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름다운 마을 케스트헬리(Keszthely)를 떠나 낮 12시 10분 비행기를 타고 폴란드 바르샤바(Warsaw)로 가는 날이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을 사흘만 머물고 떠난다는 사실이 무척 아쉽지만 언젠가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발길을 뗀다.
사실 우리는 귀국길에 오른 것인데 다만 한국으로 직접 가지 않고 폴란드 바르샤바에 이틀을 잠시 머물며 관광을 한 후 한국으로 가기로 했다.
부다페스트 공항에 도착해 빌렸던 자동차를 반납 후 귀국 비행기 체크인을 하는데 다행히 수하물을 인천공항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간단한 짐만 챙겨 바르샤바를 여행할 수 있으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부다페스트에서 바르샤바 공항까지는 약 1시간 정도 소요되는 비행시간이었다.
바르샤바의 공항 이름은 '쇼팽 국제공항(Lotnisko Chopina w Warszawie)'이다.
원래 이름은 '바르샤바 오케치에 국제공항(Port lotniczy Warszawa-Okęcie)'이었으나 폴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프레드릭 쇼팽의 업적을 기려 2001년에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Lotnisko Chopina w Warszawie)'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공항 이름은 '프란츠 리스트 공항', 폴란드 바르샤바 공항 이름은 '쇼팽 국제공항'
공항마다 음악가 이름으로 명명하니 나에게는 이 두 도시가 더 예술적이고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헝가리와 폴란드 국민에게 있어 리스트와 쇼팽은 최고의 위인들 중 한 명임은 분명하다.
'낭만주의 피아니스트!' 쇼팽(Frédéric Chopin)...
어릴 때 피아노를 배우며 쇼팽의 연습곡을 치는 게 얼마나 어려웠던지...
때때로 쇼팽을 또 얼마나 원망했던지...
그래서 나는 피아노 연습을 그렇게 하기 싫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가 쇼팽의 도시에 와 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밤 쇼팽 피아노곡 연주회를 보러 가기로 되어있는데...
예술적인 바르샤바에서 낭만적인 밤을 보낼 수 있을지 기대된다.
공항에서 Bus175번을 타고 바르샤바 중심가로 가기로 했다.
나는 바르샤바가 두 번째 방문이다.
몇 년 전 방문했을 때는 다소 어두운 도시라는 인상을 가졌던 도시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다.
버스를 타고 가며 창밖을 통해 바르샤바의 거리를 본다.
고풍스러운 건물이 도시 대부분을 덮고 있었던 부다페스트와는 달리 바르샤바는 높고 현대적인 건물들이 많다. 아마도 전쟁 때 파괴된 건물을 다시 세워야 했으며 그 결과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바르샤바의 구도시에 몰려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다.
바르샤바 거리
구도시 근처에서 내린 우리가 가장 먼저 간 곳은 'Royal Route'라고 하는 거리, 역시 토요일 오후답게 많은 인파가 몰려있다.
Royal Route
따뜻한 토요일 오후,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와 아름다운 거리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높고 현대식 빌딩이 많은 풍경과는 다르게 고풍스럽고 멋진 건물들이 많다.
주변엔 레스토랑과 카페, 멋진 건물의 대학교, 공원들, 많은 뮤지엄들과 바르샤바 음악원 등이 있다.
쇼팽 박물관
한눈에 봐도 외관이 독특하고 아름다운 성당들도 많다.
거리를 걷는데 매우 흥미 있는 장면들도 많아 가던 길 멈추고 신기한 듯 쳐다보게 된다.
이 장소에는 거리 예술가들도 참 많다.
걷다가 아름다운 외관 앞에 모여있는 군중들이 눈에 띄어 그쪽으로 가본다.
이곳은 Józef Poniatowski 왕자의 동상과 네 마리의 돌 사자가 지키고 있는 현재 폴란드 대통령 궁이다.
바르샤바에서 가장 큰 궁전이며 17세기에 지어졌는데 지금은 대중 모임, 무도회, 연극 공연장 등 다양한 기능을 하고 있는 궁이다.
