸.'


그날 속으로 생각했었다.


그게 뭐라고 하지 못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두 해 동안 나름 친정아버지와 자주 데이트를 했다. 주로 아버지의 정기 진료가 있는 날 오후였다. 아버지는 내과와 치과에 한 두 달에 한 번씩은 꼭 가야 하는 상태였다.


엄마는 치매환자여서 아버지만큼 모시고 외출하진 못했다. 치매환자인지 몰랐을 때 엄마와 떠난 벚꽃 명소에서 두 분이 나란히 찍은 사진을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내 일상 속으로 두 분의 과거가 스며들었다. 그런 날이면 사진 속에서라도 두 분의 얼굴을 마주한다.



실내를 오가며 발견하는 두 분의 흔적은 나를 어린 딸로 만들었다. 내 삶 곳곳에 드리워진 부모님의 사랑을 함께 떠올리면서.

오늘도 아버지가 남기고 떠나신 손때 묻은 소파 위에 눕기도 했다. 두 분이 마주 앉아 드신 오랫동안 사용했던 하얀 도자기 그릇에 소고기미역국을 담았다.



이제 두 분의 생신날이 돌아와도 미역국을 끓여 드릴 수가 없다. 양지 부위를 넣은 미역 국을 끓이면 유난히 국물을 달게 드시며 연신 맛있다고 했던 아버지 모습이 생각난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땐 내가 아버지처럼 그렇게 말했다.


“엄마, 맛있다. 국물이 끝내준다. 뜨거워서 너무 좋아.”



엄마는 겨울이 생일인 둘째 딸이 온다고 하면 서둘러 장을 보셨다. 딸이 만들면 그 맛이 나지 않는 엄마만의 손맛이 가득 담긴 반찬만 골라서 한 상 가득 차렸다. 그런 엄마여서 참 좋았다.


그리운 내 엄마!


파릇파릇한 봄날 태어나신 아버지, 강렬한 태양 빛이 가득한 여름에 태어나신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



다음 주면 세 번째로 돌아오는 엄마 기일이다.


형제들과 광복절 휴일에 두 분을 뵈러 가기로 했다. 추모공원에 아버지도 계신다. 아버지가 며칠 뒤에 돌아가셨다면 엄마가 있는 곳으로 모시지 못했을 것이다. 두 분의 봉안묘 위치를 보니 그래 보였다.


“아버지가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일찍 떠나셨구나.”


자식들 예상보다 빨리 돌아가셔서 아쉬웠는데 두 분이 잠든 곳을 보니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공원이라 순서대로 자리를 배정받는다. 엄마가 3년 전에 소천하셔서 공원의 위쪽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엄마와 같은 구역의 마지막 위치에 묻혔다. 엄마를 올려다 봐야 하는 장소였다.


“죽어서는 울엄마가 아버지보다 서열이 높아졌네.”

“그러네. 아버지가 엄마를 우러러보시며 사시겠구나.”



살아생전에 엄마는 아내로서 아버지를 가장으로 잘 섬겼다. 엄마가 치매 환자가 된 이후엔 역할이 바뀌었다. 10년 동안 치매환자로 살다 가신 아내를 위해 아버지가 돌보셨다. 그동안 받은 것을 돌려주듯이 정성을 다하셨다. 가끔은 지쳐서 인상을 쓰거나 딸들에게 서둘러 친정집으로 오라고 전화를 하시기도 했지만.

아버지 덕분에 엄마는 치매 환자였지만 가족들과 잘 지내다 떠나셨다. 의식이 있는 날까지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치매 초기를 제외하면 엄마는 점잖은 환자였다.

그래도 돌봄을 지속해서 하는 그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특히, 예측할 수 없는 치매 환자 돌봄은 아프다. 이렇게 그립더라도.



“엄마는 이제 고아 됐다.”


L이 큰딸에게 한 말이었다.

“저도 그랬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중년의 나이에도 부모가 곁에 없다는 사실은 가슴을 저미게 한다. 하물며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아이들은 얼마나 아플까?



나이와 상관없이 부모의 부재는 뿌리가 뽑혀 나가는 것처럼 깊은 슬픔이 남는다.

상실이 실감나지 않는 L에 원기회복을 돕기 위해 식사자리를 권했다.

집 근처에 있는 한정식당으로 모시겠다고 하자 L이 좋다고 했다.

우린 다음 날 늦은 점심을 먹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날 L은 목소리가 잠긴 것이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아픈 것은 아니라고 했다. 아마도 낮에 또 혼자 있을 것이 예상되자 바로 허락한 것 같았따. 나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늘 곁에 있었던 엄마를 그리워했다. 이어 우리 곁에 있는 자녀를 위해 기운을 차리기로 했다.


“엄마!”


L과 나는 각자의 친정엄마처럼 엄마로 불려야 하는 자식들과 아직은 더 많은 날들을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가 더 늙어서 돌봄 대신 요양원을 알아보더라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기로 약속하면서. 더불어 조금이라도 더 다리가 건강할 때 여행친구가 되기로 했다.


마처 세대 다음엔 어떤 딸들이 부모를 그리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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