여덟 살의 쇼팽이 이 궁전에서 첫 콘서트를 열었다고도 하는 곳이다.
대통령 궁
하지만 오늘은 안타깝게도 장애인들이 휠체어에 앉아 시위를 하고 있다.
"우리는 대통령의 보좌관을 원한다"라는 피켓을 들고 있는 시위 내용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권위와 복지를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약자를 위한 정책은 어느 나라에서나 강조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 궁 앞에서의 시위장면
거리는 분주하다.
폴란드 민속 의상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도 보이고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듯한 상황도 보인다.
바르샤바 대학교 안으로 잠시 들어가 보는데 한쪽 무대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도 되나? 점점 궁금해진다.
잠시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려 구시가지 내에 위치한 숙소를 향해 가는 길.
오늘 우리가 묵을 숙소는 나무가 우거진 오래된 공원 내에 있다.
'Park Kazimiezowski'라고 불리는 공원이라고 불리는 이곳의 현재 모습은 1960년대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근처에는 바르샤바 대학교 캠퍼스도 있다.
Vistula 제방 가장자리에 그림처럼 아름답게 위치한 이 건물은 원래 왕실 별장으로 사용되었다가 젊은 귀족들을 위한 대학으로 용도를 바꾸고 기사학교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바르샤바 대학 입구
사회과학 대학
하지만 역사와 유서가 깊었던 과거의 이곳이 이제는 누구나 방문해 쉴 수 있는 평범한 공원으로 변해있다.
공원을 지나 숙소로 가는데 한쪽에선 skies line을 체험하는 재밌는 장면이 보여 남편도 함께 해보는데 몇 발자국 떼기가 어렵다.
나이 든 어른과 젊은 이들이 이런 놀이를 즐긴다는 게 새롭다.
나무가 우거진 공원이지만 아름답거나 말끔하게 정돈된 공원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많은 가족들과 사람들이 공원 이곳저곳에서 토요일 멋진 오후를 만끽하고 있다.
공원의 끝 즈음 도착했을까? 드디어 우리의 숙소가 보인다.
숙소로 가는 공원 길
숙소가 보이는 공원 잔디밭
숙소에 들러 잠시 쉬다가 나와 다시 본격적으로 바르샤바의 올드 타운을 구경하기로 했다.
올드타운을 향해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빠른 손놀림의 피아노 연주와 violin의 아름다운 선율 그리고 부드러운 트롬본 소리가 들리는데 아주 뛰어난 연주들이다.
골목길에서 우연히 듣는 연주치고는 최고의 연주라 생각하며 어리둥절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걷고 있는 바로 옆 건물이 쇼팽 주립 음악학교인데 학생들의 악기 연습 소리인 것 같다.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런 음악을 자주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겠다 싶다.
특히 이 근처에는 쇼팽 박물관, 쇼팽 연구소, 바르샤바 음악원(쇼팽 음악 대학교)이 모두 모여있어 '음악의 거리', '쇼팽의 거리'라 불려도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사실 5년마다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Chopin International Competition for Pianists)는 세계 3대 콩쿠르에 속할 정도로 세계에서 인정받는 대회인데 음악적 인프라가 잘 되어 있는 곳에서 음악 수업을 받는 학생들은 정말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부럽기도 하다.
쇼팽 음악학교
올드타운에 도착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올드타운에는 여기저기로 뻗어있는 좁은 골목길들이 많다. 골목들 모두 예스런 건물들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선사하고 있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한다.
많은 관광객들로 분주하지만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보이고 편안해 보인다.
바르샤바 올드타운의 거리들
구시가지 이 골목 저 골목을 걷는데 옛 정취가 그대로 느껴진다.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성벽과 요새, 그리고 붉은 저택들이 바르샤바 올드타운 분위기를 훨씬 더 고즈넉하고 깊이 있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어찌 보면 삼각형 모양처럼 이루어진 이 광장은 뛰어난 아름다움이 있거나 다른 나라의 광장에 비해 특별히 고풍스러움이 느껴진다고는 할 수 없고 언뜻 유럽 나라들의 광장에 비해 주변 건물들이 높다라는 생각도 들지만 광장 분위기는 왠지 편안하다.
마치 그림 동화책 어느 한 페이지를 펼쳐놓은 듯한 색감과 형태들이다.
잠시 이곳에 앉아 광장이 갖고 있는 많은 사연들을 떠올려 본다.
축제도 하고 시장도 서지만 한때는 이곳에서 죄수들이 처형된 무서운 곳이기도 했으며 특히 1982년 계엄령 때에는 잔인한 폭동의 현장이 되기도 했던 곳이니 광장의 역사와 사연은 참 많기도 하다.
올드타운 잠코비 광장
광장의 역사를 생각하며 앉아 있다 보니 벌써 예약한 쇼팽 연주 공연이 곧 시작될 시간이다.
광장 옆 폴란드 대주교의 박물관 연주홀(museum of the Warsaw Archdiocese)에서 공연을 하는데 오늘의 연주자는 일본인(Maiko Ueyama)이다.
연주곡목은 쇼팽의 녹턴을 포함해 즉흥 환상곡, 연습곡 등 모두 10곡의 쇼팽곡 들로 공연된다.
쇼팽의 피아노곡만 연달아 이렇게 작은 홀 맨 앞자리에 앉아서 가까이 들어보는 건 처음이다.
피아노의 페달을 밟고 떼는 소리, 연주자의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 표정, 그랜드 피아노 건반의 섬세한 터치와 손가락 모습들...
불과 2~3m 앞에서 듣고 보는 쇼팽의 피아노곡은 오디오를 통해서 듣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얼마 전 쇼팽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한국의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쇼팽 피아노곡과 비교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ㅎㅎㅎ
오디오를 통해 듣는 쇼팽의 피아노곡처럼 매끈하고 깔끔한 선율은 아니지만 현장에서 직접 실음으로 듣는 쇼팽 피아노곡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봄날 저녁 바르샤바의 올드타운 안에서 들었던 쇼팽 연주는 나를 과거와 낭만의 시공간으로 데려가 주는 충분한 역할을 해주었다.
쇼팽 연주 시작 전과 공연 후
공연을 보고 나오니 광장 한가운데에는 줄을 길게 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뭔지도 모르는 채 일단 줄을 선 후 알아보자는 마음이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선 줄은 왕궁으로 들어가는 줄이었다.
오늘 특별히 왕궁(박물관)을 무료 공개한다는 것이다.
높은 시계탑이 있는 우아한 건물이 바로 바르샤바 왕궁(Royal castle,Zamek Królewski w Warszawie)인데 이 왕궁을 무료로 내부까지 견학할 기회가 생기다니 횡재다.
현재 남아 있는 궁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던 것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복원 작업을 마치면서 지그문트 3세가 머물렀던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복원시키고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왕궁의 겉모습은 붉은색 벽돌로 된 특별한 화려함이 없는 외관이라 내부도 소박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의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왕궁 외관과 내부
모든 홀마다 가구의 배치들과 인테리어가 무척 고급스럽다.
특히 '알현실(Old Audience Chamber)'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무척 우아하고 천장의 그림이 사랑스러운 곳이었다. 화려함 속에 격식과 품위가 갖춰진 장소란 바로 이런 곳일 것 같다.
Old Audience Chamber와 senetor's Room
카날레토 룸은 왕의 아파트에서 가장 중요한 대기실이었다고 한다.
왕은 특별히 이탈리아의 유명한 예술가가 그린 '바르샤바의 풍경 시리즈'를 걸어 달라고 했다는데 이 그림들만 보고 있어도 바르샤바 속으로 빠져들어갈 것만 같다.
개인적으로 왕궁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테리어는 침실이었다.
침실의 포근함을 주목나무의 재질로 표현하고 있었고 고급진 직물들의 섬세한 패턴으로 실내를 장식하고 있어 우아함을 풍겼다. 특히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따뜻한 색상의 그림들이 이 침실의 아늑함을 더해주었다.
고풍스러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고급짐이 한 장소에 모여있는 장소였다.
이런 침실에서 쉴 수 있다면 아무리 힘들고 피곤함도 금세 사라질 것 같다.
카날레토 룸과 침실
작은 식당으로 사용된 Yellow Room에서는 1771년부터 1782년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시인, 작가, 학자들을 초대해 만찬이 열렸는데 이곳의 벽에는 이 방의 참가자 중 일부의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다고 한다.
화려하지만 편안한 느낌의 방에서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도 있었겠다 싶다.
Green Room은 Stanisław August 왕이 거실로 사용했으며 장관 및 고등 법원 관리와의 회의에 가장 자주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Yellow Room과는 다른 분위기의 방으로 조금은 사무적이고 정갈하며 무척 차분한 느낌을 주는 장소였다.
Yellow Room 과 Green Room
아름답고 격조 있는 왕궁의 이곳저곳을 방문해 직접 보게 되니 얼떨떨하기도 하다.
시간만 여유 있다면 몇 시간이고 차근차근 하나하나 설명을 읽어가며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곳이었다.
관람을 하는 동안 방 곳곳에서 자리를 지키며 우리를 안내하고 있는 모든 직원들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무척 상냥하게 다가와주니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아름다운 왕궁과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한 견학을 마치고 나왔다.
광장으로 나오니 광장엔 또 다른 볼거리가 우리 눈을 사로잡는다.
중세 복장을 한 사람들도 보이고 광장 한쪽에서 젊은 청년들이 불쇼를 보여주고 있다.
언뜻 보기에 나이가 무척 어린 청소년들로 보이기도 하는데 위험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고 불쇼를 하면서 가끔은 실수도 하는데 관광객들은 웃으며 박수로 격려를 한다.
광장 어디에선가 음악소리도 들리고 곳곳에서는 다양한 퍼포먼스도 이루어진다.
바르샤바 광장은 밤이 되면서 점점 더 화려해지고 낭만적으로 변해간다.
우리는 광장을 벗어나 로열 루트로 다시 돌아왔다.
로열 루트 밤거리의 화려한 무대가 우리의 눈길을 바쁘게 하는데 폴란드 전통복장을 한 남녀들이 연주를 하고 그 음악에 맞추어 댄스를 사람들이 보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음악을 들으니 흥이 나는지 서로 손을 잡고 춤을 춘다.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며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자 사람을 좋아하는 그들이 부럽다.
전통복장을 한 폴란드인
리듬이 신나고 멜로디가 정겨워 한 참 동안 지켜보며 있는데 무대 뒤편 건물(Central Agricultural Library) 내부에서는 무료로 음식을 나눠주고 있다.
이 무료 음식 행사는 폴란드'Lublin' 마을의 축제로 그 마을 사람들이 바르샤바에 와서 다양한 음식들을 직접 만들어 사람들에게 대접하고 공연도 함께 하는 마을 행사였던 것이다.
우리도 건물 내부로 들어가 폴란드 전통 음식을 맛보기로 했다.
폴란드 전통음식 맛보기 행사
우리에게 수프처럼 보이는 음식을 나눠 주는데 수프의 이름을 물어보니 '주레크(Żurek)'라고 한다.
약간 시큼한 맛이 나는 수프로 폴란드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라고 했다.
한국의 만두와 비슷한 '피에로기(pierogi)'도 함께 주는데 한국 만두보다 피(皮)가 도톰한 편이다. 만두 안에는 양배추와 양파, 다진 돼지고기가 들어 있어 한국의 맛과 비슷했다.
수프와 피에로기를 들고 발코니에서 밤거리를 내려다보며 먹으니 오늘 저녁 식사는 따로 안 해도 될 만큼 분위기도 음식의 양도 푸짐했다.
저녁을 먹고 흥겨운 음악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들어가 보니 무대에서는 루블린 마을의 포크송을 부르고 있다.
가장자리엔 의자가 둘러져 있고 중앙 홀에는 춤을 추는 장소인가 보다. 무대에선 악기 연주자들과 성악가들이 나와 신나게 공연을 한다.
덩달아 내 몸이 들썩 거리고 흥분이 된다.
우리도 가장자리에 둘러진 의자에서 본격적으로 관람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점점 분위기기 고조되자 자리에 앉아있던 관객들이 한 두 쌍씩 나와 서로 손잡고 춤을 춘다.
어느새 홀 중앙이 춤을 추는 사람으로 채워지고 있다.
우아한 왈츠, 신나는 폴카 음악에 어디서나 쉽게 춤을 출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부럽기도 하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춤을 추진 못했지만 이런 상황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성하고 행복했다.
때마침 성당의 종소리는 축제에 더 흥을 불어넣는 듯 신나게 댕댕 거린다.
길 가의 카페와 레스토랑에서도 맥주와 와인, 그리고 맛난 음식들을 먹으며 행복한 얼굴로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로 봄날 멋지고 화려한 이 밤이 더 환상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게 바로 문화와 예술, 그리고 낭만이 한가득한 유럽 광장의 풍경이지 싶다.
바로그때 우연히 보게 된 포스터, 바로 이거였다!!!
요즘 바르샤바에서는 주말마다 특별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는데 오늘 5월 13일(토요일)에 해당하는 행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운이 좋게도 마침 그 기간에 우리는 바르샤바를 방문했던 것이다.
그 특별한 행사 중 하나가 '박물관의 밤(Noc Museow 2023 w Warsaw)'이라는 행사였다.
'박물관의 밤'은 다른 나라(파리, 암스테르담 등)에서도 시행하고 있는데 1911년 베를린에서 처음 개최되었다고 한다.
'박물관의 밤'은 늦은 밤 시간까지 박물관, 갤러리, 문화 기관 등을 방문해 마음껏 관람할 수 있었는데 그 첫 박물관으로 우리는 'Academy Fine Art(바르샤바 미술 아카데미)'를 방문했다.
학교로 들어서는데 정면에 보이는 아름다운 건물 특히 중앙에 있는 아름다운 발코니에 눈길이 간다.
Academy Fine Art(바르샤바 미술 아카데미) 입구
미술 아카데미 건물 발코니
이곳은 시각 및 응용 예술 공립 대학으로 폴란드 정부가 지원하는 학교였다.
초기에는 수업이 도시 주변의 여러 장소에서 진행되다가 건축 공모대회에서 Alfons Gravier의 디자인이 선택되어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이곳은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고등 교육 기관 중 하나로 무려 1500명 이상의 학생과 300명 이상의 교수가 있는데 교수들도 대부분 저명한 예술가이니 이 대학에서 주최하는 예술 행사에서 폴란드 최고의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겠다는 사실에 무척 흥미로웠다.
늦은 시간인데도 대학생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실외 작품들
나는 미술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아 작품에 대한 평을 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소재로 독특한 표현을 한 예술 작품이 많았고 새롭게 도전하는 작품들도 눈에 많이 보인다.
작품마다 의미가 담겨 있을 텐데 그 모든 걸 이해하지 못해 안타깝다.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폴란드는 물론 전 세계에서 활약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실내 작품들
학교를 나와 'Called by the name'이라는 주제로 행사를 하는 박물관을 방문했다.
20세기 폴란드의 역사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기관에서 주최하는 행사였는데 이 연구소는 주로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사건, 20세기 후반의 사회와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는 기관이라고 한다.
'Called by Name' 전시에 걸린 사진들은 유대인들을 도왔다는 이유만으로 불법으로 간주되어 재판도 없이 살해당한 사람들과 기록들이 있었다.
불행했던 시간들과 사람들을 찾아서 기억하고 그들의 외침을 들어주자는 강한 의미가 담겨있음을 느낀다.
가슴 아픈 과거의 기억을 잊지 않고 끝까지 발굴해 가며 후손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주고 있다는 의미에서 왠지 숙연함까지 엄습해 온다.
Called by Name
벌써 밤 10시를 훨씬 넘긴 시각이다.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도 바르샤바 대학 캠퍼스는 불을 환하게 밝힌 채 우리를 환영하고 있다.
대부분 대학 건물들이 역사적인 건축물이며 이 대학에서 무려 6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내부로 들어가 보니 우리나라의 대학 내부 건물과 별 다른 차이는 없는 듯하다.
바르샤바 대학 일부 건물 외관
바르샤바 대학 내부
강의실로 들어가 본다.
반원형으로 되어 있는 강의실 칠판에는 뭔지 모를 글들을 가득 채워져 있다.
나도 잠시 강의실에 앉아본다. 수업을 듣는 학생처럼...
이런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받은 적이 언제였던가... 까마득한 옛날이다.
풋풋한 젊음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강의실에서 나와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공연을 보러 야외 캠퍼스로 이동했다.
밤이 되자 오늘 오후에 공연 준비를 했던 사람들이 멋진 무대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젊은 대학생들(?)로 구성된 팀들이 차례로 나와 다양한 민속춤 공연을 보여주는데 춤에 스토리도 있는 듯 해 무척 재밌다.
얼굴 표정과 몸짓등이 무척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젊은 청년들이 전통 댄스를 이토록 열정적으로 춤을 출 수 있는지 신기하기도 했고 이런 공연에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해주는 상황도 무척 흥미로웠다
요즘 내가 느꼈던 젊은 사람들의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먼 듯도 한데 바르샤바 젊은이들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된다.
독특한 공연들이 이어지는 덕에 다리가 아프도록 서서 보다가 캠퍼스를 나왔는데 여전히 Royal Route의 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피부에 와닿는 밤공기는 유독 부드럽다.
5월의 밤공기가 이렇게 연하고 매끄러운지 처음 알았다.
아직도 어디선가 음악 소리는 계속 들리고 있고 우리의 발길은 그곳을 향해 저절로 움직인다.
우리가 도착한 장소는 Czetwertyriski-Urski Palace, 폴란드의 대중가요를 부르는 록 그룹의 공연과 클래식 성악가들이 차례로 나와 공연을 한다.
밤 11시를 훌쩍 넘긴 이 시간에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들도 자리를 꽉 채우고 있다.
늦은 시간까지 공연을 하는 이들도, 함께 이 공연을 즐기고 있는 관객들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는 좀 힘에 부친다. 뒤편에 서서 공연을 보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나와야 했다.
내 몸이 이젠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신호를 보내나 보다.
새벽 12시를 갓 넘긴 시간인데 레스토랑과 카페에서는 사람들이 아직도 주고받을 얘깃거리가 있는지 열심히 대화 중이다.
남편도 그냥 들어가기 아쉬웠던지 맥주를 마시자고 한다. OK!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맥주와 함께 새벽까지 화려한 바르샤바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뜻밖에 만난 바르샤바의 토요일 축제는 무척 화려하고 알찬 내용들로 현지인들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이곳저곳을 다니며 새롭고 유익한 경험을 했다.
새롭고 신선했으며, 흥미롭고 한편으로는 진지했다. 무엇보다도 무척 건전했다.
새벽까지 많은 행사와 공연들이 이어졌지만 누구 하나 술이 과해 주정하거나 길에 쓰러지는 사람 볼 수 없었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밤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공연자, 관람객 모두가 이 행사에 한 마음이 되어 오늘 밤을 빛내고 있었다.
바르샤바에서 우리가 했던 모든 순간들과 경험들은 결코 잊지 못한 소중한 선물이었다.
한국에서도 봄이면 이곳저곳에서 축제가 열릴 텐데 걱정도 되고 또 오늘 만난 축제와 비교도 될 것 같다.
각 지역의 특색을 담은 다양한 축제가 열리지만 더러 불만과 불평으로 끝나기도 한다.
특히 축제에 빠지지 않은 음식들의 터무니없는 비싼 가격들로 관광객들은 마음이 상하고 화려한 홍보로 잔뜩 기대를 품고 찾아가지만 이렇다 할 특색 없는 내용으로 기대에 못 미쳐 시간 내어 다녀온 일을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시간, 그리고 많은 예산을 들여 준비하는 축제에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 행복하고 만족해하는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연구와 고민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아직도 거리 맞은편 굴뚝빵을 팔고 있는 가게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고 문을 열고 있는 레스토랑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오월의 토요일, 저물어가는 이 순간을 아쉬워하는 것 같다.
나도 , 남편도...
눈앞에 놓여있는 맥주마저도 오늘따라 더 영롱하고 아름답다.
오늘은 5월 14일 일요일이다.
우리의 23일간의 여행 마지막 날이며 바르샤바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새벽까지 바르샤바의 독특하고 진한 분위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는데 그 분위기가 희미해지기도 전에 우리는 이 도시를 떠나야 했다.
특히 어제 하루, 생각지도 못했던 바르샤바의 특별한 경험에 더욱 많은 미련이 남는다.
이른 아침, 어제 걸었던 Royal Route를 다시 걸어본다.
화려하고 북적거리던 이 거리가 이렇게 조용해지고 달라질 수 있나 싶다.
그새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딜 가고 다양한 행사들이 열렸던 곳들은 이렇게 말끔히 정리될 수 있나 싶다.
약 10여분 걸어 'Saxon Garden'공원을 만났다.
'작센 정원'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으로 원래는 귀족의 사냥터였고 궁전이었지만 1727년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바로크 양식의 프랑스식 공원이었고 19세기에는 낭만주의 영국식 조경으로 바꿨지만 나치에 의해 이 공원도 궁전도 파괴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다시 복원되었다.
파괴되고 다시 재건된 공원이지만 나무들은 여전히 울창하다.
이 공원의 하이라이트는 무엇보다도 '무명용사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폴란드를 위해 목숨을 바친 무명의 용사들을 기리는 묘다.
공원 입구에서는 마침 무명용사의 무덤을 지키는 군인들의 교대식이 있었는데 무척 엄숙하고 절도 있는 움직임이다.
이곳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세워진 국가 무덤 중 하나이자 국가의 영웅적 상징이라고 불리는 곳이라고 한다. 사망한 병사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놓인 화환이 있고 영원히 이들을 지키는 꺼지지 않는 불도 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처럼 이들을 기리는 폴란드 인들의 마음 또한 영원할 것이다.
이른 시각이라 아직은 공원에 사람이 많지 않아 새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공원 중앙으로 난 길에는 이십 여 개의 로코코 풍의 많은 조각상들이 줄 지어 서있어 공원의 우아함도 느낄 수 있다.
언뜻 보니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처음엔 프랑스식 공원을 모델로 했던 이유에서 일까?
공원의 분수와 조각상들
예쁜 색들로 자란 아름다운 꽃들이 정원에 가득하다.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우아한 분수대가 중앙에 자리 잡고 있지만 가동을 하지 않아 아쉬웠다.
가뭄이 심한가 보다.
공원 안으로 더 들어가니 'Bike cafe'가 있다.
자전거를 개조해 만든 자그마한 커피 하우스인데 잘생기고 멋진 바리스타가 멋진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를 만든다.
따뜻한 라테를 주문해 그윽하고 고소한 커피 향과 맛을 음미하니 아침 공원 산책이 한층 더 풍성하다.
잠시 공원 벤치에 앉아 쉬면서 쇼팽의 피아노 곡을 듣는다.
새소리와 곁들여진 아름다운 쇼팽 피아노곡을 들으니 바르샤바의 공원에 앉아 있는 게 실감이 난다.
주변의 이 자그마한 것들이 우리의 상쾌한 산책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자그마한 선물들이었다.
짧게 머물다 가는 5월의 주말, 바르샤바는 우리에게 멋진 추억의 도시로 자리 잡게 될 것 같다.